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에덴, 기사의 탑 (2) >
“그쪽도 기숙사 쓸 줄 알았는데··· 뭐, 어쨌든 내일 또 봅시다.”
“꼭 합격해요 우리.”
시험이 끝나고 어느새 어둑어둑해진 세상, 저녁 8시. 이유진과 고윤종은 각각 그렇게 말하며 에덴의 탑에 위치한 기숙실로 향했다.
진세한은 가벼운 손짓으로 인사를 대신하고서 에덴의 탑에서 멀리 떨어진 으슥한골목으로 빠져든 후, 김세진이 되어 집으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집에 도착하니 역시나 유세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기다렸다는 말도 이제는 어색하다.
화장실에 놓인 두 개의 칫솔, 두 명이서 자도 모자라지 않을 안방의 킹사이즈 침대와 화장대, 신발장에 놓인 여러 하이힐과 옷 방에 있는 두 개의 장롱까지. 혼자 살기에 휑할 정도로 넓었던 집은 이제 어느정도 가득 찼다.
그러니 이쯤 되면 동거 아니면 신혼집이라는 표현이 더욱 옳겠지.
“왔어?”
귀여운 토끼 슬리퍼를 신은 유세정은 현관까지 나와서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그는 겉옷을 벗어 유세정에게 건넸고, 그녀는 익숙한 몸짓으로 옷을 빨래방에 놔두었다.
“하아···.”
거실의 소파에 드러누운 김세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어느새 다가온 그녀가 그 옆에 딱 달라붙어 짐짓 불만스레 흘겨보았다.
“요즘 하고있는 일이 많이 바쁜가봐? 아침 8시에가서 지금 오고.”
“···조금 그렇지.”
김세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참 오랜만에 몸이 노곤하고 피로하다. 신체적으로는 별로 힘들지 않았으나 정신적 피로가 문제였다. 200명이 넘는 인파 속에 끼어서 안좋은 눈빛과 때때로 뒷담화를 듣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으니.
“많이 졸리네.”
그는 하품을 하며 시계를 힐끗 확인했다. 현재 시각은 오후 9시. 이제 3시간 뒤면또 몬스터 폼으로 밖을 나돌아다녀야 하니 시간이 촉박하다.
“···흐음.”
유세정은 그런 그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그의 품으로 살포시 뛰어들었다.
“힘내요 오빠. 언제든 새벽의 힘이 필요하면 말하고. 내가 국회의원까지는 어떻게 해 줄 수 있으니까··· 물론 우리 할아버지가 해주는거지만, 내가 부탁하면 꼼짝도 못하시거든.”
그녀는 세진의 품속에서 연신 꼼지락거리며 애교를 부렸다. 그 모습은 꽤나 귀여웠기에, 피곤함에 절었던 김세진도 어느새 환한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힘들 때 자신을 위로해줄 사람이 있으니 이렇게 안정이 되는구나. 그는 왜 사람들이 귀찮기만 한 연애를 하는지 새삼 이해가 되었다.
“..고마워.”
김세진은 진심을 담은 감사를 말하며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 몸은 분명 자신이훨씬 큰데, 오히려 품에 안긴 것처럼 편안하고 아늑했다.
“고마우면 뭐해. 무슨 일 하는지도 안 알려주는데.”
그리고 이 때다- 싶은 유세정이 재빨리 어리광을 부렸다. 허나 김세진은 꽤나 철벽이었을 따름이다.
“···그건··· 나중에. 네가 날 더 좋아하게 되면 전부, 모조리 알려줄게.”
물론 언젠가는 알려줄, 알려줘야만 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애인이기에 진실을 털어놓기 어렵고 힘들다.
일단 몬스터로 변한다는 것 자체가 껄끄러울 뿐더러, 무엇보다 그녀가 ‘새벽’의 핏줄이라는 사실이 걸린다.
이름 석자를 호적에서 내릴지언정 코쟁이와의 결혼은 절대 불가하다던 과거 새벽회장의 일화가 아직까지도 전해질 정도인데, -아무리 시간이 흘러 그런 보수적인 면은 많이 옅어졌다 하더라도- 엄연히 말하면 자신은 그녀와 ‘종족’ 부터가 다르니까.
그녀는 다른 누구보다 특히 더 소중히 여겨야 하는 여인이니만큼, 여러모로 진실을 말하기에는 걸리는 점이 많았다.
“이 이상 좋아하는 건 불가능한데? 지금 알려줘도 돼!”
허나 그 속사정을 모르는 그녀는 짐짓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의 품을 파고들어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몇 번을 더 말해줘야 돼?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알아. 아니까 가만히 있어.”
허나 김세진은 그녀를 꽉 껴안음으로써 가볍게 진압했다.
그렇게 5분정도 서로 가만히 포옹하고 있었을까.
"..흠흠."
별안간 유세정이 슬그머니 손을 움직여 그의 둔부를 더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츄리닝 바지 위를 천천히 문지르기만 하던 손은 이내 바지를 비집고 그 속으로 들어가더니···
“뭐하냐?”
