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하는 몬스터-110화 (110/174)

< 32. 창해(滄海)의 왕, 레비아탄 >

시동이 걸렸음에도 차는 출발하지 않았다.

“···일로 여러 번 만나는 건 괜찮은데. 너무 가까워지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미적거리는 세진에게, 옆자리의 유세정이 말했다. 여느 때와는 달리 차갑게 굳은 목소리였다. 허나 세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오빠 애인이잖아. 이런 건 부탁해도 되는 자격이 있는 거 아니었어?”

그는 그제서야 옆자리로 시선을 두었다. 그녀의 물기 젖은 눈동자에는, 무겁게 굳은 그의 얼굴이 담겨있었다.

“그래.”

그는 다시 전방을 바라보며 엑셀을 밟았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하젤린을 스쳐 보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유세정은 이내 고개를 푹숙이고서 중얼거렸다.

“···미안해. 근데 오빠도 내 입장이 돼보면 알거야···.”

"···"

세진은 말 없이 유세정의 손을 잡아주었다.

“이거, 말 대신 행동이라는 거 맞지?”

그녀가 짐짓 쾌활하게 물었다.

“···응.”

그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

11월.

세간의 시선이 새벽기사단으로 집중되었다. 라이칸의 기자회견 때문이었다.

지금, 기자회견 장소인 새벽의 대강당에는 수용인원 3000명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국적·인종불문 기사와 기자, 심지어 마법사들까지 모여 북적거렸다.

이 발표와 관련하여 여태 증권가나 기사단 쪽에 흐르는 찌라시에 따르면 많은 소문들이 있었다. 라이칸이 요 근래 발생하는 몬스터 사태의 원인을 밝혀낼 것이다, 아니면 레드문이 다시 발현될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라이칸 자신의 정체를 밝힐 것이다.

사람들은 대충 첫번째 ‘몬스터 사태의 원인을 밝혀낼 것이다’ 쪽으로 생각을 하고서, 곧 도착할 라이칸의 대변인을 기다렸다.

“형님, 어떻게 생각합니까?”

“몰라. 말 걸지마. 국장님이랑 통화해야 된다고.”

“내가 말 안 걸어도 시끄럽구만 무슨··· 어! 온다!”

웅성거림으로 소란스러웠던 대강당에 잠시동안의 침묵이 찾아왔다. 강당의 앞문이 열리더니, 저벅저벅 구두소리와 함께 이 자리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김세진. 그는 익숙한 몸짓과 표정으로 단상 위에 올라 카메라를 응시했다.

동시에 수많은 플러쉬가 터져 올랐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 하지 않았다. 그 의연한 모습에 몇몇 여성들이 얼굴을 붉혔다.

플러쉬가 점점 잦아들었을 때쯤, 김세진은 본론을 시작했다.

처음은 뒤이어 말할 허무맹랑한 예측의 신뢰도를 그나마 높이기 위한 가벼운 데이터였다. 몬스터 필드 쪽의 마나농도가 급격히 높아졌다는 통계와, 전세계 곳곳에 보스 등급 몬스터 출현이 잦다는 현상.

“그게 라이칸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한 기자가 외쳤다. 김세진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서, 김유손이 꾼 꿈의 내용을라이칸의 예견이라면서 늘어놓았다.

보스 등급 몬스터의 출현으로 인해 지옥도가 된 대한민국, 그리고 세계. 그 미래에선 몬스터의 놀이터가 된 대지는 흉험하게 짓밟히고, 사람은 그저 먹이감으로 전락한다.

그의 말이 끝나자 무거운 침묵이 장내를 채웠다. 라이칸이 주장한 것은, 거창하게말하면 ‘세계멸망’. 아무리 레드문을 예측한 사람이라 한들 믿기 힘든 말이다.

“···믿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김세진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서 단상을 내려갔다.

사실, 할 말이 없었다. 이 이상 준비해온 자료도 증거도 없으니까.

떠나가는 그에게 기자들의 고함이 쇄도했지만, 그는 아무런 답변 없이 새벽기사단의 강당을 빠져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그 날, 대한민국이 폭발했다.

*

인터넷과 TV는 온통 김세진의 기자회견 내용을 다뤘다. 몇몇은 정신병으로 치부했고, 몇몇은 합리적인 예측일 수도 있겠다 말했다.

하지만 그 수 많은 의견 중. 모든 비판과 비난들은 고작 일주일 만에 뒤엎어졌다.

몬스터 필드의 최후방. 괴조가 출몰한지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또다른 보스 등급의 몬스터 ‘플러쉬 골렘(Flesh golem)’이 출몰한 것이다.

