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얽히고설킨 (4) >
“뭔···.”
“내비둬봐요. 혼자 쓰러지면 더 좋지.”
김유린과 김세진은 흥미 깊은 눈으로 라하임드를 바라보았다. 온몸이 복어처럼 부풀어오른 채 연신 끙끙거리는 것이, 당장이라도 펑! 하고 터질 것만 같다.
“···근데 길드장님.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짐작가는 바가 있으십니까?”
그러다 김유린이 세진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그녀에게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별안간 맑은 하늘에 해일이 쏟아지고는 김세진이 나타나더니, 또 갑자기 저런 정신이상자의 습격이라니···
“아. 그··· 제가 말했죠? 요즘···”
“그어어어어!!”
그때 놈의 괴함과 함께 피보라가 격랑처럼 덮쳐왔다.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던 피보라였지만, 역시 세진의 근방에 다다르자 힘없이 가라앉을 뿐이었다.
“···요즘 의문의 사건사고가 많았다고. 그 원흉이에요.”
“원흉?”
“예. 라이칸은 저에게 뱀파이어가 뭔가 거대한 걸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그 첫 단계에요. 혹시라도 방해될 만한 싹을 미리 지워 두는 것. 일명 ‘살생부’라고 하죠.”
“···그런 중요한 얘기를 왜 이제와서야 말하시는 겁니까!”
잠시 멍하니 있던 김유린이 갑작스레 소리쳤다. 그만큼 라이칸의 이름이 주는 무게감은 묵직했다.
“말하려고 기자회견 날짜도 잡았어요. 그리고 제가 미리 언질도 했잖습니까. 혼자 다니시면 위험하다고.”
“···그랬···긴 했는데··· 그래도 구체적으로 말해주셨으면···”
“이미 소문도 다 퍼졌던데.”
일단 정부의 요청대로 비밀엄금을 하고는 있지만, 이미 증권가와 기사단의 찌라시에는 라이칸이 뭔가 중대한내용을 발표한다는 것은 물론 살생부와 관련된 소문도이미 다 돌고있다.
“그, 그런가요? 저는 요즘 정신이 없어서···”
“으어어어!!”
그 와중에 또 정상이 아닌 고함이 울려퍼졌다.
“···어쨌든 저 사람도 뱀파이어다, 이 말입니까?”
“네. 딱 봐도 악질 중에 악질이잖아요.”
김유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서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이가 살짝 나간 검날에 극도로 예리한 서릿빛의 마나가 달라붙었다.
“백작님··· 이제 좀 진정을 하십시오.”
그 날 선 위험에 직면하고서야 다른 뱀파이어들이 라하임드를 말리기 시작했다.
“···후.”
이미 절반 이상의 힘이 빠져버린 것 같은 라하임드는 그제서야 광분을 멈췄다. 그리고 애써 평정을 되찾은 척 엷은 미소를 짓는다.
“하하. 아쉽구료. 당신들의 고통을 짧게 할 수 있을 더 없는 기회였을 터인데 그걸 제 발로 걷어차 버리다니···”
세진에게는 아쉽게도, 이번에는 라하임드가 허리춤에 메인 검을 뽑아 들었다. 마치 피를 머금은 듯 검신이 온통 시뻘건 검, 그와 동시에 다른 뱀파이어들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유린 씨. 저와 거리를 유지하면서 싸우세요.”
라하임드의 멍청함이 사라진 만큼 김세진도 여유를 잃고 긴장했다.
“그리고 저 검에 닿으면 안됩니다.”
놈이 든 선명한 적색의 검. 저 검에는 실제로 피가 스며들어 있다. 아무리 상성에서 압도적이라 한들 대기중의 수분이 아니면 조종할 수 없으니, 살짝이라도 베이는 순간에는 대재앙이 펼쳐지겠지.
“예. 10년을 싸워왔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김유린의 자신감은 역시나 든든했다.
김세진은 피식 웃으며 한 손에 마나를 응집시켰다. 푸른 마나의 입자가 놈을 상대하기에 알맞은 무기, 거리유지가 가능한 기다란 ‘창’의 형태를 이룬다.
“···어.”
그러나 상대는 놈 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뱀파이어들의 주술이 이뤄졌고, 주변에 수 많은 괴물들이 생겨났다.
-크어어어!
지상을 울리는 부르짖음은 머리가 세 개 달린, 연옥(煉獄)의 파수견. 그늘을 가득 드리운 창공은 수백의 가고일. 지하에서 꿈틀거리는 자이언트 웜, 그리고 어느새솟아오른 수백의 골렘과 구울을 비롯한 피조물들까지.