자신의 둔부에서 느껴지는 야릇한 주물럭에 김세진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아니 뭐··· 아무리 피곤해도 꼭 바로 자야 하나··· 근데 뭐야. 언제는 내가 싫다고 해도 했었으면서, 나는 그러면 안되나?”
유세정은 입을 삐죽 내빼며 오히려 전보다 더 노골적으로 더듬었다. 이렇듯 세진과 함께한 동안 그녀는 어느새 꽤나 적극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푸흡. 야, 간지러워."
김세진은 자신의 허벅지에 제 몸을 비비적거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잘 수 있는 시간은 끽해봤자 3시간이지만··· 어차피 이 괴물같은 몸뚱이는 두 시간이면 모든 피로를 회복할 수 있으니까.
*
기사 시험은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2일차는 탑 내부에 마련된 기묘한 장소에 생도들을 가둬두고 탈출을 시키는 시험이었다. 확장 마법으로 인해 광활하게 넓혀진 장소는 마치 대자연처럼 꾸며져 있었고, 수많은 몬스터와 야수, 함정이 드글거렸다.
그리고 그 정글과도 같은 곳에서 진세한은 오직 맨주먹 만으로 모든 난관을 헤쳐 나갔다. 몬스터와 야수가 나타나면 목을 비틀어 죽였고, 장애물이 있으면 주먹 한 방으로 날려버렸으며, 예민한 직감에 함정따위는 결코 통용되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협동심’이라는 항목을 잊지 않았다. 위험에 처한 생도가 있으면 구해주고, 함정에 빠진 생도가 있으면 도와주었다.
“확실히 현재 순위표 1위 다운 인재이군요.”
그리고 그런 진세한은 ‘생도’라는 기준 하에서는 단연 압도적이었기에, 시험의 과정을 참관하고 있던 기사단의 고위간부들은 저마다 눈을 빛내고 입맛을 다셨다.
“무엇보다 같은 생도들을 챙기는 모습이 보기 좋군요.”
그리고 그 중에는 칠흑기사단의 고위기사 김유린도 포함되어 있었다.
“동의하오만··· 출신이 조금 의심스럽지 않소?”
조심스런 반론은 대백기사단의 부단장 오정혁이었다.
요즘 날로 주가가 상승하는 대백기사단 덕에 그의 어깨는 다소 빳빳해져 있었다. 물론 성장의 뒷배경은 ‘아탄이가 구비되어있는 국내 4개의 기사단 중 하나’라는 타이틀과 ‘더 몬스터와 관계가 좋은 기사단’으로 다소 외부의존적이었으나, 요즈음 신입 기사들은 오히려 다른 무엇보다 그런 것들을 중요시 여기지 않던가.
“가족도 집도 없는 노숙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능력도 괜찮고 인성도 저 정도면좋은 것 같습니다만.”
“허허. 유린 기사님은 언제나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 것 같소. 저 안에 어떤 흑심이 도사리고 있을 지 모르고, 또 노숙자 출신인 이상 돈을 너무 밝히······.”
오정혁은 열과 성을 다해 반박했으나, 그 속내를 알아차리지 못할 김유린이 아니다. 이렇게 잔뜩 흉을 봐놓고 기사 수료식 날에는 누구보다 먼저 다가가 열정적으로진세한을 꼬시려고 하겠지.
“뭐··· 대백부단장님 말대로 본성이 있다면, 나중에 알아서 드러나겠지요.”
아직 시험이 시작한 지 고작 1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물론 열두시간에 걸친 긴 시험을 혼자서 다 볼만큼 시간의 여유는 없으나···
‘눈여겨보라고 혜린이한테 말해놔야겠네.’
이번 기수는 싹수가 좋다고 소문이 자자하게 났더니만, 확실히 탐나는 사람이 많으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지.
*
무려 12시간동안 지속된 시험이 끝나고, 대부분의 생도들은 모두 녹초가 된 채 바닥에 엎드려 헐떡거렸다. 개중에 가장 원활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생도는 역시 외부 참관인들에게도 TOP3로 꼽힌 진세한, 이유진, 김명한이었다.
“저······”
그러는 와중, 김세진이 가만히 양반다리를 틀고 앉아 목을 풀고 있는데 갑자기 생도 다섯 명이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모두 이름은 모르지만 얼굴은 기억한다. 함정에빠진 걸 구해줬었지.
“무슨 일?”
“···그··· 감사··· 하다고 말씀 드리려고···.”
남자 셋 여자 둘은 고개를 쭈뼛쭈뼛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김세진은 그런 그들을가만히 바라보다가,
“괜찮다.”
한 마디를 남기고 일어섰다.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자신의 흉을 보기는 했어도, 역시 생도들은 본성까지 꺼멓지는 않구나. 희미한 미소가 세진의 입가에 번져갔다.
“오. 아저씨 인기 많아졌네.”
그리고 그런 그에게 팔팔한 이유진과 다 죽어가는 고윤종이 다가왔다.
“빨리 가서 밥이나 먹읍시다.”
