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에덴, 기사의 탑 (3) >
“아저씨. 나랑 합시다.”
이유진은 김인수가 돌아서자마자 대련을 제안해왔다.
바로 내일인 7일차에는 간단한 마나, 마력측정, 인적상담, 기사단과의 면담 뿐이니 사실상 역전할 수 있는 기회는 이걸로 끝. 허나 이것도 진세한이 거절하면 그만이니 이유진은 약간 초조한 기색이었다.
“···.”
실제로도 진세한은 멍하니 있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답답해진 이유진이 그의 팔을 쥐고 흔들자, 그제서야 고개를 비틀어 자신을 내려다본다.
“하자고요.”
“···뭘?”
“대련.”
“어··· 아··· 그러지.”
순순한 승낙에 이유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이내 활기차게 웃으며 좋아라했다.
“역시 아저씨는 시원시원하고 좋네. 두말하기 없기, 아시죠?”
“그래.”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생도들은 곧 있을 대련을 대비하여 간단한 준비운동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한시간 뒤.
모든 생도들은 4층에 위치한 거대한 대련장에 집결했다.
김인수는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참관인들을 향해 예우를 갖추라 말했고, 생도들은 어딘가로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그렇게 대련이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생도들은 사람의 숫자가 숫자인지라 대련이 지루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모두 짧디 짧은 찰나의 전투였다.
그렇다고 높은 순위의 생도들이 낮은 순위의 생도들과 대련한 건 아니었다. 높은 순위의 생도들은 점수를 의식하여 너무 낮은 순위는 기피했을 뿐만 아니라, 대련에 자신있지만 순위가 낮은 생도들은 높은 순위의 생도들을 도발하여 억지로나마 대련을 성사시켰기 때문이다.
쏴아아아-
“···오.”
고윤종의 검으로부터 쏘아지는 푸른 섬광이 이름모를 남자생도의 검을 용융시킴으로써 35번째 대련이 끝났다. 고작 대련 시작 후 25분이 지난 순간이었다.
“현 9위, 고윤종 생도의 승리.”
“잘했어!”
친우의 승리에 잔뜩 상기된 이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까지 크게 소리쳤다.
“다음은 이유진과 진세한. 나와라.”
허나 그 여유와 기쁨도 잠시 뿐,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호명된 순간 얼굴을 무겁게 굳혔다.
진세한이 먼저 단상 위로 올라갔고 이유진이 뒤따랐다 그렇게 서로를 마주하게 된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하지? 그냥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한주먹에?’
‘분명 대련의 경험은 없을테니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초장부터 돌격해야 할 것 같긴 한데··· 뭔가 불안하단 말이야. 어떻게, 대치하다가 빈틈을 노려······’
물론 그 생각의 무게는 이유린 쪽이 더욱 무겁고 심각할 따름이다.
*
“누가 이길까요?”
드디어 시작된 메인매치에 참관인들은 벌써부터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이유진이 승리하지 않을까 사료됩니다. 이유진은 유세정보다 이른 나이에 아카데미를 졸업했건만 에덴에 입단하기 위해 일부러 재수생도까지 자처한 기사니까요. 실전적인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을겝니다.”
참관인들은 저마다 열띤 토론을 했다. 누가 이런 필살기가 있으니 여태까지의 모습을 보아선 대련이 빨리 끝날것이다, 아니다 실력이 비슷하니 그래도 5분은 지속될 것이다······
헌데 그러는 와중에, 별안간 저 아래 대련장 쪽에서 산통을 깨는 외침이 터져나왔다.
“···끝! 1위 진세한 승리!”
심판도 당황한 듯, 목소리조차도 떨리고 있었다.
“···뭐야?”
그 갑작스런 통보에 당황한 김유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직접 육안으로 대련장을 확인해보았다. 배를 움켜쥔 이유진과 그 앞에서 주먹을 꽉 쥔 채 그녀를 내려다보는 진세한.
대련은 명백히 끝나있었다.
“···큼.”
김세진이 멋쩍어하며 뒷목을 긁적였다. 이렇게 빨리 끝낼 생각은 없었는데··· 솔직히 초반부터 그렇게 매섭게 돌격할 줄은 예상조차 하지 못해서, 저도 모르게 눈 먼 주먹을 휘둘러버렸다.
