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얽히고설킨 (3) >
단풍이 물드는 시월 초순.
일반인 출입이 엄금된 동해의 해변가에는 꽤나 많은 기사들이 바다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이 곳으로 나왔는데, 특이하게도 성비가 7:3정도로 남기사 보다 여기사가 더 많았다. 또한 대부분의 남기사들은 바다보다는 여기사에게 관심이 있는 듯했다.
“···바다 헤츨링이요?”
남기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여기사에게 물었다.
“네. 매주 주말마다 출몰한대요.”
여기사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몬스터 필드의 중급지대임에도 불구하고, 등급과 짬이 깨나 있는 그들은 이곳을 마치 데이트 장소로 생각하는 듯 여유로웠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듯 이곳에 모인 이유는, 요즈음 중급 이상의 기사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지는 하나의 소문 때문이었다.
‘바다 헤츨링’.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귀엽고 아기자기한 몬스터. 처음 구경왔던 몇몇 기사들은 그 헤츨링이 미소를 지으며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고 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봐요. 엄청 귀엽다는데.”
“예. 뭐.. 저는 상관없······.”
“어! 저기 온다!”
그때 누군가가 해수면 위를 가리키며 크게 소리쳤다. 깜짝 놀란 기사들은 저마다 시력을 강화하여 그쪽을 주시했다.
있었다, 부표처럼 바다 위를 둥실둥실- 떠다니는 한 마리의 생명체가.
몸은 조금 넙대대하지만 바다표범과 강아지를 합쳐 놓은 듯한 귀여운 외모가 인상적인, 일명 바다 헤츨링이라 불리는 존재.
“와~”
여기사들이 호들갑을 떨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거리가 멀어서 잘 찍히지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무려 광각렌즈가 장착된 카메라를 들고 온 여인을 발견하곤 입을 떡 벌렸다.
“근데··· 귀엽긴 한데, 만약 저게 진짜 헤츨링이면··· 처리해야하지 않습니까? 뭐가 될지 모르는데.”
당장 코뿔소를 닮은 트레이노스만 해도 아기때는 귀엽고 천진했다가 커갈수록 난폭하고 염병하는 몬스터로 돌변하는 마당에. 게다가 저 몬스터는 브레스까지 발사한다 하지 않았던가.
“예? 왜 죽여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허나 순간 사람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집중되었다. 방금 말을 꺼낸 기사는 그저 농담입니다- 라고 중얼거리며 뒷목을 긁적였다.
*
김세진은 주에 두 번씩은 동해로 나왔다.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시간이 흐르면 성장하는 레비아탄이어서 성장을 억제할 방법이 없으니 차라리 레비아탄 폼으로 바다를 즐기자는 마음이었다. 바다는 강자에겐 그 어느 곳보다 평화롭고 아늑하여, 가만히 명상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해 주었으니.
‘또 있네.’
헌데 요 근래 그 평화를 방해하는 방해꾼들이 슬금슬금 생기기 시작했다.
성장하는 과도기이라 그런지 아탄이는 수영이 꽤 느려 최대한 해변과 가까운 지역에서 유영(游泳)을 하였는데, 소문이 퍼졌는지 요즈음엔 저렇게 구경꾼들이 몰려온다.
처음에는 소수였고 귀엽다는 의견이 대세였기에 괜찮았다. 오히려 손을 흔드는 등 서비스까지 해줬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볼때마다 꺅꺅 소리까지 질러대니 좋을래야 좋을 수가 있나···
그들이 거슬렸음에도 꾹꾹 참고 있던 김세진이었지만, -근데 저거 처리해야 하지 않습니까?
예민한 청각으로 잡아낸 목소리에 순간 화가 치밀었다.
‘말이 심하네···’
그래서 그는 그저 겁을 줄 의도로 바다에 의념을 집어넣었다. 우우우웅- 해수의 깊은 아래에서부터 예사롭지 않은 진동이 일었다.
그리고 얼마 뒤. 기사들의 환호소리가 멎었다.
그들은 별안간 멍해져서는 김세진의 뒤쪽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별안간 환호 대신 비명이 터져나오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가기 시작한다.
세진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제 뒤를 돌아보았다.
“···.”
쿠구구구-
족히 30m는 넘어보이는 거대한 격랑이 생체처럼 꿈틀거리며 육지를 향해 치닫고있었다.
“···쀼.”
아.
바다 위의 레비아탄은 이정도로 강하구나.
그는 멍하니 생각하며 파도에 뒤삼켜졌다.
*
“······.”
약 20분 뒤. 슬그머니 인간으로 변한 김세진은 제 발을 저리며 몬스터 필드 내부를 거닐었다.
