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일상의 변화. (2) >
“···뭐?”
오후.
여느 때처럼 영웅오크인 채 김유린을 맞이한 세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제안을 받게 되었다.
“도움?”
오크의 표정변화는 요 근래 들어 가장 사실적이었다. 그만큼 김유린의 말이 상식의 선을 벗어났다는 뜻이겠지.
“···예. 강력한 몬스터입니다. 오크님께서 도와주시면 혹시라도 있을 인명피해를줄일 수 있고···.”
‘몬스터’에게 ‘몬스터’를 다구리치러 가자는 말을, 김유린은 아주 진지하게 늘어놓았다.
오크는 어안이 벙벙한 채 그녀의 이목구비를 찬찬히 살폈다. 그 어디에도 장난기가 엿보이는 구석은 없었다.
“게다가 오크님은 이 괴조의 천적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단 일격으로 가공할 만한 충격파를 만들어내는······”
“지금 나보고 사람과 함께 싸우라는 이야기인가?”
인간 김세진으로서도 어이가 없었다.
물론 자신이 나선다면 큰 전력이 될 지도 모르지만, 단체사냥-소위 말하는 ‘레이드’-는 합 하나하나에 목숨줄이 달라질 정도로 팀워크가 중요하다. 헌데 그 자리에 몬스터가 낀다? 기사들은 물론 민중들까지 나서서 만류할 것이다.
오크가 말한다고 해서 정말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는건지, 아니면 철이 없는 건지.오크는 약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물론 오크님의 걱정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집어치워라. 그딴 헛소리나 늘어놓을 거면 썩 꺼져.”
김유린의 말이 다 이어지기도 전에, 오크는 냉정하게 끊어냈다.
“예, 예?”
오크는 싸움을 좋아하고, 영웅오크는 인간을 도우며, 자신은 그와 어느정도는 친하다. 그런 이유들로 영웅오크를 찾아왔던 김유린은 차가운 거절이 당황스러웠다.
“몇 번 어울려주니까 정신이 나가기라도 했나? 썩 꺼지라고 말했다.”
그녀는 무어라 대답하려 했지만 오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서 자리를 떠나버렸고, 유린은 그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오크의 시리도록 냉담한 태도에, 그녀는 특성을 지닌 누군가의 말마따나 ‘호감도가 하락했습니다’는 문자가 홀로그램으로 떠오르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
한국에 아주 오랜만에 등장한 보스몬스터는 자연스레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칠흑기사단이 공표한 공략날짜는 넉넉하게 7월 25일. 그때까지, 여러 방송국은이 커다란 이벤트를 위해 앞다투어 발을 움직였다.
그들은 우선 공략에 참여하게 된 10인의 기사들의 인터뷰를 차례대로 땄다. 먼저이혜린을 시작으로 송민유, 주하영, 김유린을 비롯한 상급과 고위기사들. 그리고···.
“예. 저희 길드에서 포션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김세진까지. 그는 자신도 왜 자신이 인터뷰를 해야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으나, 이 PD는 과거 자신과 연이 깊었던 인물이기에 아무 말 않고 인터뷰에 응했다.
“포션 뿐만이 아니라고 들었는데요? 이혜린 기사에게 특이한 걸 하나 빌려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예. 같은 길드원의 부탁으로 그리핀을 빌려주었죠.“
사흘 전, 칠흑기사단에서는 공략을 위해 그리핀을 빌릴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처음에는 의아했던 세진이었으나 이내 이혜린의 연락을 받고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예전부터 스케쥴이 없는 날이면 그리핀을 줄곧 타고 다녀, 주지혁의 ‘그리핀 라이더’라는 별명을 빼앗아갔을 정도로 그리핀을 좋아하고 잘 다뤘으니, 충분히 활용가치가 존재한다.
참고로 빌려주는 그리핀은 머핀이가 아니라 머핀이의 아들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6개월 전 머핀이는 자신보다 조금 많이 연하인 그리핀과 결혼(?)을 했고, 그렇게 낳은 자식만 무려 13명이나 된다.
성욕이 유달리 심한 머핀이 탓에 배우자는 날이 갈수록 말라갔지만, 어쨌든.
김세진은 13명의 자식 중 이혜린과 특히 친한 수컷 놈을 빌려주기로 했다.
“역시 대단하시군요. 헌데, 요즘 그 일로 새벽기사단과 칠흑기사단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는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묘한 기류요?”
“예. 아무래도 길드장님은 새벽과 많이 친밀하셨잖습니까? 근데 이번에 있는 단체 사냥, 일명 ‘레이드’에 많은 지원을 해주시는 것을 두고 칠흑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뭐 이런 말이 많더군요.”
PD는 길드의 영향력을 염두에 두고 조심스레 말했다.
