< 32. 창해(滄海)의 왕, 레비아탄 (5) >
한 줌의 빛도 없이 캄캄한, 차가운 회색 방 안.
실내에서도 흑색 로브를 뒤집어 쓴 여인은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핸드폰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2주. 그와 단 한마디의 얘기도, 문자도 나누지 않은 지 2주일이 흘렀다.
그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허나 생각이 많아질수록 보고싶은 마음 또한 커졌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사람,아니 엘프의 감정은 참 간교하고 간사하다. 이제는 ‘못’ 본다면 깨끗하게 포기할 수 있겠으나,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은 너무 억울하고 싫어.
“···딱 봐도 세진 씨네.”
엘프의 본성에 거나하게 욕설을 지껄이던 그녀는 이내, '동해의 수호신, 청룡'이라는 기사를 발견했다. 영웅오크, 늑대, 고블린에 이어 이제는 청룡까지. 정말··· 참가지가지 하는 남자다.
“만나러 갈까···.”
운이 좋으면 그를 볼 수 있는 크루즈 여행이 있다고 들었다. 아니면, 돈은 넘쳐나니까 요즘 갑자기 활기를 띄는 요트 시장에서 배를 구해도 좋고.
···사실 그녀는 이미 마법으로 운전하는 고속정(艇)을 하나 구매했다. 요즘 마법사들 사이에서 취미라고 하길래, 은근슬쩍 청룡이 출몰한다는 지역까지 몰아도 봤다. 그는 없었지만 시원한 바닷바람은 그 자체만으로도 묵은 스트레스를 풀어줬었지.
“후··· 안되지 안돼.”
그러나 자신이 김세진에게 호감이 있음을 명백히 인지한 지금은 그저 뒷걸음질을쳐야만 하는 때다.
그러기 싫고 답답하더라도 예전같은 반복은 사양해야만 한다. 아무리 엘프가 감정에 솔직하고, 오직 감정이 우선인 존재라지만 두 번 이상은 무리다. 이뤄져서는, 이뤄질수도 없는 관계는 이제 영화나 드라마로 족하니까.
하젤린은 그렇게 다짐했지만, 어느새 그녀의 핸드폰 액정화면에는 1월 14일, 당장 어제 새로이 업로드 된 김세진의 SNS이 담겨있었다.
화면 속 그가 짓는 미소는 어두컴컴한 그녀의 방과 달리 무척 환하고 밝았다.
*
1월 20일,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된다는 대한(大寒)의 날. 김세진은 여느 때처럼동해에 수영을 하러 나왔다가 김선호에게 뜻밖의 연락을 받게 되었다.
“중국 쪽에서요?”
-예. 청룡을 포획하려 한다는 낌새가 있다고, 중국 쪽으로 파견간 용병이 알아냈습니다.
“···허어? 그쪽이 왜요? 미친건가?”
김세진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맨발에는 이미 겨울바다의 모래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는데, 이 상황에서 수영을 못하게 되면 조금 화가 날 것 같다.
-아 그것이, 아마 청룡은 자기네 문화라는 인식이 팽배한 모양입니다. 중국의 국민들 뿐만 아니라, 정부까지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고요. 심지어 정부측에서는 이미 청룡 인양요청을 넌지시 받았다는군요. 물론 정부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거절했지만요.
“그게 뭔 개··· 지들 수호신 현무도 삶아 먹었으면서 뭔 짓거리랍니까?”
중국해에 서식하던 신수, 현무. 그러나 중국 정부는 극심한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신수를 죽여버렸다. 저들 말로는 용병단이 밀렵을 했다는데··· 세상에 그런 큰 난리를 내는 용병단을 용인해줄 정부는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그러게 말입니다. 혹시 몰라, 일단 사이트의 공지도 등급에 따라 달리 볼 수 있게끔 바꿔 놓았는데··· 최대한 조심하세요.
“근데 뭐..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바다 위에서는 거의 무적이에요.”
여태 경험한 바로, 레비아탄은 바다 위에서 만큼은 당해낼 자가 없다.
물론 김유손과 김선호는 바토리가 더욱 강할 것이라 하였지만··· 레비아탄의 자존심은 그 말조차도 의심했다. 어찌보면 당연했다. 보스몬스터도 혼자서 때려잡을 만한 존재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그래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헌데, 오늘도 수영하러 가십니까?
“예. 저는 괜찮으니까, 진세한이 언제 중상급기사가 되는지. 멀었는지 가까운지 그것 좀 캐내주세요.”
-아···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김선호와 전화를 마치고, 김세진은 레비아탄 폼으로 변해 바다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역시, 차가운 바닷물이 닿자 정신이 맑아지고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시는 듯하다.
정말 중독이라도 되어버린 걸까, 아니면 레비아탄이 성장하는 부작용이 유일하게 이것인 걸까. 이제 일주일에 서 너 번은 바다에 나오지 않으면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다.