“···나는 밥 먹을 힘도 없는데···.”
“너는 남자가 왜 그렇게 맨날 지랄병이냐?”
진세한은 서로 티격태격-사실 일방적인 갈굼이었다-하는 두 사람과 함께 식당으로 발을 옮겼다.
*
그 이후로도 시험은 계속되었다. 3일차 몬스터 사냥법, 4일차 극기훈련, 5일차 역사재연 등등··· 생도들의 입장에서는 피말리는 시험 끝에 3일이라는 시간이 더 지났다.
그동안 무려 205명이었던 생도의 숫자가 75명으로 축약되었다. 순위표의 205위부터 76위까지 싹둑 잘려나간 것이다.
한편 진세한은 여전히 5점 이상의 차이로 압도적 1위를 고수했고, 이유진과 김명한은 서로 1점차 엎치락뒤치락하며 2위와 3위를 번갈아서 차지했다.
그렇게해서, 어느새 6일차.
이유진과 어느정도 친해진 김세진은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뭐 친해졌다기보다는 이유진이 일방적으로 경쟁의식을 느껴 일부러 다가오는 것 뿐이지만.
“···그럼 아저씨도 에덴 자원생인겁니까?”
그러는 와중에, 그는 이유진과의 공통점을 하나 찾아냈다. 바로 서로의 목적이 에덴이라는 것.
“그렇지.”
“흔치 않군요. 한 기수에 에덴 자원이 두명이나 있다니··· 허허, 참. 당신들 같은 사람이 있는 이상 꿈과 희망, 이상은 영원히 스러지지 않겠군요.”
김명한의 냉소적인 비아냥에 이유진이 이맛살을 사정없이 찌푸렸다.
“너는 그 입 좀 닥치면 안되겠냐. 아니, 그냥 꺼져.”
“하하. 사실을 말한 겁니다. 에덴에 지원하셨다가 재수생도라도 되시면 어쩌실려고들···.”
에덴은 ‘신념’이라는 이유로 다른 기사단 지망을 불허한다. 그렇기에 에덴에 자원했다가 탈락할 경우. 두번 다시는 에덴의 기사가 될 수 없다는 서러움에 더해, 꼼짝없이 재수생도가 되어 내년 2월까지 기다려야 한다.
“···후.. 아저씨 저 새끼는 그냥 무시 하고, 저희 선의의 경쟁 한번 해봅시다. 비록 순위는 내가 더 낮지만서도, 알죠? 마지막 시험이 제일 배점 높은거. 역전의 기회는 언제든지 있다고요.”
세진은 그저 미소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별 시덥잖은 대화를 하고 있는 와중에, 식당의 문이 열리더니 교관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김세진도 익히 알고 있던 인물, ‘김인수’였다. 과거 자신에게 깝치다가 제대로된 교육을 당했던 기사.
그는 그 얼굴을 본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아냈다. 볼이 토실토실 한 것이, 뭐 저렇게 살이 쪘대냐.
“안녕하신가 제군들. 나는 개벽기사단의 상급기사 김인수라고 한다.”
허나 늘어난 살과 비례한 듯, 그의 등급은 어느새 한단계 상승되어 있었다.
“이제 곧 6일차 시험을 시작하겠다. 6일차 시험은 바로 ‘참관 대련’. 자네들은 전국 기사단의 간부님들이 참관하는 대련장에서 대련을 하게 될 것이란다.”
순간 생도들이 긴장했다. 대련은 기사의 실전적 능력을 가장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지만, 당연히 그 상대에 따라 결과가 판이하게 나뉜다.
“대련은 총 두 종류가 있다. 먼저 생도들끼리 맞붙는 실전대련. 이 경우에는 순위표의 1위부터 우선 지목권이 있고, 1위에게 지목 당한 상대는 1위와 대련을 해야하니 자연스레 지목권을 상실하게 된다.”
생도들이 1, 2, 3위가 모인 이쪽 테이블의 눈치를 살살 살피기 시작했다.
허나 이유진은 오직 진세한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가 말했던 역전의 기회가 바로 지금이었으니.
“그리고 두 번째 대련은 ‘고수와의 대련’이다. 자네들의 실력을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아주 아름답고 귀한분이 직접 나오셨지.”
“···.”
잠깐.
그때 김세진은 뭔가 불길함을 느꼈다. 돌연 이틀 전, 유세정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이번에 나 중상급 된 기념으로 아버지가 시키는 일 하나 하기로 했어.
-내 문신 덕분에 중상급 된거면서··· 근데 무슨 일?
-..물론 오빠 덕분이긴 하지. 근데 어쨌든, 요즘 능력 좋은 신진기사들이 많이 매물로 나왔··· 아. 비밀. 오빠도 안 알려주니까 나도 비밀로 할거야.
그때는 그냥 별 생각없이 넘겼었는데···
“세계 최연소 중상급기사, 새벽 기사단의 ‘유세정’님이시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유명인의 출현에 생도들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 중에서도 진세한의 표정변화가 특히 진심이었다.
< 29. 에덴, 기사의 탑 (2)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