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에덴, 기사의 탑 (1) >
기사 아카데미를 졸업하자마자 시험에 임하는 생도는 많지만, 곧바로 합격하여 기사가 되는 생도는 드물다. 갓 졸업한 생도들은 일명 재수생도-N수생도라고 부르기도 한다-들에 비해 실력이 떨어져 대부분이 예선에서부터 탈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수의 생도들은 학교와 기사 아카데미를 졸업하고서도 사교육을 받거나 독학을 하여 짧게는 1년, 길게는 4년(이 이상은 가망이 없다고 여겨진다) 동안 실력을 기르며 계속해서 시험에 참가한다.
그러면서 깨달음-혹은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특성-을 얻으면 높은 성적으로 시험에 합격하여 칠흑, 새벽, 고려를 비롯한 명문기사단에 입단하게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기사를 포기하거나 지방의 중소기사단에서 하급~중하급 기사로서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그런 속사정이 있는 만큼 이 시험장의 연령대는 제각각이었다.
물론 정책상 1/3 이상은 방금 막 기사 아카데미를 졸업해 따끈따끈한 생도였지만, 나머지 2/3은 서로의 고됨과 힘듦을 공감할 수 있는 재수생도들이었다.
허나 그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이질적인 존재, 김세진은 홀로 앉아 그들의 대화를엿듣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생도들은 처음에는 기사 아카데미의 문턱도 밟지 못했으면서도 특성 빨로 예선을뚫어냈다며, 진세한을 열심히 물어뜯었으나 이내 관심을 끄고 저들끼리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다.
“모두, 주목!”
엿듣는 것도 지루해지려던 찰나. 때마침 주지혁이 다시 나타나서 본격적은 시작을 알렸다. 모든 생도들이 일어나 그의 입을 주목했다.
“일단 모두 사전에 나눴던 대로 50명씩 따라와라. 우리는 첫번째 평가가 있는 3층으로 간다.”
주지혁은 그렇게 말하며 생도들을 인솔했고, 어느새 나타난 세 명의 교관이 그 뒤를 따랐다.
*
1일차 첫번째 평가는 ‘측정’이었다.
최종예선을 통과한 생도들의 현재능력을 측정하여, 앞으로 중요하게 활용될 ‘순위표’를 작성하는 것. 이렇게 작성된 순위표는 어떤 생도가 탈락할지, 합격할지를 가리는 척도가 된다.
능력이 우월하다고 하여 실전에서도 만능일 수는 없겠지만, 아래에서 시작하는 것 보다는 위에서 시작하는 것이 나은 건 확실하기에 생도들이 측정에 임하는 자세는 당연 진지했다.
“신체능력, 마나능력 따위로 나눠서 측정했던 예선과는 다르다. 오늘은 실전적인능력을 측정한다.”
주지혁의 말을 들으며 김세진은 살짝 고민했다. 인간화를 취하였기에 늑대일때에비해서는 물론 나약하나, 그래도 신체적인 능력만을 따지면 아마 중상급 기사 정도와 준할 터.
헌데 바로 그 압도적인 강함에서 고민이 생긴다.
아무리 에덴의 기사가 되기 위해서라지만··· 게다가 에덴도 생도에게서는 현재능력보다(물론 현재능력도 여타 기사단 보다는 기준이 높다)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과 ‘재능’을 주로 보는데, 중상급은 너무 오바가 아닌가.
“자네들이 상대해야하는 몬스터다.”
그러는 사이 이미 평가는 시작되었고, 3층의 발코니에서 시험보조를 하던 마법사가 몬스터 한 마리를 소환했다.
-쿠웰!
하급 중에서는 보통과 어려움의 사이에 속하는 몬스터, ‘육중한 놀’이었다.
생도들은 긴장했지만, 김세진은 순간 진이 쫙 빠졌다.
자신은 정말 어린애들의 놀이터에 온거구나··· 새삼 실감이 되어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누구 먼저 하고싶은 사람 없나?”
주지혁이 웃으며 생도들을 떠봤다. 그리고 그의 말에 힘차게 반응한 여인이 있었으니.
“제가 하겠습니다!”
오렌지 브라운으로 염색한 강렬한 머리, 날카로운 눈매와 베일 듯한 콧잔등. 무언가 불만에 가득 찬 듯한 강한 인상, 그러나 그 마저도 매력으로 승화시킬 만큼의 아름다움 또한 동시에 지닌 여인이었다.
“이름은?”
“생도 이유진입니다.”
“오호···”
주지혁의 반응을 보니 그녀는 꽤나 유명한 유망주인 것 같았다.
“그래. 먼저 해보아라.”
이유진은 기다란 머리를 찰랑찰랑 흩날리며 단상 위로 힘차게 걸어 나갔다.
"딱히 시작구호는 없다. 알아서 잘 해보도록."