“그릉그릉~”
레비아탄은 입가에 환한 미소를 드리운 채 해수의 흐름에 제 몸을 맡겼다.
내리쬐는 햇살과 바다의 출렁임. 쌀쌀한 겨울바람도 두터운 비늘이 둘러진 그에게는 그저 한여름 날의 냉수처럼 청량했다.
그렇게, 그는 평온하고 잔잔한 바다를 유영했다. 철새들이 겨울을 피해 창공을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저거 머핀이가 참 좋아하는 간식인데,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그러나 한 30분정도 지났을까.
김세진은 뭔가 이상한 마나의 기류를 느꼈다. 거의 반수면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확연하게 느껴지는 기운. 마치 사방을 애워싸는 듯한 그 기류의 세기는 점점 강해져만 갔다.
허나 이 곳은 바다 위. 게다가 별로 위협적이도 않아서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별안간 세상이 어두워지며 그가 수영하던 공간이 세계로부터 격리되었을 때에는. 이미 늦고 말았다.
“···!”
세계와 자연이 사라지고, 사방은 오직 암흑 뿐. 그는 황급히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결계?’
설마 중국인가? 근데 이렇게 빨리?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하던 김세진은 그러나, 어둠 속에서 등장한 인물의 냄새를 맡고는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준비했던 대로. 정석대로 간다.]
피의 냄새를 풀풀 풍기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놈들은? 뱀파이어였다.
처음에는 한 명 뿐이었으나, 점점 그 인기척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둘, 넷, 여덟, 열 여섯······ 점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나는 숫자에 세진은 입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생긴 건 되게 귀엽네요. 기절시키고 나서 한번 만져봐도 되죠?]
여자 흡혈귀가 자신을 가리키며 뭐라뭐라 뇌까린다. 도통 이해할 순 없지만 뭔가 기분이 나빠서 슬쩍 뒤로 물러났다.
[···너까지 그럴 거냐? 보스몬스터도 혼자서 상대했던 놈이니까 방심하지 말아라.]
[방심을 제가 왜 합니까.]
여자가 웃으며 두 손을 쫙 피자, 그 손바닥에 별안간 선홍빛 채찍이 만들어진다. 그녀를 시작으로 모든 다른 뱀파이어들 또한 손에 무기 혹은 마법을 쥐었다.
“···.”
이유가 어찌됐든 저 뱀파이어들은 자신을 노리고있다. 김세진은 대충 플러쉬 골렘을 죽여 저들의 계획을 방해했기 때문이겠지, 라고 추측했다.
‘레비아탄 폼으로 싸워야 하나?’
세진은 고민했다. 레비아탄은 아마 모든 몬스터 폼 중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 그러나 수분이 없는 이 곳에서는 다른 몬스터가 더 나은 해법이 될 수도 있다.
그는 사위를 에워싼 새까만 어둠을 한번 훑어보았다.
레비아탄은 자신과 맞닿은 모든 종류의 마나를 이해할 수 있다.
이 마법은 결계처럼 보이지만 결계가 아니었다. 아마도··· 세계와 세계 사이의 ‘균열’.
그제서야 김세진은 어째서 요즈음 전 세계적인 몬스터 출몰이 이토록 잦았는지 이해되었다. 인공적으로 균열을 조성할 수 있다면, 몬스터를 불러내는 것은 누워서 껌뱉기나 다름이 없으니.
‘그럼 어차피 늑대 폼으로도 안될 확률이 높다.’
단지 결계라면 라이칸슬로프 폼으로 깨부술 수 있겠지만······ 차라리 지금은 레비아탄 폼으로 놈들을 상대하는 것이 낫겠지.
[돌격]
리더로 보이는 뱀파이어가 짧은 단어를 읊조린 순간.
족히 마흔은 가벼이 넘기는 수의 뱀파이어들이 공격을 개시했다.
마창, 채찍, 검, 화염구, 새파란 운석, 얼음 송곳, 불타는 화살 등등···
수 많은 마법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쏟아져 내린다. 어두운 세상을 다채롭게 물들이는 마법의 향연.
김세진은 마나가 일궈내는 현상들을 바라보며? 그 모든 현상들을 똑같이 복제해냈다.
비록 해수는 없지만 레비아탄의 몸 안을 가득 채운 마나는, 그 어느 무엇보다 푸르고 찬연한 마법들을 빚어냈다.
콰아아아앙-!
뱀파이어와 레비아탄이 격발한 공격들은 모두 ‘마법’이라는 범주 안에 있음은 명확했하.
그러나 그 ‘농도’와 ‘세기’의 차이는 무시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님을, 뱀파이어들은 처음 마법이 맞부딪혔을 때 여실히 느꼈다.
“크악!”
“끄으!”
복제해낸 마법이 놈들의 마법을 가벼이 이겨내고, 수많은 창살과 마법의 폭풍우가 뱀파이어들을 집어삼킨다. 고통에 찬 비명 마저도 마법의 파공음에 의해 사라지는,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세네요. 괜히 동해의 왕이 아니네.]