온몸이 여러 몬스터와 사람의 살점으로 이루어진 플러쉬 골렘은, 재료가 된 몬스터 혹은 인간의 총합만큼 강력하다.

헌데 이 골렘의 크기는 무려 높이 70m, 너비 34m. 이만큼 거대한 몸체의 내장과뼈, 근육을 채우려면 족히 잡아도 1000기 이상의 몬스터가 필요하니, 얼만큼 패악적인 강함을 지녔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하겠다.

오로지 전진과 파괴만을 습성으로 가진 이 플러쉬 골렘은 몬스터 필드를 짓이기며 시내로, 시내로 신속하게 그 거대한 발걸음을 움직였다.

“···앞으로 20분이면 도착한답니다.”

그리고 정부 당국과 기사들은 부랴부랴 방어선을 구축했다.

허나 골렘의 전진속도가 너무 빨랐다. 급히 동원령이 내려져 약 일백의 중상급 이상 기사들이 집결했으나, 그래도 전선을 갖추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

“오크의 도움을··· 다시 구할 순 없을까요?”

김유린이 자신의 아버지, 김현석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허나 김현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괴조와 레드문 때와는 달리 경로가 너무 어긋난다. 일단 그들의 도움은 없는 셈 쳐야해.”

이 골렘의 진격 경로는 서울이 아닌 부산 쪽. 놈은 중급지대를 지나지 않고 상급지대의 연안을 그대로 가로질러서 강하하는 중이다. 그래서 방어선이 구축된 이 곳도 동해 연안이 아닌가.

“···예.”

김유린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끼에에엑!

그때 창공에서 그리핀이 울었다. 또 몬스터인가, 깜짝 놀란 기사들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몬스터는 맞았지만 다행히 적은 아니었다. 그리핀의 가슴에는 새벽의 상징인 남색 인장이 매워졌고 그 위에는 기사가 올라타 있었다.

저것이 바로 ‘그리핀 라이더’, 전선에 모인 중상급 이상의 기사들 마저도 부러운 눈빛을 보낼 만큼 폼 나는 모습이었다.

“···둘 다 새벽이군.”

김현석의 씁쓸한 중얼거림을 들으며, 김유린은 뒷목을 긁적였다. 라이벌의 약진은 언제나 배가 아픈 법. 무사히 플러쉬 골렘을 막아내고 전투영상이 공개된다면 새벽은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홍보효과를 누리겠지.

“김현석 대장님!”

뒤이어 군 소속 기사들과 진녹색 탱크들이 모래사장으로 몰려들었다.

“전투는 어떻게 할까요.”

군 책임자가 급히 물었다.

쿵- 쿵-

그와 동시에 아득히 먼 곳에 플러쉬 골렘의 거대한 실루엣이 드러나고, 거대한 발걸음이 야기시키는 진동 또한 느껴지기 시작했다.

“일단 모래사장으로 놈을 끌어들인다. 탱크는 요격 한번 하고 뒤로 후퇴해. 어차피 거추장스럽기만 할테니까.”

김현석이 태양을 닮은 명검 ‘그람’을 뽑아들며 명령했다. 부하기사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물러났다.

“그 검으로는 첫 전투인 겁니까?”

김유린 또한 검을 뽑았다.

“그렇구나. 그런데··· 네 검의 이가 나갔구나?”

“···아. 예. 헌데 어차피 마나만 잘 스며들면 좋은 것이잖습니까.”

“부탁을 한번 해보아라.”

“예?”

김현석이 제 검으로 그녀의 검을 툭툭 건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명품이긴 하지만 30년도 더 된 검이다. 이제 바꿔야 할 때야. 김세진과 친하다면서.”

“아.. 그렇지만···.”

“내 검을 잘 봐라. 영롱하게 빛나지 않느냐?”

“······.”

지금 이 상황에서 자랑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김유린은 제 아버지를 흘겨보며 입술을 삐죽 내뺐다.

허나, 아쉽게도 더 이상 삐쳐있을 시간은 없었다.

쿵! 쿵! 진동이 더욱 심해지고, 실루엣만 보이던 놈의 잔상에는 시뻘건 안광이 더해진다.

위이이이잉- 먼저 탱크의 포탑에 마나가 회오리처럼 응집되기 시작했다. 목표는 플러쉬 골렘의 요격.

그리고 모든 기사들은 마나를 가동시켰다. 몸에는 마나의 강기를, 무기에는 마나의 검강을.

그렇게, 본격적인 전투가 개시되었다.