“···”
이런 난전에서 장창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 김세진은 슬그머니 무기를 바꿨다. 그리고 김유린은 그런 그의 손을 힐끗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손에는 새파란 메이스가 움켜쥐어 있었다.
“다룰 줄 아십니까?”
메이스는 기사들이 다루기 가장 어렵고 기피하는 무기다. 일단 마나 보다도 기본적인 근력에 크게 좌지우지 하는 무기일 뿐더러, 메이스의 형체에 따라 마나를 뭉툭하게 응집시키는 것이 꽤나 어렵기 때문.
“···그건 나중에!”
그러나 김유린은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쿵쿵쿵쿵-!
라하임드의 포효와 함께, 그들의 주변을 포위한 몬스터들이 일제히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김세진은 해일처럼 치미는 몬스터들을 향해 메이스를 휘둘렀다.
대기를 패악적으로 찢어발기는 파괴적인 일격에 골렘들이 돌부스러기로 산화하고, 구울은 팔다리가 찢겨진 채 비산한다. 기교따윈 없는 일직선, 그러나 그 무엇보다 파괴적인 메이스는 단 한 번의 왕복만으로 수십의 몬스터들을 찢어발겼다.
‘저건···.’
그리고 곁눈질로 그를 살피던 김유린은 상황의 심각성도 잊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적도 아군도 없이 그저 맹목적으로 휘두르는 것 같아 보이지만, 저 둔탁한 소용돌이 속에는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다.
가까이 다가오는 적은 오로지 압도적인 힘으로써 분쇄한다. 허나 공격을 허용할 것 같다 싶으면 순간적으로 적이 아닌 노면을 내려침으로써 거대한 진동을 야기시킨다. 그리고 그 진동으로 만들어낸 빈틈을, 치명적인 일격으로 파고들어 상대방의 머리를 박살······.
콰아아앙!
바닥을 찍은 메이스에 의해 노면이 크게 뒤흔들린다.
이렇게 지금처럼 몇 번의 메이스가 휘둘러지면 전장은 극악무도하게 갈려 황폐해지게 된다. 그리고 산산조각난 대지 위에 남은 것은 피와 살점을 뒤집어 쓴 아수라 뿐.
‘어떻게 저 남자가 오크의···.’
저 스타일은 -물론 그 강도와 세기가 현저히 낮지만- 김유린도 익히 경험해봤던 종류였다. 오크 족장과 수없이 많은 대련을 해왔으니 확실하다.
그러나 어떻게 저 남자가 오크의 그것을 저렇게 자연스럽게 흡수하고 익힐 수 있었는지에 대한 오랜 고민은 불가능했다.
-크어어어어!
전신에 달라붙은 연옥으로 사방을 불사지르며 쇄도한 파수견 ‘케르베로스’가 그 흉악한 이빨을 그녀에게로 치밀었다.
“흡!”
허나 이런 소환수들은 그녀에게만큼은 더없이 간단하다.
‘생명체의 생명을 앗아간다’는 목적성은 그 생명이 제 아무리 사소하고 같잖다 하더라도 불가능하지만, 소환수는 다르다. 촉매가 없이는 소환이 되지 않고, 촉매를 없애지 않고서는 역소환도 불가능한 레비아탄같은 몬스터만 아니라면 ‘역소환’은 기절보다도 쉬운 종류이니.
-크어어어······
검 날에 살짝 스쳤을 뿐인 케르베로스는 포효를 채 내지르지도 못하고 힘없이 사라졌다.
과연, 그래도 지옥의 마수라는 것일까. 마나의 20%가량이 소진되었음을 느낀 그녀는 지축을 박차, 계속해서 환수를 소환하려는 술사들에게 쇄도했다.
“···이 놈!”
탄환처럼 쇄도한 김유린, 그러나 라하임드는 그녀를 무시하고 김세진에게 돌격했다. 오직 앞만을 보는 경주마처럼, 주변을 가로막는 아군 몬스터 또한 모조리 베어넘기며.
“건방진 놈!”
세진의 목전에 당도한 라하임드가 크게 검을 휘둘렀다.
시뻘건 검은 반원형의 궤적을 그리며 김세진의 메이스를 두 동강으로 베어내는 데 성공했다. 라하임드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패이고, 그가 자랑하는 ‘혈검’이 세진의 가슴으로 향하려는 찰나.
“!”
라하임드는 배후에서 솟구치는 죽음의 위협을 느끼곤 급히 몸을 굴러야만 했다.
그 즉시. 방금 라하임드가 서있던 자리의 지면에 위로 푸르른 창 한자루가 솟구쳐올랐다. 뭐지- 고민할 틈도 없었다. 다시금 직전과 비슷한 위험이 의식을 스치더니,
“큿!”
