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제대로 된 시작(4) >
수백 미터에 달하는 호텔 최상층에서의 고공 낙하. 허공에 뜬 발이 시가지의 지면에 닿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아주 찰나였다.
콰아앙!
김세진이 착지한 지면이 움푹 패이며 충격파가 유별나게 퍼져 나갔다.
“괜찮죠?”
그는 제 목에 팔을 꼬옥 두르고 있는 하젤린을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늦지 않게 베리어를 두른 듯, 그녀에게도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네. 덕분에 괜찮아요. 근데···.”
허나 그보다는 다른 문제가 더욱 급했다. 요란하게 추락한 대로변, 그들의 주위로는 별안간 크고 작은 두억시니들이 마치 포위하듯 뒤얽혀 있었으니.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저도 그래요.”
‘두억시니’. 아무런 소리도 어떠한 기척도 내지 않고, 오직 육안으로만 그 형상을 바라볼 수 있는 허무(虛無)의 존재들.
제각기 크기는 다르지만 놈들은 모두 시뻘건 안광으로 김세진과 하젤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소 오싹한 광경에 하젤린은 저도 모르게 세진을 더욱 강하게 껴안고 말았다.
“···큼.”
때아닌 스킨십에 김세진이 상황의 심각성도 잊고 살짝 긴장했을 때.
쿵!
“괜찮으십니까!”
뒤이어 김선호와 용병들 또한 그들의 뒤축으로 낙하해왔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두억시니가 거대한 손을 휘둘러 방금까지 김세진이 머물던 호텔을 강타했다.
쿠우우우웅!
소리가 절멸된 것 같았던 세상에 가득한 굉음이 들어서고, 암흑 뿐이었던 시가지에 불이 동시다발적으로 켜진다.
그리고 마치 그것이 신호였던 듯. 대로변을 장악했던 크고 작은 모든 두억시니들이 활동을 시작했다.
김세진은 재빨리 하젤린을 내려놓고서 우르르 몰려오는 두억시니 중 가장 앞쪽에있는 놈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놈의 안면은 정권 한 번에 터졌으나, 두억시니 특유의 꺼림칙한 피부와 검붉은 선혈의 불쾌한 감촉이 온몸을 휘감았다.
“으···”
오만상을 찌푸린 그는 마나를 체외로 뽑아낸 뒤 오크의 단조를 사용했다.
스스스스?
결정을 이루듯 서서히 응집된 마나는 이내 푸른 빛을 발하는 검의 형상을 갖추었다.
‘마나지체’의 숙련도가 아직 부족해 강도와 경도가 모두 불완전하지만, 마나를 재료로 만들었으니 그 예리함만큼은 극에 달할 터.
샤악-
그가 쏘아낸 검격이 두억시니를 말끔하게 이등분한다.
그러나 그의 손에 쥐어진 무기는 그리 오랫동안 살아남지 못했다. 다섯에서 여섯을 베면 먼지처럼 사라지길 반복. 그는 그럴 때마다 더욱 오래버틸 수 있는 무기를 또다시 만들어내어 두억시니들을 도륙했다.
방금까지 검이 휘둘러진 궤적을 일직선의 장창이 꿰뚫고, 장도의 유려한 검격이 뱀처럼 휘며 놈들의 사지를 부드럽게 분해한다.
롱소드, 박도, 장도, 레이피어, 망고슈, 클레이모어, 장창 등등··· 그 모든 서로 다른 무기들은, 실로 무기의 달인을 만나 남부럽지 않을 보물처럼 활용되었다.
“와···.”
하젤린은 10초에 한번씩 무기가 바뀌는 그의 감각적인 전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곧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마법의 영창을 외웠다.
대상은 소리 없이 움직이며 누군가를 찾는 거대한 두억시니였다.
*
아수라장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펼쳐졌으나, 김세진의 일행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태가 일어나고 고작 5분만에 캘리포니아 ‘주’ 전체에 총 동원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호텔이 무너지고 15분이 지나자 군부대의 탱크는 물론 물경 수 천에 달하는 기사와 사냥꾼들이 몰려와 두억시니들을 문자 그대로 쓸어버렸다.
모든 사태가 끝나고 부랴부랴 도착한 차관은 다소 이례적일 정도로 신속한 반응이었다고 말하면서, 모두 계약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기 위한 미합중국의 노력이라고, 그러니 부디 나쁜 생각을 가지지 않길 바란다고··· 조금 비굴한 얼굴로 덧붙였다.
“···후아.”