여자 뱀파이어가 여유로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김세진은 의아했다. 마흔에 달했던 뱀파이어들의 거의 반절 이상이 죽어버렸는데도 어떻게 저렇게 여유로울 수···
세진은 뒤늦지 않게 그 여유로움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어둠 속에서, 다시금 뱀파이어들이 등장했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 많이.
[다시 간다.]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읊조리자 다시금 놈들의 손아귀에 수 많은 마법들이 고였다. 그리고 김세진은 이를 꽉 깨물었다.
[오. 입술 꽉 다문거 봐. 귀엽네.]
[···입닥쳐 제발.]
방금 전 마법을 복제하느라 소모된 마나는 전체의 10%남짓. 마나 소모가 큰 브레스를 비롯한 고위급 마법을 차치하고, 역전의 전사를 비롯한 여러 스킬들을 최대한 활용한다면··· 앞으로 최대 스무 번 이상은 버틸 수 있다.
‘..그 안에 끝나야 할텐데.’
김세진은 얼굴을 굳히고서 마나를 분출해냈다. 그의 주변으로 물방울들이 방울방울 피어올랐다. 처음에는 스멀스멀 귀엽게 아른거리던 물방울들은, 별안간 쾌속으로 돌변하더니?
[폭탄이다. 뛰어!]
-콰아아앙!
뱀파이어들에게 쇄도하여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렇게,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영겁의 전투가 개시되었다.
김세진으로서도 난생 처음 사용해보는 마법이 연신 균열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뱀파이어들은 계속해서 밀어닥쳤다.
가뜩이나 개체수도 적은 놈들이 인해전술이라니... 기겁하던 세진은 이내 그 사체들이 단지 인형에 불과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너무 잘 만들어져 직접 접촉하고 나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허나 그걸 알아냈다 하더라도 전세는 변하지 않았다.
균열의 내부를 모두 폭발시키는 대마법을 시전한다 하더라도, 균열에 익숙한 몇몇 놈들은 단지 균열을 나갔다가 들어오면 끝이었으니까.
그렇게 마나가 무의미하게 허비되기를 반복.
'..이거.. 망한 것 같은데.'
마나가 점점 소모됨에 따라 정신이 혼미 해지고 몸이 둔해진다.
그는 쏟아지는 나른함과 필사적으로 싸우다가, 결국 거동을 멈춘 채 천천히 눈을 감고 말았다.
[와. 드디어 끝이야? 진짜 세네. 마나석을 무려 1000개나 썼어요 장로님. 이거 로드 님한테 혼날 것 같은데···]
[···바토리에게 혼나는 것 보단 낫지.]
그리고 뱀파이어들의 거친 숨을 몰아쉬며 레비아탄의 몸을 살짝 건드렸을 때.
쏴아아아아아-
별안간 바람이 불며, 세계가 제 색을 되찾았다.
새까만 어둠이 다시금 자연의 다채로움으로 물들며, 메말랐던 레비아탄의 살결에 차디찬 해수가 달라붙는다.
[···망했네.]
그리고 김세진은 희미해져가던 의식을 되찾고서 레비아탄의 푸른 눈동자를 칼날처럼 번뜩였다.
-──!!
정신이 차가워지자 속을 가득 채우는 것은 오로지 분노 뿐이었다.
왜 어떻게 결계가 깨졌는지 따위는 상관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포효를 내질렀다. 그러자 바다 위에 태풍이 휘몰아치며 해류가 격렬하게 뒤엉켰다.
[조건 완료: 바다괴수의 분노.]
패배 직전에 살아난 바다괴수의 원천적인 분노.
-바다괴수의 성장률이 10% 상승합니다!
-고유 특성 '???'를 습득합니다.
'신격'의 존재만이 얻을 수 있는 '???'.
김세진은 별안간 자신의 시야가 급격히 치솟음을 느꼈다.
빌어먹을 뱀파이어들은 점처럼 작아지고, 저 멀리 균열을 흐트러트린 장본인인 듯한 요트가 보였다. 요트 위에는 의외의 인물, 하젤린이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있었다.
[···오.]
[와우.]
레비아탄은 방금전보다 족히 두배는 거대해진 채, 분노서린 눈빛으로 뱀파이어들을 굽어보았다.
그 형상에서 힐끗 보이는 신화 속 용(Dragon)의 모습에. 그들은 상황도 잊고 감탄을 내지를 수 밖에 없었다.
[이, 일단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어서 도망을..]
뱀파이어들의 별안간 먼지형태로 변하여 도주하려 했으나 세진은 용납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순간 바닷물이 원형으로 휘몰아치며 커다란 돔을 형성하고, 그 속에 갇힌 뱀파이어들은 낭패어린 표정을 지었다.
< 32. 창해(滄海)의 왕, 레비아탄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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