다행히 도중에 정신을 차리고 파도의 세기를 낮췄으니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겠지만··· 이미 풀과 나무, 모래를 비롯한 온 세상이 바닷물에 적셔져 있었다.
‘이게 웬 트롤짓이냐.’
걸을 때마다 찰박- 물이 튀었다. 거기에 더해 스마트 워치에서 다급한 소리가 쾅쾅 울리더니 문자가 전해왔다.
[국민안전처]
[긴급사태. 10월 8일 16시 13분. 동해에 20m높이의 쓰나미 발생, 동해 근처에 거주하는 강원도민들과 몬스터 필드 내의 기사들은 신속히 대피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는 문자를 보며 뒷목을 긁적였다. 순간의 힘조절 미스가 뭔가 거대한 해프닝으로···
‘도망가자.’
김세진은 발걸음을 바삐 옮겼다.
그렇게 빠르게 달리던 김세진은 그러나, 저 멀리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곤 멈춰섰다.
장발을 땋아 올린 깔끔한 머리스타일과 희고 가느다란 목. 잘록한 허리와 대비되는 볼륨있는 골반. 뒤태만으로도 지극히 아름답다 할 만한 여인, 김유린이었다.
요즘 매일같이 몬스터 필드로 출근한다더니, 그녀는 홀딱 젖은 채 어딘가 먼 곳을바라보고 있었다. 김세진은 왠지 쓸쓸해보이는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유린 씨.”
나지막이 부르자 그녀가 화들짝 놀란다.
“어.. 길드장 님? 여긴 어쩐 일로···.”
김세진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사냥하러 왔는데 갑자기 해일이 몰아치길래. 유린 씨야말로 여기서 뭐하세요? 보아하니까 파도에 당하신 것 같은데, 대피문자 못 받으셨나?”
“아뇨. 받긴 했는데···.”
그녀는 씁쓸하게 뒷말을 삼켰다. 저 멀리, 방금까지 그녀의 시선이 향했던 곳에는오크의 부락지가 있었다. 갑작스런 파도의 영항으로 토벽이 젖긴 했지만 다행히 별다른 피해는 없어 보였다.
“대피하라는데, 어서 같이 갑시다.”
그녀는 오크의 부락지와 김세진을 번갈아 보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진은 그녀와 함께 몬스터 필드 내부를 거닐었다.
쓰나미(?)의 여파로 기사는 물론 몬스터까지도 모두 다 도망갔는지, 몬스터 필드에는 적막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해수에 젖은 숲길을 거닐며 대화를 나누었다. 세진이 말하는 쪽이었고 유린이 듣는 쪽이었다.
“요즘 기운이 너무 없으신거 아니에요?”
“네? 아··· 그냥 벽이 느껴져서 그렇습니다. 이 이상 성장할 수 있을까, 그런 두려움이 요즘 자주 듭니다.”
“그래요? 고위기사도 그런 고민을 하는······.”
헌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묘한 마나의 기류가 흘러왔다. 김유린 또한 그 심상치 않은 마나를 느꼈는지, 그녀는 재빨리 검을 뽑아 들었다.
“···뭔가 있습니다. 길드장 님, 제 뒤로 바싹 붙으세요.”
유린이 얼굴을 굳히자 분위기가 급변했다. 마나가 좀 더 노골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녀는 세진의 팔을 끌어 제 뒤에 숨기다시피 한 뒤 사주를 경계했다.
“저도 싸울 줄 압니다.”
그러나 김세진은 한 손에 마나의 무기를 든 채 앞으로 나섰다.
방금, 피의 잔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기척과 냄새를 이리도 숨길 수 있었던 걸 보면 한 가닥 이상은 하는 놈이겠지.
‘살생부 목록이 괜히 비현실적이었던 게 아니었군.’
그때. 스스스스- 연기가 피어오르며 넷의 신형이 바닥 위로 솟아올랐다. 그들 중 셋은 붉은 로브를 뒤집어 쓰고 있었는데, 개중 중앙의 한 명만이 시원하니 얼굴을 까고 있었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핏빛으로 물든 적색의 눈동자.
수려한 외모의 남성은 비릿한 미소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시오. 갑작스런 재해 덕분에, 이렇게 만나뵙게 되는구려.”
텅 빈 숲속, 연회복을 입은 남성은 그 서구적인 외모처럼 귀족의 정중한 예법으로그들을 맞이했다.
“본인은 라하임드 백작이라 하오. 긴 잠에서 깨어나, 당신들의 목숨을 빼앗으러 직접 행차하였지.”