사실 PD가 이런 질문을 꺼내는 것 자체가 ‘더 몬스터’의 규모가 상상 이상으로 커져버렸다는 방증이었다. 보통 단체의 경우에는 단체가 기사단이나 마탑의 눈치를 보는데, 더 몬스터는 오히려 그 반대로 기사단과 마탑이 혹시라도 미운털이 박힐까 벌벌 떨 정도이니.
“그냥 뭐··· 다 같이 힘을 합쳤으면 좋겠어요. 저는 둘다 좋거든요.”
그 사실을 어느정도는 알고 있던 세진은 최대한 모호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제 인터뷰는 이만하죠? 다음 약속이 있어서.”
세진은 PD의 다음 질문을 끊어내었다.
오늘은 7월 14일, 중요한 약속이 잡힌 날이다.
“아, 예. 인터뷰 감사했습니다.”
아직 질문은 많이 남았으나 PD와 스태프들은 빠릿하게 일어나 세진에게 악수를 청했다. 예전에 비해 상당히 달라진 태도였고, 세진은 만족스레 그의 손을 잡았다.
*
고작 한 번 방영되는 특집 프로그램이 시청률을 30%를 넘겼을 정도로 세간의 이목이 집중 된 레이드가 행해지는, 격전의 날.
10인의 기사. 그리고 기사단에게 고용된 4인의 마법사는 많은 인파들의 환영과 격려를 받으며, 심지어 '리무진'을 타고 괴조가 똬리를 틀고 있는 장소로 바삐 향했다.
그렇게 영주의 초입에 도착한 기사들은 우선 차에서 내려, 두 다리로 황폐화된 영주 시내를 걸어 괴조의 둥지로 향했다.
“저기 있다!”
이혜린이 크게 소리쳤다.
수많은 몬스터를 도륙하며 걷고 걸어 마침내, 그들은 저 멀리 보이는 검은 닭의 형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근데··· 예상보다 크네?”
헌데 놈을 보고 있자니 뭔가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회의 때 보고 들은 것 보다놈의 몸체가 훨씬 거대한 것만 같은···.
“성장을 했겠지. 그리고 혜린아 지금은 전장인 걸 인지해라.”
“···저도 나름 열심히 하고 있는데요.”
“그래. 열심히 그리핀이랑 놀고 있지.”
“그만. 우선, 마법사 분들? 놈의 공격거리와 인지거리는 상당히 긴 걸로 추정됩니다.”
고위기사 송민유와 상급기사 이혜린 간의 때아닌 말다툼을 종식시키고서, 김유린은 재빨리 브리핑을 시작했다.
“그러니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철저히 몸을 숨긴 채 마법을 사용해주세요.”
마법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사들은 연습해왔던대로, 합 맞춰왔던 대로 갑니다.”
“”
“예.”””
기사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오직 한 명, 그리핀의 갈기를 매만지며 여전히 뚱해있는 이혜린만 빼고.
“이혜린?”
“아, 예. 예!”
“···잘할 수 있지? 네 목표는 눈이다.”
수익의 일부분을 양보하면서까지 그리핀을 모셔온(?) 이유는 급소의 공략을 위해서다. 오우거를 두개 이어 붙인 것보다 거대한 놈이니 만큼, 머리에 위치한 급소는 검격이나 마법으로는 타격이 힘들 테니.
“그럼요. 맡겨만 주세요.”
이혜린이 시원스레 대답하자 그리핀도 날개를 힘차게 후드덕- 털었다.
“···그래. 이제 모두, 포션을 복용합시다.”
김유린은 그렇게 말하며 ‘고블린의 용기’를 꺼냈다.
이 주홍빛 액체는 신체강화 부문에서 단연 1등인 포션으로, 고블린 연금술사가 제조한 포션 중에서는 회복 포션 다음으로 최고급 취급을 받고있다. 어느정도냐면 고블린 시리즈 중에서도 특히 귀해 없어서 못사는 정도.
“귀하다고 남기지 말고 다 복용하세요. 남은 건 전량 회수합니다.”
그에 몇몇 기사들은 노골적으로 아쉬워하면서도 기어코 포션을 다 들이마셨다. 물론 이혜린을 제외하고. 그녀는 포션을 그리핀과 나눠 마셨다.
“갑시다.”
포션의 효과는 역시 명불허전. 포션을 들이킨 모든 기사들은 체내의 활력이 거세게 분류하는 것을 느꼈다.
“오케이!”
“가자!”
“일단 제가 먼저 갈게요!”
-끼에에에엑--!!
합을 맞춘 대로, 먼저 이혜린을 태운 그리핀이 괴성을 내지르며 하늘로 활공한다.그리고 그 갑작스런 등장에 괴조의 시선이 그리핀에게로 향하는 틈을 타 기사들이 돌격한다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괴조의 몸에서 촉수가 뿜어져 나왔지만, 이혜린과 그리핀은 가볍게 회피해내고서 예리한 장도를 휘둘렀다.