그래서 지금 김세진의 일행은 기사들의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었다. 소문을 들은 기사들은 혹시라도 계약이 엎어지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며그들의 편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당황했는데··· 그래도 세진 씨가 함께라서 다행이었네요. 난생 처음 최우선보호대상도 되어보고··· 나는 맨날 쫓기는 쪽이었거든요.”
하젤린의 목소리에는 맥아리가 없었다.
“몸은 괜찮아요?”
“마나를 거진 다 써서 그런가··· 조금 어지럽고 졸리네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세진의 어깨에 머리를 살포시 기대었다. 물씬 피어오르는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뭇 여성들은 여우같은 행태라 기겁했을지도 모르지만, 남자인 세진은 감히 거절할 수가 없어 괜히 헛기침을 한번 했다.
“크음··· 그럽니까?”
“네. 근데 세진 씨, 조금 멋지대요? 어떻게 무기를 그렇게 잘 다루게 되셨어?”
하젤린은 방금전 압도적이었던 무위가 다시금 떠오른 듯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마나를 무기로 연성하여 검, 대검, 도(刀), 창. 무기를 가리지 않고 적을 도륙해내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멋지다고 감탄할 만한 광경이었다.
“하하하.”
김세진은 그저 너털웃음 터트렸다. 하젤린은 그런 그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다가,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근데··· 누가 두억시니를 소환했을까요.”
두억시니는 평범한 몬스터가 아니다. ‘균열’과 ‘세계’의 사이에 살아가는 놈들은 강령의식 혹은 주술로만 불러낼 수 있는 특수한 존재이며, 철저히 술자의 명령만을 따른다.
그러니 그런 두억시니가 갑자기 세진이 머무는 호텔을 습격했다면, 그 목적은 그리 깊은 고민 없어도 짐작이 간다.
“···.”
물론 세진은 짐작가는 배후가 있었다. 허나, 그걸 굳이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건 신경쓰지 말고 그냥 편히 쉬어요.”
그가 어금니를 깨물며 굳은 표정을 지었다. 하젤린은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어깨가 참 넓구나.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
다음 날.
두억시니를 소환한 배후를 찾는 것은 미국 정부와 기사단에 맡기고서, 김세진은 일단 계약체결을 서둘렀다.
그 전에 조한성의 조언도 받아둔 터라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세진은 두 기업과동시에 계약을 체결하여, 일단 서부 쪽의 포션 공급을 맡기는 것으로 계약을 마무리지었다.
혹시라도 또 습격을 당할까, 일이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귀국한 김세진은 하젤린과 함께 차를 타고 강원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세진 씨 첫인상은··· 뭐 그냥 그랬죠.”
“···그냥 그래요?”
“네. 알잖아요. 엘프는 눈이 높을 수 밖에 없는 거. 그건 다크엘프도 마찬가지예요.”
김세진과 하젤린. 두 사람이 서로 알아온 2년여의 세월동안 쌓인 추억은 예상외로 많았고-하젤린은 어쩌면 김세진이 가장 오랫동안 알아온 인연이었다-, 둘은 차 안에서 화기애애한 얘기를 나눴다.
처음 만났던 날, 김세진이 자신의 정체를 밝혔을 때, 그를 로데스 일가로 착각했던 것, 뱀파이어의 습격 등등···
“아 맞다. 세진 씨, 그때 궁금하다고 하셨죠? 제가 왜 피부가 하얘지려고 했는지.”
“···예? 그렇긴 했는데, 불편하시면 말 안 해주셔도 돼요.”
갑작스런 화제전환에 김세진은 제 옆자리를 힐끗 바라보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쳐황급히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그래도. 갑자기 불공평하다고 생각되더라고요. 김세진 씨는 저한테 모든 비밀을알려주셨는데··· 심지어 생사의 고비도 두번이나 함께 견뎌냈잖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냥 제가 말하고 싶어요.”
“···하하, 하하. 그래요?”
참고로 그는 그때 뱀파이어 습격사건의 진상을 그녀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그 사실을 모르는 하젤린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말을 이었다.
“왜, 그런 말 있지요? 엘프는 지고지순해서 오직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 요즘 인간들은 그거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던데, 사실 다 맞는 말이에요.”
엘프에게 사랑의 의미는 그 무엇보다 거대하다. 그것은 다크엘프든, 하이엘프든,엘프든 변함이 없다.
“근데 그건 좋게, 무척 좋게 포장한거랍니다? 실상은 아주 달라요.”
“다르다고요?”