으르렁거리는 놀과 마주하게 된 그녀는 우선 주변을 배회하며 놈을 탐색했다.
그렇게 3분 정도 지났을까, 그녀는 드디어 검을 뽑아 들었다. 헌데 잘 벼려진 그녀의 진검은 김세진에게 상당히 익숙한 물건이었다.
‘···연습용 검이잖아?’
세진이 훈련용으로 만들었던 검. 그가 사사했던 기사들은 열에 여덟이 이 검을 탐내기에 마음껏 가져가라 했었는데··· 중고무기장터에서 팔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더니만, 그게 사실이었구나.
“흡!”
그때 이유진이 기합을 내지르며 놀에게로 쇄도했다.
“오?”
그녀의 검술은 김세진도 살짝 감탄할 정도로 상당히 변칙적이었다.
놀의 목 언저리로 향하던 검이 별안간 가슴으로 훅- 꺾이거나, 때로는 쥐는 방법을 달리하여 검을 역수로 꼬나쥔 채 놈의 발목을 베어내는 그 검술은, 정석과는 거리가 먼 파격(破格).
교본과는 거리가 멀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귀한 전투스타일임은 분명했다.
-꿰에엑.
이유진이 흘린 땀이 턱 끝에 고여 한 방울 떨어지는 그 순간, 가슴이 꿰뚫린 놀은 기이한 비명을 내지르며 절명했다.
“좋아좋아.”
주지혁은 그녀의 검술에 매료되어 감탄의 박수를 쳤다.
“훌륭했다. 자, 다음. 이제는 지원 없이 내가 이름을 호명하는 사람부터 하겠다.”
허나 그것도 잠시, 그는 교관으로서의 본분을 되찾고서 다음 참가자를 호명했다.
그렇게 한 스무 명 정도가 측정을 마쳤을까.
“다음. 진세한!”
어느새 진세한, 김세진의 차례가 다가왔다. 워낙 튀는 외모라 그런지 주지혁의 호명 한 번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김세진은 혹시라도 주지혁이 자신을 의심하지는 않을까 긴장하며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르릉.
그 즉시 육중한 놀이 반응했다. 물론 향기와 악취가 뒤얽힌 기묘한 냄새 때문이었다.
-그르르릉!
놈은 두 발로 바닥을 쾅쾅 내리치며 당장이라도 돌격할 기세를 풍겼다. 그리고 김세진은 천천히 고민했다. 어떻게 이겨야 하나.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마지막 필살기로? 아니면 이유진처럼 연신 압도하면서?
-쿠왈타왈왈타왈왈!
허나 그 고민은 상황상 오랫동안 이어질 수 없었다. 광분한 놀이 급히 쇄도하여 어느새 그의 지척까지 돌격해왔으니.
*
이유진은 흥미 깊은 눈빛으로 단상 위로 올라간 진세한이라는 노숙자를 바라보았다.
‘몸은 좋네.’
구렛나루와 이어진 기다란 턱수염은 거슬리지만 운동복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근육은 충분히 좋다. 아니 인정하기는 싫지만, 솔직히 말하면 기사들도 가지기 힘든 몸이다.
움직임을 방해할 정도로 너무 무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은 완벽한 균형, 이른바 ‘강체’.
‘육체랑 관련된 특성인가?’
노숙자가 저런 몸을 가지고 있다는 건 이해하기 힘들다. 게다가 무기도 없이 맨주먹인걸 보니 당연히 특성 덕분이겠지. 납득한 이유진이었지만, 그래도 그녀도 여자이기에 그의 넓고 탄탄한 등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오, 저 놀 왜 저러냐?”
인물에 중점을 두지 않고 상황 그 자체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던 그녀의 소꿉친구, 고윤종이 별안간 호들갑을 떨었다. 그에 이유진도 시선을 놀으로 옮겼다.
여태와는 다르게 놀도 저 노숙자를 싫어하는 건지 눈까지 충혈되어선 발광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흥미진진하네. 어떻게 대응할까?”
고윤종의 말에 이유진은 다시 진세한을 바라보았다.
“당황했구만 뭘.”
움찔거리는 뒷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딱 봐도 패닉이잖아. 저렇게 달려들 땐 어떻게 해야할 지 대책 자체를 모르는 거지. 왜냐? 그런건 특성이 가르쳐주지 않았거덩.”
그녀는 혀를 끌끌 차며 현 상황에 대한 해설을 늘어놓았다.
“이래서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특성만 믿다 보면 망해. 차라리···.”
“크랴압!”
투콰아아아앙-!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커다란 기합과 동시에 굉연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뒤이어 더욱 이해 못할 상황이 도래했다.
콰과과광-!
그저 단 한번의 정권 찌르기일 뿐인데, 놀의 신형이 가볍디 가벼운 깡통처럼 튕겨져나갔다.
