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얽히고설킨 (1) >
다크엘프는 빛을 싫어한다. 그 이유는 딱히 밝혀진 것이 없으나, 그저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렇다. 그래서 대개 다크엘프들의 집은 흑색과 회색을 비롯한 무채색으로 덧칠되어 있으며, 아예 전구가 없는 집도 드물지 않다.
“······.”
그리고 이 곳은 다크엘프답게 새까만 방 안, 하젤린은 침대에 누워서 침잠한 내부를 유일하게 밝히는 네모난 액정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유심히 바라보는 액정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김세진(인증된 계정)
@SJKIM
더 몬스터 길드장/오크 대장장이/상급 사냥꾼
팔로워 45,345,874 팔로잉 10
요즘 젊은세대 사이에서는 아마 최고로 유명할 인물, 김세진. 팔로워 숫자도 아시아 최다인 4500만으로, 거진 대한민국 인구수의 절반 가까이에 달한다. 그만큼 사람들의 관심도 많아 SNS에 업로드 된 사진이나 글이 기사화 되는 것도 심심찮다.
“···무슨 여자랑 찍은 사진이 이렇게 많은 거예요?”
그녀는 SNS의 사진을 하나 하나씩 찬찬히 뜯어다보며 괜히 입술을 삐죽 내뺐다. SNS에 셀카는 참 많지만, 거의 절반이상이 여자랑 찍은 사진이다.
물론 세정이와 사귀고 나서부터는 그 빈도수가 급격히 줄긴 했지만··· 그래도 꼬리를 치는 여자들의 댓글은 끊이질 않는다. 게다가 꼬리를 치는 여자들 마저도 자신이 하찮게 느껴질 만큼 유명한 사람들 뿐.
잠깐 뭐야, 이 엘프 나도 아는 사람인데?
“아우. 나 미쳤나봐.”
그렇게 쓸데없이 열불을 내며 SNS를 들여다보던 하젤린은,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서 핸드폰을 저 침대 구석탱이로 내던졌다.
임자있는 남자를 가지고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인지 한심하고 답답할 노릇이지만··· 요즈음은 이렇게 되어버렸다.
물론 예전에도 그 남자가 가끔씩 생각나긴 했었다. 말 잘하고 젠틀하고 매너있으니까. 허나 그때에는 호감이 아닌 아주 흔한 감정, 그저 좋은 사람이구나~ 정도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간 포션 관련 일로 그와 교류가 잦아질 때마다, 마치 특유의 향기에 홀리듯 점차 그 감정의 정도가 진해지더니? 두 번의 때아닌 전투와 한 번의 감동적인 선물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요즈음. 매일 집에 홀로 남겨져 센치해질 때에는 그의 얼굴이 머릿속을 부유한다.
그렇다고 사랑은 결코 아니다. 엘프에게 사랑의 의미는 죽음보다도 무거워 사랑에 빠지면 일상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인데, 아직 그 지경은 멀고도 멀었으니까.
그러나 이게 정말, 무척 안 좋은 징조라는 건 확실하다. 게다가 이번에는 예전보다도 상황이 좋지 않다. 그는 이미 애인까지 있으니···
“후.”
한숨을 푹 내쉰 하젤린은 본능적으로 시선을 핸드폰 쪽으로 옮겼다.
그냥 이 정도, 외로울 때 가끔씩 생각나는 딱 ‘호감’의 선에서 멈춰야 하는데······. 엘프는 그게 안된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종족적 본능의 탓으로 돌리며 다시금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답장은 언제 보내주시려고···아 혹시?”
무려 2시간 전에 보냈던 문자의 답장은 아직도 감감무소식. 그러나 그녀는 화보다는 걱정이 먼저 일었다.
“뭐,하,세,요? 답,장,이, 없,네,요··· 혹,시 무,슨 일 생,기,신······.”
문자내용을 직접 읊으면서 보낸 하젤린, 그녀는 슬그머니 핸드폰을 내려놓고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 아담하고 세련된 피아노 모양의 오르골이 한 켠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
그녀는 가만히 다가가 오르골을 매만졌다. 누군가의 희미한 향기와 동시에 마음이 안정되는 음악소리가 솔솔 흘러왔다.
*
세계 몬스터 협회 통칭. WMO의 정식 세미나가 열리는 9월 9일.
이번 세미나는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정체와 출신이 묘연한 오크의 분파, 영웅오크-혹은 한국오크-의 출현과 번식이 가장 큰 이유였다.
“영웅오크의 등급은 총 네 등급으로 나뉩니다. 오크 전사, 오크 재규어, 오크 시니어, 오크 족장.”