*

‘인근 해안에서 격전이 벌어질 것이다.’

김세진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레비아탄 폼의 제대로 된 위력을 측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레비아탄은 어차피 자기 영역에만 들어오지 않으면 생각보다 얌전한 몬스터이기 때문인지, 여태 자아가 잠식당하는 위협도 별로 없지 않았는가. 실제로 아탄이 폼이 적정량 성장을 했음에도 당장 의식을 스치는 위험은 전혀 없기도 하고.

그렇게 늑대 폼으로 몬스터 필드를 횡단하여 동해에 도착한 세진은 레비아탄으로변해 바다에 풍덩 빠졌다. 그리곤 거친 파도를 일으켜, 그것을 타고 격전지로 빠르게 이동한다.

‘···몸이 되게 커졌네. 비늘 색도 변하고.’

일어서면 적어도 남자 중학생과도 비등비등할 크기에, 처음에는 그저 순백색이었던 비늘도 연푸른빛으로 변했다. 물에 비치는 모습을 보니 왠지 아가리도 좀 레비아탄처럼 튀어나온 것 같고 이빨도 꽤나 날카롭다.

‘역시 물에 있으면 더 빨리 성장하는거였네.’

그는 몽실몽실한 바닷물을 매만지며 서핑을 즐겼다.

*

도착하니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어디서 저런 극악의 피조물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플러쉬 골렘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경이적인 키메라였다.

김세진은 멀리서 전장을 관찰했다. 백여명에 달하는 기사들의 무기에 달라붙은 마나 ‘검강’을 보건데, 모두 저마다 한 가닥 이상은 하는 기사들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플러쉬 골렘은 만만치 않았다.

놈의 몸에서 쏟아지는 몬스터들은 하나하나가 중급 기사 이상의 위력을 가진 플러쉬 골렘의 클론들이었고, 본체는 그 커다란 덩치가 무색하게 정교한 마법으로 멀리서 전투보조하는 마법사들을 요격했다.

그는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했다. 브레스를 쓰자니 골렘에 달라붙은 기사들이 마음에 걸리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궁리하던 그는 이내 방법 하나를 생각해냈다.

전설 속 레비아탄이 어떻게 공격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다. 단지 드래곤처럼 브레스를 내뿜는다, 하나 뿐. 그러나 물과 마나의 성질을 변화시킬 수 있는 무궁무진함을 단지 브레스만으로 소모하기에는 너무 아깝고 아쉽다.

‘···될까?’

세진은 일단 플러쉬 골렘에게로 한줄기 물을 쏘아냈다.

레비아탄의 고유 특성을 통해 저 골렘의 구성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한줄기 물은 놈의 살점 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다시금 빠져나와 그의 비늘로 달라붙었다.

단지 그것으로 체화는 끝. 마땅한 재료가 없어 플러쉬 골렘은 만들지 못하더라도,골렘을 만드는 방법은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해수(海水) 속으로 의념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마치 거대한 산이 솟아오르듯 바다가 통째로들썩이더니?

플러쉬 골렘보다 족히 두 배는 거대한 푸른 골렘이 그 장엄한 자태를 드러냈다.

“···.”

“···.”

순간 전장에 적막이 가라앉았다.

기사는 물론 플러쉬 골렘 조차도 행동을 멈췄다.

‘압도적’이라는 말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경우가 있을까.

거대하고 웅장한 몸체는 전설 속의 ‘거신’을 연상시키는 듯 하고, 이쪽을 굽어보는 새파란 두 인광(燐光)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위압이 뿜어져나와 사방을 짓누른다.

“저건··· 시발.”

하나도 아니고, 둘.

또 보스 몬스터의 출현인가. 몇몇 기사들이 좌절의 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으려 할 때, 우우우우우웅?

해수의 거신이 그 웅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기사들이 재빨리 뒤로 물러서자마자, 흉험한 충격파가 터져나와 세상을 뒤삼켰다. 수분과 모래먼지가 얽힌 회오리가 휘몰아치며 시야를 가리고, 머나먼 산세 초목의 가지들이 꺾여나간다.

“모두 부상자를 먼저 챙······.”

그러나 드리운 흙먼지가 가라앉고 시야가 확 틔었을 때. 기사들은 다시 한번 당황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뇌가 아예 정지한 듯, 그들은 단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웅장한 거신의 주먹은, 기사들이 아닌 플러쉬 골렘의 정수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뭐야?”

기사 한 명이 멍하니 읊조렸다. 그리고 다른 기사들도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 32. 창해(滄海)의 왕, 레비아탄 > 끝

ⓒ 지갑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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