그리고 그 간단한 주먹질의 결과가 바로 지금.
“···흐윽··· 끄으···.”
바닥에 침까지 흘려가며 정신을 못차리는 이유진과, 넋을 잃은채 자신을 바라보는 생도들.
“우, 운이 좋았군.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줄 줄이야. 나도 참 운이 좋았어.”
···그 눈빛에 보답하려면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
첫번째 대련이 끝난 뒤. 생도들은 몸을 추스르며 곧 도래할 고수를 기다렸다.
김세진은 유세정을 만나야 한다는 긴장때문인지 연신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셨고, 이유진은 풀이 죽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오, 우와!”
그때, 드디어 유세정이 등장했다.
그녀는 그야말로 아이돌이었다.
가만히 앉아있던 생도들은 모조리 일어나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으려 했고, 무려 대련의 심판과 김인수마저도 예전보다 훨씬 더 성숙한 미를 자랑하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였다.
또각또각- 대련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하이힐을 신은 그녀는, 대련장 위로 올라와생도들을 훑으며 말했다.
“···제 평가 기준은 간단해요. 제 일격을 견뎌내실 수 있으면, 후한 점수를 드릴겁니다.”
그러나 유세정은 김세진과 마주볼 때와는 전혀 다른, 시리도록 차가운 태도였다.
“시간이 많이 없으니, 역순부터 빠르게 시작합니다. 순위 최하위 분? 나와주세요.”
그렇게 시작된 대련, 아니 가르침은 1차 대련보다 금세금세 끝났다. 모두 그녀의 목검을 한번도 받아내지 못했으니 70명까지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저 작고 가녀린 몸에 새겨진 문신만 6종류, 김세진은 새삼 자신이 어떤 괴물을 만들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 다음··· 이유진?”
“예, 예~!”
이유진이 소리를 지르며 냅다 뛰어나갔다. 어쩌면 롤모델-비록 두 살 밖에 차이가 안 나지만-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의 압도적인 면모에, 풀이 죽었던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새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자, 시작할게요.”
유세정이 그렇게 말하며 검을 휘저었다. 가볍게 휘두른 검처럼 보였으나 이유진이 느끼는 위압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우앗!”
이유진이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며 그 일격을 가까스로 견뎌냈다.
유세정은 검의 힘과 마나를 유지한 채 입으로 하나, 둘, 셋, 카운트를 하더니 ‘다섯’에 다다르고 나서야 검을 거뒀다.
“흐어어···.”
단 한번의 공격에 녹초가 되어버린 이유진은 다리를 후들후들 떨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좋네요.”
김명한에 이어서 두번째 합격자의 등장에 생도들이 박수를 쳤다.
“자, 다음?”
그리고 마지막, 김세진은 쭈뼛쭈뼛하며 대련장 위로 올라갔다.
헌데 자신을 바라보는 유세정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의미심장했다.
“···갈게요?”
“..예.”
부분 야수화를 통해 목소리는 김세진에 비해 더욱 무거워졌으니 상관은 없을 테지만··· 이상하게 그녀는 공격 대신 그의 이목구비를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흐음···”
이러고 있으면 당장이라도 들킬 것 같아, 그는 직접 돌격을 했다.
“..?!”
화들짝 놀란 유세정의 얼굴. 뒤이어 내리쳐지는 농밀한 마나의 목검.
세진은 그 검을 손으로 움켜쥐고서 약 10초동안 버티다가, 이제 됐겠다 싶어 힘을 뺐다.
"..."
그리고 일부러 다리를 휘청거리며 바닥에 주저앉는다.
유세정은 미간을 좁힌 채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한마디를 툭 내던졌다.
"..좋네요 좋은데..."
저 남자, 뭔가 어디서 본 것 같단 말이야.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체류시간을 늘릴만한 말은 하지 않았다. 빠른 퇴근은 기분을 좋게 만드는 법이니까.
"됐어요. 시험 끝. 저는 가볼게요."
룰루랄라- 집에 돌아가면 혹시라도 그가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그녀는 마냥 좋아하며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
그렇게 기사시험은 싱겁게 끝이났다.
진세한은 수 많은 기사단의 애걸복걸을 모두 무시하고 꿋꿋이 ‘에덴’ 자원을 신청했고, 현재는 여유롭게 다음주에 있을 통보를 기다리는 중.