연극톤의 목소리는 다소 극적이고 과장되었다. 김세진과 김유린은 갑작스런 시대착오적인 인물의 등장에 어이없어하며 미간을 좁혔다. 갑자기 무슨 연극배우···
그러다 김세진은 돌연 무엇인가가 떠올랐다.
“라하임드···.”
중얼거리던 그는 곧 눈을 번쩍였다.
“아.”
왠지 익숙하다 했더니···
라하임드 백작 가(家). 전(前)세계에서 명망높은 귀족이었던 라하임드는 뱀파이어라는 신분으로 타락한 왕국의 변경백이 되었을 정도로 능력이 출중했다.
물론 지금에서야 가문은 몰락한 지 오래고, 지구에 와서도 뱀파이어 척살 작전에서 혼수상태가 되었다가 로드로부터 다시금 생을 부여받았을 뿐이지만, 그 능력만큼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전투적인 면에서는 여타 제왕의 후계들 조차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위압적인 존재.
라하임드 가문의 뱀파이어는 ‘혈액’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다. 자(自)뿐만 아니라, 자신의 혈액에 맞닿은 타(他)까지도.
잔혹한 전쟁광인 라하임드는 체내에 2~3배의 혈액을 담아두고 다니며, 피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생명체들을 학살했었다······. 고.
김세진은 저 쪽에 심어 놓은 세작에게서 ‘요주의 인물’이라는 명목으로 전해들었다.
“···웬 미친놈이냐.”
“하하하. 레이디 께서는 말이 심하시군요.”
김유린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러자 라하임드는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전신의피를 체외로 역류시켰다. 눈과 코, 귀와 모공을 비롯한 육체의 모든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그로테스크한 광경이었다.
“저 무슨···”
공기중으로 흘러나온 혈액은 붉은 마치 안개처럼 넓게 퍼져갔다. 김유린은 몸에 마나 강기를 두른 채였지만, 저 붉은 안개가 왠지 껄끄러워 뒷걸음질을 쳤다.
“마나 강기? 하하, 헌데 이 안개에 그 따위 잔술수는 통하지 않습니다.”
얇게 퍼진 혈액은 마나보다 작은 미립자 수준이어서 강기의 틈을 뚫고 체내로 스며들 수 있다. 그리고 제 혈액이 조금이라도 스며들면, 펑! 몸 안의 혈액이 터지게 되겠지.
“이걸로 네 번째 완료··· 겠군요.”
라하임드가 살생부의 목록을 떠올리며 파안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안개가 서서히 그들에게 다가가는 그 순간.
기체 상태로 넓게 퍼졌던 혈액이 갑자기 액화하여 바닥으로 폭삭 가라앉았다.
“···어?”
라하임드는 무척 당황하며 다시금 혈액을 조종해보았다. 허나 바닥에 고인 혈액은 굳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유린 씨,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그리고 김세진은 그런 리하임드를 보며 웃었다.
세진이 라하임드라는 이름을 기억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혈액은 곧 수분이지만, 모든 수분이 혈액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 물을 지배하는 특성과, 혈액만을 지배하는 특질. 어느 것이 우위에 있는지는··· 굳이 복잡한 생각을 거치지 않아도 간단하다.
“다행히 제가 상성에서 압도하네요.”
물론 아직 숙련도가 높지 않은 탓에 ‘범위’라는 측면에서는 놈이 앞서겠지만, 그 정도는 김유린의 도움으로 충분히 상쇄할 수 있다.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것이냐!”
멍하니 있던 라하임드는 김세진의 말이 마음에 안 들었던 듯 별안간 분기탱천하며 일갈했다. 그는 제 몸에서 더욱 많은 피를 끄집어내어, 이번에는 가시의 형태로 조각하여 쏘아보냈다.
이 피의 세례가 마나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두 놈을 폭사시킬것이라고? 라하임드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뭣··· 왜, 왜! 도대체 왜!”
허나 이번에도 또 방금처럼, 그의 혈액은 저 두 연놈의 근처로 가니 힘없이 액화하여 바닥으로 가라앉을 뿐이었다. 리하임드는 발을 동동 구르며 분노했다.
“내 저 썅년놈을 그냥···!”
제 분을 못이긴 라하임드는 결국 다시 한번 혈액을 뽑아냈다.
김유린은 저 놈이 뭔 짓을 하는지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고, 김세진은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으어어어!!”
놈의 전신으로 피가 솟구쳐올랐다.
···왠지 그냥 가만히 있으면 제 풀에 지쳐서 쓰러질 것 같다고, 김세진은 생각했다.
< 31. 얽히고설킨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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