그리고 김유린은 그 몬스터 세미나에 참석했다. 영웅오크의 부락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에, 영웅오크 권위자라는 자격으로.
“특이하게도 영웅오크에게는 대전사라는 지위가 없습니다. 나이에 따른 존경과 존중은 있어도, 수직적인 계급의 구분은 없기 때문이지요.”
그녀가 맡은 바는 세계 방방곡곡에서 참석한 저명한 학자와 교수들에게 영웅오크의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는 대전사 대신 다른 오크의 존중과 존경을 받는 ‘시니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싶습니다.”
그녀가 여태 피부로 느껴온 바, 영웅오크들은 지혜와 지식이 다른 오크에 비해 월등히 뛰어나다. 기본적인 사고가 가능하고 서로 간의 배려도 존재할 정도로.
여타 몬스터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꽤나 흥미로운 정보였기에, 학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메모를 했다.
“등급의 구분은 무얼 보고 알 수 있나요?”
한국어가 유창한 중년의 백인이 물었다.
“좋은 질문입니다. 다른 오크처럼 성체와 미성체는 크기로 구분할 수 있지만, 같은 성체의 등급 구분은 표피를 척도로 삼으면 됩니다. 그들의 몸이 파랄수록 등급이높지요.”
“그렇다면, 나이의 구분은 여전히 ‘모발’인가요?”
“예. 그 부분은 변화가 없습니다.”
“현재 부족의 규모는 어느정도나 됩니까?”
“약 1000개체의 오크가 살아가고 있으며, 그중 반수 이상이 성체입니다.”
누가 학자 아니랄까봐 참석자들은 끊임없이 호기심어린 질문을 던져왔고, 그렇게김유린이 세미나에서 맡은 부분은 예상보다 한 시간 정도 더 지속되었다.
“후··· 그럼 이만,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드디어.
박수세례를 받으며 세미나를 마친 김유린은 재빨리 주차장으로 달려 차에 올라타곧바로 몬스터 필드로 직행했다.
“늦겠다 늦겠다.”
오늘은 오크와 대련을 하기로 약속한 날. 입가에 자신도 모를 미소가 드리운다.
*
“강해지셨네요.”
햇볕이 쨍쨍 내려찌는 오후. 김유린이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요즘 오크와의 대련은 항상 무승부로 끝난다. 처음에는 대부분 승리했지만, 대련을 거칠수록 오크가 계속해서 성장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강해진 오크와 대련을 하면서 자신도 성장하여서 패배하는 불상사는 결단코 막아내고 있지만.
“···.”
오크는 말 없이 커다란 나무기둥에 기대앉았다. 콧김을 씩씩 내뿜는 것이, 이번에도 무승부로 끝난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이것도 대단한 겁니다. 제가 이래봬도 세계에서 50번째로 강한 기사거든요.”
오크와의 대련으로 급상승한 실력, 그에 따라 기사 세계랭킹도 최상위를 찍었다. 김유린은 자신의 강함을 PR하며 그의 바로 옆자리에 착석했다.
“···.”
그녀는 오크의 눈치를 살살 살폈다. 다행히 오크가 자신을 꺼리는 기색은 없었다.
“덕분에 저도 성장하고 있습니다.”
김유린은 그렇게 말하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살포시 기댔다. 힐끗 바라보니 오크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했다. 선선한 바람과 듬직한 어깨, 그녀는 그 절묘한 조합을 가만히 즐겼다.
“어이.”
헌데 갑자기 오크가 입을 열었다. 몸을 흠칫 떤 김유린은 머리를 치워야하나 고민을 했지만··· 그냥 모른 체하기로 했다.
“이제 이 짓도 그만하지.”
“···예?”
허나 다음 이어진 말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그녀는 화들짝 놀라 머리를 떼어냈다. 오크는 그런 그녀를 마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제 두 번 다시는 오지 말아라.”
오크의 얼굴은 냉정하고 차가웠으나, 사실 이건 김세진의 배려였다.
‘살생부.’
예전, 탁기의 고리로 꼬드겼던 사도가 지금에서야 가져온 정보가 하나 있다.
뱀파이어들은 자신의 목적에 방해될 만한 인물들의 목록을 작성하였고, 그것이 ‘살생부’라는 이름으로 로드의 손아귀에 들어갔다고.
김세진은 그 살생부의 1순위를 당당히 차지했다. 아마 저번에 있었던 두억시니 사태도 이 살생부로 말미암아 생긴 일이겠지.
그리고 김유린은 그 바로 다음인 2순위.
헌데 지금 김유린의 루틴은 파악하기 무지 쉽고, 그에 따라 습격하기도 무척 쉽다. 일주일에 두 번은 꼭 '혼자' 이 몬스터 부락지에 오는 지경이니까.