그리고 푹푹 찌는 듯한 날씨와 열기 머금은 바람이 부는 오늘은 평범한 여름의 주말.
김세진은 에어컨이 쌩쌩 터져 나오는 집에서, 쌔근쌔근 잠든 유세정의 등을 쓰다듬으며 한적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크 족장이랑 라이칸슬로프랑 싸우면 누가 이기려나···.’
조금은 쓸모 없었지만.
어쨌든 꽤나 평화로운 일상을 즐기는 와중에 별안간 수정구에 빛이 밝아왔다. 김유손의 마법통신이기에 그는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았다.
“여보세요.”
-김유손입니다.
“예.”
김유손은 허튼 일로 연락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늘의 목소리도 다소 무거웠다.
-꿈을 꿨습니다.
“···.”
그의 단골 레파토리, 이럴 때면 가슴이 철렁한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인 조건반사였다.
-앞으로··· 시대가 조금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는요?”
-수 많은 보스몬스터들이 범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번 괴조는 시작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단지 한국 뿐만이 아닙니다. 미래의 토막뉴스로 미루어 보았을 때, 저 멀리 여러 다른 세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 같더군요.
너무 갑작스러웠기에 김세진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래서, 앞으로 많은 준비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준비······ 말입니까?”
-예. 저희 길드의 지하에는 수많은 고블린이 있고, 하루가 지날수록 강해지는 영웅오크들과 그리핀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본 미래는 고작 그것 만으로는 바꾸기 힘들 것이었습니다. 일단 저희에 우호적인 기사단과 함께 힘을 키우는 것이······
김유손의 말은 그답지 않게 길고 정제되지 않고 다급하여서, 김세진은 그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김유손은 그 모든 걸 알고있으면서도 급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일단.. 저는 잘 이해가 안 되지만 김유손 씨의 말대로 할 테니, 한성씨와 이야기를 나눠서 가닥을 잡는 것으로 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김유손이 힘없이 대답했다.
난세는 영웅을 만든다. 그리고 김세진과 그의 길드는 영웅이 될 자격과 조건이 충분하다. 난세에서 가장 대우받는 수많은 포션을 제조하고 무기를 만드는 능력, 그와함께라면 더러운 흡혈귀들의 농간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길드와 김세진이 거머쥘 수 있는 명성과 부, 권력과 명예까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터.
그러나 영웅(Hero)과 괴물(Monster)는 한 끗 차이다. 영웅이 한발자국 어긋나면 그것이 곧 괴물이 되는 것이니.
그리고 김세진의 정신은 그렇게 안정적이지만은 않다. 이따금씩 꿨던 꿈 속에, 그는 항상 불안해했고 두려워했다. 그는 느끼지 못했을지라도, 그의 속에 자리잡은 괴물과 인간이 뒤섞인 자아는 분명 그렇게 느꼈다.
“그럼, 만남을 조한성과 갖은 뒤 나중에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네.
김유손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통신을 끊고서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꾼 꿈은 특히 길었다. 거의 대부분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회광반조(回光返照)라는 말이 떠올랐다.
"···크흡!”
그러자 순간 목구녕에서 욕지기가 치밀어 황급히 손으로 틀어막았다. 검붉은 액체가 손가락의 틈새로 비집고 나왔다.
“···크으음.”
속을 게워낸 그는 바닥을 적신 혈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생까지 갉아먹는 흡혈귀의 저주,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은 충분히 직감할 수 있다.
‘선호 놈이 나를 대신해 잘해주어야 할텐데.’
아들 놈은 용병들의 우두머리로서 많은 일을 하고 있고, 필요한 교육 또한 미리 해두었다. 그러니 어렵지 않게 나의 유지를 이어갈 수 있을 터.
허나 놈은 김세진을 어려워하는 것이 탈이다.
김세진은 누군가에게 이끌리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순한 의도가 없다면 그것을 반기는 사람이다. 그의 내부에는 많은 겁이 쌓여 선택에 대한 두려움이내재하기 때문이다. 그 선택이 미칠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더욱 더.
‘···자리를 한번 마련해 봐야겠다.’
김유손은 어두운 눈동자로 하늘을 창밖을 내다보았다. 밝고 고운 햇볕이 토양에 내리쬐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일상’이라는 제목을 가진 한 폭의 그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