똑같이 창 한 자루가 지면을 뚫고 라하임드의 살갗을 베었다.
“뭔 개수작이···”
소리치는 와중에도 창의 쇄도는 계속되었다.
슝 슝 슝 슝- 서늘한 파공음을 내며, 처음에는 지면 아래에서만 솟았던 그것은 이내 허공에서도 쏘아져 나왔다. 그는 다급히 발을 굴렀으나 빈틈따윈 없이 모든 공간에서 쇄도하는 기이한 창은 라하임드의 도주경로를 계속해서 쫓았다.
“···!”
쫓기던 라하임드는 도움을 구하기 위해 술사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나 저쪽 상황도 이쪽과 별반 다를바가 없었다. 오히려 더 안좋았다. 김유린의 일섬에 배리어와함께 몸이 통째로 찢겨지고,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위에서 쏟아지는 가고일은 여자의 마나 강기조차 뚫어내지 못한다.
“저런 쓸모없는···억!”
그때 시선이 팔린 라하임드를 향해 메이스 하나가 투척되었다. 미간을 적중당한 라하임드는 외마디 단발마를 내지르며 지면 위로 쓰러졌다.
"..읏!"
라하임드가 기절하자 김세진은 남은 수 많은 몬스터들에게 힘을 집중했다.
허나, 점점 정신이 몽롱하게 풀려갔다. 역시 체외의 마나를 이용하는 것은 아직 부담이 너무 크다. 1분도 안되는 정말 찰나였을 뿐인데, 이대로라면 당장 무기를 만들어낼 마나도 남아있지 않다······
“정신차려!”
정신이 아득해지고, 가슴 속에서 뜨거운 본능이 터져나와 인간 김세진을 대신하려 할 즈음.
누군가의 외침이 귓가에 내다 꽂혔다. 애써 정신을 부여잡은 세진은 눈을 부릅뜨고서 게걸스레 아가리를 뒤흔드는 구울의 대가리를 한 손으로 움켜쥐어 터트렸다.
쏴아아아-!
뒤이어 청명한 검격이 전장을 쇄도하여, 그의 주변을 둘러싼 몬스터들을 모조리 찢어발겼다.
*
몬스터 필드의 한복판. 온 사방에 피와 살점이 늘어지고, 대지는 성한구석 없이 흉악하게 패여있다.
“···후아.. 하아···”
그 수라장 속, 김세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 쉬었다.
오크나 늑대형이었다면 코웃음을 쳤을 전투였지만, 인간으로서는 극한까지 내몰린 혈투였다. 그리고 그것이 야기시킨 격한 움직임과 끝까지 쥐어짜낸 마나는 그가 평생 겪어보지 못했던 피로를 선사했다.
김유린의 상황은 그나마 나았다. 그녀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온전히 서있을 힘은 있었는데, 그 힘을 온전히 ‘생각’에 쏟아붇고 있었다.
김세진이 메이스를 휘두르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전사는 전사마다 고유한 전투 스타일이 있는데, 그의 전투는 영웅오크와 굉장히 흡사했다. 광분하여 포효를 지르는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김유린이 눈길을 그에게로 돌렸다. 바닥에 주저앉아 힘겹게 씨근덕거리는 모습은분명 오크보다는 나약하지만······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그를 의심스런 눈길로 바라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김세진 씨.”
왠지 모를 차가운 목소리가 세진의 귓가를 서늘케했다.
“···예?”
그가 고개를 돌렸다. 김유린이 다소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세진을 가만히 응시하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여러 의심쩍은 요소들이 붕붕 떠다녔다.
오크와 흡사한 그의 전투 스타일··· 그리고 그는 저가 영웅오크와 친하다 말하며,족장과 만날 수 있게 해주겠다 하기도 했다. 또한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그가 대장장이로 활동해왔을 때의 이름인 ‘오크 대장장이’도 의심스럽다.
“혹시 말입니다.”
낮게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 그 심상치 않음에 김세진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몸을 흠칫 떨었다.
“···혹시, 혹시······”
그녀가 말을 잠시 멈췄다. 오크와 이 남자는 무슨 관계일까.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터. 분명히 무엇인가가 있다. 있을 터인데···.
“······저 놈은 어떻게 할까요.”
허나 그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진 라하임드를 가리켰다.
“···아··· 일단··· 잡아둡시다.”
역시 찔렸던 김세진은 최대한의 평정심을 유지한 채 라하임드를 짊어맸다.
< 31. 얽히고설킨 (4)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