“왜, 왜 갑자기?”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간 상처받은 모양새가 아니었으나, 오크는 냉정했다.
“예? 아니 그게 무슨···.”
“질렸다.”
그는 그녀가 납득할 만한 이유로 둘러댈 수 없었다. 다만 설명없이 엄한 경고를 할 뿐.
“이번 출입이 마지막이다. 만약 다음에도 우리 부락지로 들어온다면, 죽을 각오를, 또 죽일 각오를 하고 와라. 내 오크들에게도 이미 다 말해 놓았다.”
“그, 뭡니까 그게! 이유라도 말씀해 주셔야···.”
김유린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달려들었다.
허나 오크는 한 손에 메이스를 움켜쥐고서 그녀를 향해 휘두를 뿐이었다.
“아읏! 잠깐, 이러지 말고 일단 얘기를 좀 해요 얘기를···!”
재빨리 물러선 그녀였지만, 갑작스런 일격에 상처가 생기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은 김유린은 계속해서 설명을 요구했으나 오크는 폭력으로 일관하였고, 시간이 지나자 부족의 평범한 오크들까지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왔다.
“이, 이 나쁜 놈!”
그래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 한마디를 남기고 도망갈 수 밖에 없었다.
오크, 김세진은 뛰쳐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자신에게 입은 상처에서 흐르는 선혈이 물방울 모양의 자국으로 남았다.
* *
“지원자가 뭐 이렇게 많죠?”
불편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 김세진을 기다린 것은 조한성의 연락이었다.
주제는 그리핀 라이더의 자격심사, 문자 그대로 그리핀라이딩을 원하는 기사들의 심사를 하는 것.
-전국의 중상급 이상의 기사는 거의 다 신청했을 겁니다. 그리핀이 훗날 아주 효율적인 경찰(警察)수단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파다하니까요. 게다가 현재 시국도 시국이기에··· 그런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되어 이렇게 많이 몰린 것 같습니다.
참고로 더 몬스터가 관리하는 그리핀이 서른 마리까지 불어남에 따라 ‘그리핀 라이더’라는 자격증이 법으로 까지 제정되었다. 물론 그 자격증을 발부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주체는 길드 ‘더 몬스터’다.
“각 기사단이 허락은 했답니까? 임대료 많이 나올 텐데.”
그리고 몬스터 길드의 관계자들은 이 그리핀이 훗날 중요한 수익창출창구가 될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있다. 당연 ‘임대료’라는 것 때문인데, 보통 한나절 대여에 억단위의 금액을 기사단에게 요구한다.
타임지 선정 가장 값어치 있는 이동수단 1위를 당당히 차지한 명성에 비해서는 조금 싼 감이 없지않아 있지만··· 그 이상은 시장경제에 맞질 않는다.
-네. 물론입니다. 그리고 그 점과 관련해서, 새벽이 혹시 그리핀 한 마리를 판매할 수 없겠느냐고 물어왔습니다. 금액은 최대한 후하게 쳐주겠다고.
조한성이 그 말을 한 순간, 바로 옆에서 TV를 보던 유세정이 귀를 쫑긋하며 다가왔다.
“둥지랑 관리인력은 갖췄답니까?”
끄덕끄덕- 조한성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유세정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제안은 유세정의 입김이 컸구나, 김세진은 납득하며 피식 웃었다.
-네. 최대한 저희 둥지를 벤치마킹해서 만들어서인지 환경도 비슷하여 라울이도 잘 적응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라울이는 유세정이 가장 좋아하는 암컷 그리핀의 이름이다.
“그러면··· 판매는 좀 그렇고, 10년임대? 그런 형식으로 해준다고 하세요.”
그가 그렇게 말한 순간 유세정이 소리없는 탄성을 내지르며 백허그를 해왔다.
-예. 알겠습니다.
“네. 나머지는 알아서 해주세요.”
-아. 그리고 외교부 장관님도 연락을 해오셨습니다. 그리핀과 포션수출을 원하는국가가 당장 EU쪽부터 시작해서 아주 많이 밀려있다고······
“그건 한성씨가 알아서 다 직접 만나고 오세요.”
-예?
조한성이 멍한 단발마를 내질렀다. 피식 웃은 김세진이 전화를 끊으려 했으나, 끊지 말라는 다급한 음성이 전해왔다.
“또 왜요?”
-아직, 하나가 더 남아있습니다. 이게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뭔데요?”
조한성이 심호흡을 한번 했다.
“라이칸의 기자회견 날짜가 잡혔습니다.”
< 31. 얽히고설킨 (1)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