굳이 가까이 갈 필요도 없었다. 무기에 부과된 ‘굴절’이라는 성질이 장도의 사거리를 극대화 시켜주었으니.
샤악-
이혜린이 휘두른 검은 허공에 푸른 궤적을 새기며 괴조의 눈으로 굴절되며 쏘아졌다. 뒤이어 괴조의 고통스런 신음이 크게 울려퍼졌다.
“야호~!”
전투 시작 30초. 소기의 목표를 달성한 그녀가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기사들은 승리를 장담한 미소를 지으며 괴조를 향해 도약했다.
*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 했던가.
전투가 시작되고서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놈의 눈을 빼앗았건만, 그 이후의 전황은 오히려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놈의 압도적인 크기가 문제였다. 물론 몸체가 클수록 촉수가 많다는 걸 감안하긴 했으나, 이 정도일 줄 몰랐다.
아니, 이것은 결코 촉수의 숫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분명 일본 쪽에서는 3명의 고위기사가 사태를 종결냈다고 전해들었다. 그러나 이 쪽은 무려 4명의 고위기사와 6명의 상급기사, 거기에 더해 4명의 B등급 마법사까지 있음에도....
“큭!”
그러나 이 상황에서 몬스터의 강함에 의문을 품는 것은 사치일 뿐이었다.
촉수는 마치 해일처럼, 찰나의 쉴 세도 없이 밀려들었다. 눈이 약점이라는 생각은착각에 불과했던 듯, 놈은 눈을 잃고서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요격해왔다.
'도대체..!'
이미 베어 넘긴 숫자만 해도 일 만은 가벼이 넘겼다. 허나 아무리 베어도 베어도 이 빌어먹을 촉수는 끝이 없었다.
하늘을 가득 메우며 쏟아져내리는 촉수에 사각이란 없었고, 따라서 반격의 기회도 전무했다. 게다가 이 촉수는 마나를 갉아먹으며 몸에 두른 '마나강기'를 손상시키기 까지 해, 섣부른 돌격도 불가능했다.
'근데 마나강기를 먹는다는 내용은 없었잖아!'
김유린은 검격으로 촉수를 베어내며 이를 깨물었다.
처음에는 그저 우습게 생각했었다. 촉수 또한 저 놈의 일부이기에, 촉수에 ‘특성’을 활용하면 손쉽게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허나 모두 착각이었다.
촉수는 괴조의 일부가 아닌, 독립적인 생명체였다. 분명히 ‘짧게나마 기절한다’는목적성을 담아 검을 내질렀음에도 정작 본체는 끄떡도 하지 않는 것이 그 증거.
아마 저 촉수들은 놈의 몸에 들러붙어서 상생하는 기생충, 뭐 그런 것이겠지.
“···씹!”
그녀가 거칠게 휘두른 검은 반월형의 검기가 되어 수 많은 촉수를 산화시켰으나, 그럼에도 촉수는 끝이 없었다.
“모두, 후퇴한다!”
김유린이 소리쳤다. 촉수 사이사이를 비집고 퍼진 외침은 모든 기사들에게 전달되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에게는 후퇴를 할 여유가 없었다. 수만의 촉수를 쳐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으니.
그리고 김유린도 그 이상의 명령을 내릴 수는 없었다.
꼬오오오오오오--!!!!
순간 정신을 아찔하게 만드는 계명성이 하늘 드높이 울려퍼졌기 때문이다.
“..끄읏!”
김유린은 촉수에게 찰나의 빈틈을 잡아 뜯겼다. 허나 피가 철철 흐르는 어깨를 대충 마나로 봉합을 하고 다시금 검을 휘두른다.
포기는 하지 않았으나 상황은 명백했다.
전황은 불리하고, 도주도 불가능한 최악의 상황.
짙은 패색 속에서 기사들의 마음속에서 좌절이라는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르던 때.
-──!
어디선가 거칠고 굳센 포효가 들려왔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함성, 유린에게는 그것이 그저 구원의 외침처럼 느껴졌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북동쪽에서 굽이치며 터져나온 거대한 충격파가 하늘을 메운 촉수를분쇄하며 괴조의 본체로 향했다-끼엑!
직격이었다. 괴조는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촉수를 잠시 거둬들였고, 기사들에게는 천금같은 여유가 생겼다.
“···하아.”
기사들은 모두 숨을 고르며 충격파가 터져나온 산등성이를 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들은 말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
하나도, 둘도 아닌 수 십의 오크들이 거센 흙먼지를 일으키며 이쪽으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아.."
그리고 그 중에서 특히 특출난 용맹의 내뿜는 영웅오크의 모습에, 김유린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참으로 멋진 자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