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얽히고설킨 (5) >
“···저 뱀파이어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김유린의 애마, 영국제 고급 SUV의 내부. 그녀가 뒷자리에 고이 누워있는 라하임드를 눈짓하며 물었다.
“글쎄요. 특수경찰국에 넘긴다거나··· 해야겠는데.”
꽤나 강한 놈이라 탁기의 고리도 잘 먹혀들지 않을테니, 마음 같아서는 저대로 영영 못 깨어나게 하고 싶기도 하다. 허나 재판 없는 뱀파이어 주살은 엄연히 불법이기도 하고, 뭔가 좀 모질이 같지만 그쪽에서 한자리 하는 것 같아 이대로 포기하기도 아쉽다.
“흠.”
김유린의 콧소리 한 번. 그 이후로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그는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해보긴 했으나, 그녀의 표정이 너무 딱딱했다. 마치 무언가 심각한 생각에 잠겨있는 것처럼.
켕기는 바가 있었던 그는 그저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를 몸소 실천하기로 했다.
“잠깐! 뭐하세요!”
“···예?”
“길 잘못 탔잖아요!”
허나 운전에 집중하지 않았던 김유린은 꺾어야 하는 곳을 그대로 직선으로 주행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녀는 황급히 핸들을 틀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아쉽게도 이곳은 유턴을 할 수 있는 도로가 아니다.
“그, 그걸 왜 지금 말해주는 겁니까!”
결국 포기하고서, 그녀는 원망스런 눈빛으로 옆자리를 흘겨보았다.
“아니 왜 저한테 화를 내요.”
“저는 이 길이 처음이란 말입니다. 면허 딴지 얼마 안돼서 운전도 잘 못하는데 세진 씨 데려다 드리려고···.”
길을 잘못 들고서야 유린은 운전에 집중했다.
그렇게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20분, 30분 40분··· 10분이면 충분했던 거리는한 시간동안 돌고 돌아 어느새······
“여기 평양 아닙니까?”
강원도에서 평양까지 고작 한 시간! 역시 마나카(Mana car), 희대의 발명품답다.
“······.”
“지도도 안 보고 강원도에서 평양까지··· 참 대단하십니다.”
김유린은 그의 비아냥에 입을 댓발 내뺀 채 묵묵히 운전을 계속했다.
“여기서 강원도까지는 또 얼마나 걸리려나.”
“···조용히 안하시면 내려놓고 갈 겁니다.”
제딴에는 위협적인 경고였겠지만, 세진에게는 오히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차라리 제가 운전할까요? 아니 그것보다 네비는 왜 안 키시는 거예요?”
김세진이 네비게이션을 키려 손을 뻗었다. 허나 그녀는 그의 손을 쳐내며 미간을 좁혔다.
“자존심입니다. 건들지 마시죠.”
“···.”
자존심은 개뿔. 김세진은 어이없어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핸들은 움켜쥔 딱딱하게 굳은 손, 자라목처럼 앞으로 삐죽 튀어나와 부자연스레 전방을 주시하는 얼굴··· 도저히 자존심이 있을 자세가 아닌데.
‘두 시간 안에는 가겠지.’
“크, 크으으으···.”
그때 별안간 뒷좌석에 누운 취객이 깨어나려는 기색이 보였다. 세진은 재빨리 메이스를 만들어내어, 놈의 미간에 내다 꽂았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라하임드의 모가지가 다시금 시트 위로 힘없이 가라앉는다.
“···근데 메이스는 언제부터 다루기 시작하신 겁니까?”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김유린은···
“아니! 또 길 잘못 들었잖아요!”
“앗! 아, 안 돼!”
강원도에서 평양까지 한 시간, 그리고 평양에서 다시 강원도까지 두 시간.
김세진은 그녀의 차에 탄 걸 뼈저리게 후회하며 집에 도착했다.
*
다음 날.
김세진은 유백송을 찾아와 라하임드의 처우를 논의했다. 세진은 특수경찰국에 의심스런 인물이 많기에 마나가 말소된 용병단의 지하감옥에 감금해두겠다고 했고, 그녀도 그러라고 했다.
그렇게 논의가 예상보다 간단히 끝나자, 유백송은 기사 잡지 하나를 건넸다.
[기사 아카데미 최고 인기-‘최단기 중급기사’ 진세한의 권법]
-슬로우 모션, 보법과 권법, 전투 센스 등등··· 여러가지가 담겨있는 완벽한 강의. 진세한의 '진'무도('眞'武道) 유파 강의 수강자가 300명을 넘어섰다. 강의 만족도도 최상위에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승폭.