스으으으-
어느새 저 멀리 벽면까지 내팽개쳐진 놀은 벽에 움푹 패인 자국을 남겼고, 놈이 쓸려나간 궤적에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
“···.”
단지 정권, 주먹만으로 일궈낸 위압적이고 압도적인 광경. 그에 공간을 가득 채우는 것은 오로지 적막이었다.
“···큼. 특성이네. 꽤 좋은 특성이네.”
마찬가지로 멍하니 바라보던 이유진은, 그러나 고윤종의 시선을 느끼고선 짐짓 태연자약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패닉이니 당황이니 뭐라뭐라 말하셨던 것 같은데."
"..뭐가. 당황한 건 사실이야. 근데 특성이 그걸 극복할 만큼 강력했던 것 뿐."
허나 그녀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은 비교적 솔직했을 따름이다.
*
실전능력의 측정 이후, 다음 평가를 기다리며 주린 배를 채우는 점심시간.
역시나 그는 이번에도 다른 생도들과는 동떨어진 채 혼자 앉아 밥을 퍼먹었다. 허나 처음처럼 서럽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니 왕따라고 기죽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오히려 안 귀찮고 좋네. 절대 자기합리화 아니고.
“진세한 씨?”
그런데 갑자기 등 뒤로 고운 미성이 들려왔다. 깜짝 놀란 그가 뒤로 돌아보자, 남녀 한 쌍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남선녀라는 별호로 기억해 뒀던··· 분명 이름이 이유진과 고윤종이었을 터다.
“여기 앉아도 되죠?”
별로 안될 건 없기에 김세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거 특성 무지 좋던데요. 대단하시네.”
옆자리에 앉은 유진은 곧바로 말을 걸어웠다. 말투가 무슨 호걸 마냥 시원시원하니 호탕했다.
“특성 묻는 거 실례야.”
그리고 그녀의 옆에 앉은 고윤종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자제시켰다. 뭔가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역전된 것 같은데···
“알고 있어. 근데 우리 같은 생도들 끼리, 아주 자그마한 힌트 하나만 주면 아주 감사할 것 같다, 이 말이지···.”
잠시 말을 멈춘 이유진은 식판에 담겨긴 밥의 1/4가량을 한번에 떠서 입으로 처넣었다. 상남자도 이런 상남자가 없다.
“꿀꺽. 어때요? 앞으로 팀플 분명 있을 건데, 알려주면 우리가 도와 줄게요.”
김세진은 당당 그 자체인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뭘 알고 싶은데?”
“오~ 수염처럼 시원시원 하시네. 그게, 정말 별 건 아닌데. 놀 한 번에 날려버린 펀치. 그거, 단발(單發)입니까 아니면 지속입니까?”
“···.”
이유진은 단발이길 바라는 눈치였기에,
“단발.”
세진은 그렇게 대답해주었다. 어차피 뭐 어떻게 말하든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
“오 다행··· 아니 다행이 아니라···”
“으음. 여기 다 있었군요?”
헌데 별안간 또 다른 사람이 다가왔다. 이번에는 검은 머리가 찰랑이는 수려한 미남자였다.
“···니가 왜 여길 와?”
아무래도 관계가 그리 좋지는 않았던 듯, 이유진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같은 생도끼리 무얼. 밥 한끼 할 수도 있는 거죠.”
허나 김명한은 능글맞은 미소로 넘기며 자리에 착석했다.
“어디, 진세한 씨라고 하셨지요? 저는 김명한이라고 합니다만, 방금 그 특성은 잘 봤습니다. 대단하시더군요. 저도 아주 깜짝 놀랐습니다.”
다소 정중한 어투였다. 그 속에 희미한 견제와 질투가 엿보이긴 했지만, 이 정도는 그에게 애교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가?”
“예. 그래서 그런데,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그 정권이 단발인지 아닌지만 알려주시면···.”
이 남자도 이유진과 똑같은 물음이었고, 대충 대답한 김세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각해보니 얘내 아직 기사도 못된 병아리들이잖아.
‘실제 사회에서 만났으면 나한테 말도 제대로 못 했겠지.’
맨날 김유린, 주지혁, 김유손, 이혜린, 유세정 등등의 거물급만 상대하다가 이런 햇병아리들을 만나게 되니··· 조금 적응이 되질 않는다.
‘..그래도 기 싸움 하는 건 되게 귀엽네.’
“야, 근데 내가 너랑 얼굴 보면서 밥을 먹어야겠냐?”
“안될 건 없지 않지요?”
불편한 표정으로 김명한을 날카롭게 쏘아보는 이유진과, 넉넉한 모습으로 여유롭게 받아치는 김명한.
“···밥 먹을 때는 서로 싸우지 마.”
그리고 그것을 말리는 고윤종까지.
지켜보고 있자니 재미는 있었다. 예로 말하길, 싸움도 죽과 밥 간의 싸움이 가장 재미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 29. 에덴, 기사의 탑 (1)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