“네. 사실 엘프에게 사랑은 집착과 집념의 집합체나 다름이 없어요. 대상의 상황과 조건이 어떠하든 간에, 만약 그 대상을 혹시라도 사랑하게 된다면. 엘프는 그 사람에게 사랑받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아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가장 완벽하다는 종족은 사실, 가장 불완전한 결핍을 지니고 있는거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텅 빈 쓸쓸함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저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흰 피부의 여자를 좋아하길래 피부를 하얗게 만들었어요. 선하고 의리있는 여자를 좋아하길래 제가 마법사로서 하던 일을 모두 관뒀어요.”
갑작스런 과거고백에 당황한 세진이 차의 속도를 살짝 늦추었다. 하젤린은 한숨을 푹 내쉬고서 다시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저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끝까지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을 바라보다가, 그 사람을 지키고 자기가 죽어버렸죠. 그때는 정말 너무 슬프고 슬퍼서, 누굴 원망이라도 하지 않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릴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정말몹쓸 짓을 저질러버렸어요.”
김세진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세진 씨. 엘프를 조심하세요. 너무 잘해주지 말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세요. 엘프는 호감을 가진 대상에게 스스로 멀어질 힘이 없거든요. 물론 호감과 사랑의 차이는 무지 크지만.”
말이 끝난 딱 그 순간, 차도 동시에 멈췄다. 그녀의 집 앞이었다. 하젤린은 방금 자기가 한 말이 괜시리 부끄러운 듯 제 얼굴을 한번 털어내고서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세진 씨, 언제나 고마워요~”
“아, 잠깐.”
황급히 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녀를 김세진이 잡아세웠다. 그는 안색이 어두운 그녀를 응시하다, 이내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상자 하나를 꺼냈다.
“받고 가세요. 선물입니다.”
LA의 시내를 둘러보던 와중 하젤린이 유일하게 관심어린 시선을 보낸 물건이 딱 하나 있었다. 미팅 중이라 시간이 없어서 그녀가 직접 사지는 못했지만, 김세진은 늑대의 예리함으로 그 시선을 단번에 포착하여 몰래 사서 가지고 왔다.
“이거······.”
과연, 그녀는 멍하니 그가 건넨 선물을 바라보았다.
“뭐, 열면 소리나오는 그런 거 아닌가요? 그때 눈여겨 보시던데.”
이틀 전 하젤린이 복잡미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물건, 오르골.
“아···”
“이만 갈게요. 편히 쉬어요.”
김세진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정말, 내 충고는 귓등으로 들으셨나···.”
그리고 하젤린은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
포션수출은 길드와 김세진의 명성상승은 물론 양국관계를 증진하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이뤄냈다. 미국 대통령이 그 건을 직접 언급했고, 김세진은 청와대의 초청까지 받았을 정도이니···
어쨌든. 귀국한 그는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갔다. 때로는 진세한으로, 때로는 김세진으로, 때로는 몬스터로.
그 중 진세한은 ‘아덴특채’라는 것으로 활동한 지 2개월만에 중급기사로 등극하였기에, 목표로 했던 6개월보다 더욱 빠른 시일내에 중상급기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허나 시간이 흐를수록 전 세계에 맴도는 불길함은 진해져만갔다.
몬스터 출현 빈도수는 끝없이 치솟고, 하루에도 백여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는다. 포션이나 무기의 제반이 확실하게 잡힌 한국의 경우에는 그렇게 심각한 피해는 없었지만··· 아프리카, 남미, 동남아 등등... 이른바 제3세계의 몇몇 국가들은 아예 국가의 의미가 실종될 정도로 극심한 피해에 시달리는 실정이다.
“하루에 8번이나 호출된 적도 있었어··· 되게 힘들었다니까?”
그리고 오늘, 이제 여름도 슬슬 그 생을 다해가는 9월 중순의 이른 아침. 유세정의 푸념을 들으며 김세진은 속으로 하품을 삼켰다.
“그럼 오늘이랑 내일은 쉬어.”
“그게 말처럼 쉽나··· 아버지도 안 뺴주시는데.”
“내가 말해줄게.”
“진짜? 그러면 되겠네~”
김세진의 입김은 이제 동원령에서 기사 한 명은 뺄 수 있을 정도는 되었기에, 유세정은 발랄하고 활기차게 그의 품 속으로 달려들었다.
띠리링-
그때 갑자기 핸드폰에 알림이 울렸다. 김세진과 유세정의 눈동자가 동시에 그쪽으로 굴러갔다. 그는 유세정보다 한발 먼저 손을 뻗어 제 핸드폰을 낚아챘다.
“누구야?”
유세정이 물었다.
“별거 아니야.”
대충 둘러댄 김세진은 답장을 보내고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뒤집혀진 핸드폰 액정에는, -하젤린- 이라는 글자가 쓰여있었다.
< 30. 제대로 된 시작(4)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