요즈음 아카데미에서 아무런 무기도 없는 생도들이 심심찮게 보이며, 그 누구도 그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혜성같이 출몰한 영웅의 발자취를 쫓는 인터뷰를 준비했다.
진세한의 이야기, 김세진은 그것을 읽으며 미간을 좁혔다.
“꽤나 유명해졌더군.”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요즈음, 장관으로 취임한 그녀는 ‘김세진 라인’의 힘을 여실히 느끼고 있는 중이다. 매번 갈구던 상관도 없어졌으며, 쏟아지던 견제도 감히 직접적으로는 못하고 뒷담화 수준으로 격감. 아주 오랜만의 경험하는 스트레스 없는 하루하루는 참 즐거웠다.
“···근데 이렇게 유명해지면 조금 문제가 생길 것 같은데.”
진세한은 일회용 인물.
언론에는 상급까지 등극하겠다 각오를 다졌지만, 사실은 정보 열람 권한이 있는 중상급이 끝이다. 중상급이 된 진세한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고 목표인 상급기사는 아름다운 미완의 꿈으로 남을 예정.
“뭐 어떤가. 영웅은 죽음으로도 세상에 희망을 선물하는 존재인데. 헌데 그런 것 치고는 동료기사와도 두루두루 잘 지내던데?”
유백송이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 맨날 집전화 아니면 마법노트로만 연락을 나눴던 그녀의 손아귀에 잡힐 줄은 상상도 못했던 물건이었기에, 김세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핸드폰도 샀습니까?”
“응.”
그녀는 인터넷으로 사진 하나를 보여줬다. 진세한과 이유진, 고윤종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그에 김세진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으나, 그녀는 그 손을 탁- 쳐내고 마치 신주단지 모시듯 제 품으로 핸드폰을 감싸 안았다.
“···.”
“실례다.”
"아, 예.."
그 이후로, 그녀는 연신 제 작은 손을 핸드폰 위에 대고 꼬물거리기만을 반복했다. 가끔씩 뭐 재밌는거 찾아내면 방실방실 웃으며 이거 봐라- 하면서 보여주고.
평생 핸드폰이 없이 삭막함 속에 살았던 그녀에게는 아마··· 새로운 세상이나 다름이 없었지.
김세진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부드럽게 살랑이는 꼬리와 움찔움찔 삐죽대는 귀 때문일까.
“···당장 한달 뒤가 라이칸 기자회견인건 아시죠?”
“응? 그럼. 알지.”
“그게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세계멸망이랑 관련있는 것도 아시고?”
“···.”
이번에는 아예 대답이 없었다. 흥미로운 동영상을 찾았는지, 귀를 바짝 세운 채 눈을 동그랗게 떴을 뿐.
저걸 뺏어야 대화가 이어지겠는데. 세진은 손을 살짝 뻗었지만,
“그르릉···”
별안간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리며 노려보길래 슬그머니 손을 빼야만 했다.
세진은 핸드폰 삼매경에 빠진 그녀를 20분동안 지켜보다가, ‘미팅자리가 있어서 가보겠습니다-‘ 한 마디를 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때까지도 동영상은 끝나지 않은 듯했다.
나가면서 도대체 뭘 보고있나 궁금해서 힐끗 바라보니, 야생 호랑이들의 생활이 나오는 ‘동물의 왕국’이었다. 피식 웃은 김세진은 배웅도 받지 못한 채 그녀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주차장으로 나온 그는 차에 올라 목적지를 강원도의 한 레스토랑으로 설정했다.
때마침 전화가 걸려왔다.
-세진 씨. 어디세요?
사근사근한 엘프의 목소리, 하젤린이었다.
“저 지금 가고있어요. 하젤린 씨는요?”
-저도 지금 갈려고 준비중이에요··· 버스타고.”
“버스요?”
-네.
김세진은 시간과 장소를 힐끗 살폈다. 다행히 여유로웠다.
“그럼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세요. 제가 픽업하러 갈게요.”
-네? 아.. 안 그러셔도 되는데···
“아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하젤린이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김세진은 미소를 지으며 시동을 걸고 엑셀을 밟았다.
*
“여기에요~”
5분 정도 달렸을까. 차창 너머로 로브를 푹 뒤집어 쓴 여인이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브레이크를 밟으려던 김세진은, 그러나 갑자기 마음 깊은 속에 내재된 장난기가 발동하는 것을 느낀다······.
“···어, 어디가세요! 세진 씨! 여기라니까요! 야!! 어디가!!”
그는 일부러 멈추지 않고 조금 더 달렸다. 백미러를 보니 하젤린이 다다다닷-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그렇게 200m 정도를 갔을까, 이제 됐다 싶은 세진이 차를 멈추고 차문을 열었다.
“하.. 하아··· 하아···”
때아닌 전력질주에 숨을 몰아쉬는 하젤린이 차문고리를 움켜쥐고 그를 노려보았다-로브에 가려 눈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 노려보고 있다-. 허나 김세진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차문을 열 뿐이었다.
“아. 죄송해요. 모르고.”
“하아 하아··· 모르긴 뭘 몰라요 진짜. 처음에는 안 그러시더니, 요즘 장난이 참 잦네요? 마법의 쓴 맛을 한번 보시려고 작정을 하신 것 같은데···”
“타세요. 아니면 또 출발합니다.”
“···.”
그녀는 조수석에 오르자마자 후드를 벗었다. 때아닌 운동에 흐르는 땀이 불쾌한 듯 퉁명스런 얼굴이었으나, 얼굴에 달라붙은 촉촉한 머리카락은 더할 나위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갑니다."
“···예.”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길에 하젤린은 아무 말 없이 무언가를 열심히 외웠다. 글씨가 빼곡한 것이, 대본아니면 분석자료인 듯했다.
아무 말 없이 20분을 달리니 서울의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헌데 그 주변 풍경이 다소 장관이었다.
프랑스 국기가 매달린 의전차량과 경호차량이 주차장을 가득 메우고, 허리춤에 검을 맨 경호원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한다.
“뭐야··· 총리라도 직접 왔답니까?”
“네.”
“···예?”
”롤랭 총리께서 직접 오셨어요. 그래서 조금 늦춰진 거잖아요. 그 분 스케쥴 맞추느라”
"그런 얘기 없으셨는데···?"
"그런가? 미안해요. 아마 세진 씨가 연락을 씹어서 그랬을거예요."
하젤린은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하며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김세진은 잠시동안 멍하니 있다가, 뒤에서 경비원이 다가오고 나서야 발걸음을 옮겼다.
*
미국과는 달리, 프랑스 쪽에서 직접 찾아온 미팅은 수월하게 끝났다.
총리에게 '만나서 영광입니다-' 는 말을 한국어로 직접 들은 김세진은 정작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하젤린은 청산유수처럼 말을 늘어놓았다. 세미나에서 말을 버벅대던 여인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두 시간 정도 지속된 미팅으로 인해 미국 다음의 포션 수출국을 ‘프랑스’로 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고, 김세진은 차 트렁크까지 뛰어가 자신이 만든 오크제무기 하나를 총리에게 선물했다.
총리는 그 선물에 몹시 만족하며 수 많은 경호원과 함께 돌아갔다.
“잘 됐네요.”
저 멀리 점으로 사라지는 검은 리무진들의 행렬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만족했다.
그렇게 서로 싱글벙글 웃으면서 지상의 주차장으로 향하는 와중,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차갑고 서늘한, 그러나 익숙한 음성.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세정아?”
유세정. 그녀는 방금 막 기사단에서 퇴근을 했는지, 기사단복을 입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다소 차가웠다.
“···둘이 많이 친해졌나봐?”
“아. 이거 일때문에···”
“아니 그건 나도 알지. 여기 우리 레스토랑이니까. 그냥 너무 화기애애해서 한번 물어본거야.”
그녀가 저벅저벅 걸어와 차의 조수석 문을 열고 먼저 올라탔다.
"오빠. 안 타고 뭐해?"
서늘한 목소리, 김세진은 몸을 흠칫 떨고서 하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안절부절하며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썼다.
"하젤린 씨, 같이···."
“아뇨. 저, 저는 혼자 갈게요. 괜찮아요. 그렇게 멀지도 않으니까···.”
"예? 아니 그래도···."
"정말 괜찮아요! 지나 괜찮으니까 어서, 어서 가세요. 세정아 너도 잘가."
"······네 언니. 잘 가세요."
하젤린의 만류에 김세진은 어쩔 수 없이 차에 올라 타 시동을 걸었다.
앞유리 너머로, 홀로 쓸쓸하게 걸어가는 하젤린의 뒷모습이 보였다.
< 31. 얽히고설킨 (5)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