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경과 (2) >
김세진은 오크의 부락지에서 김유린과 대련도 하고, 함께 오크도 돌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크는 강함에 이끌리기 때문일까. 그녀는 참 매력적인 여인이어서, 시간을 가는 것도 몰라 헤어지고 나니 이미 늦은 밤이 되어 있었다.
“좋다 좋아···.”
구름 한 점이 없는 어두운 하늘, 높게 뜬 보름달의 투명한 달빛이 지상을 적신다.
세진은 달에서 내리는 황홀을 음미하며 발을 움직였다. 패이는 자국자국마다 달빛이 깊게 남았다.
“······.”
그렇게 멍하니 걷다 보니 어느새 저택 현관이었다. 불빛이 꺼진 넓은 저택의 주변으로는 망연한 쓸쓸함이 감도는 것 같았다.
그는 문고리를 잡고서 천천히 밀었다.
끼익-
차가운 소리 너머 휑한 거실이 보인다. 어둠 속에서 보니 새삼, 참 쓸데없이 넓구나 싶었다.
탁-
문을 닫으니 인기척이 살짝 일었다. 거실의 소파 쪽이었다. 자는 척인지, 아니면 방금 깬 건지. 김세진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자냐?”
유세정은 소파에 얼굴을 처박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심장박동이 점점 거세지는 걸로 봐선 자는 척이 확실하다만, 늦어서 삐쳤나?
“..흠.”
그러나 세진은 냉정하게 제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굳이 농간에 놀아주고 싶지는 않···.
“으음··· 오빠 왔어요?”
그와 동시에 유세정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다. 그녀는 방금 막 깨어난 듯 일부러 게슴츠레 눈을 뜨고서, 세진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자고 있었어?”
“응. 분명 다섯시까지 온다고 했던 남자가 지금.. 새벽 1시까지 안 왔거든.”
“···.”
그는 소파에 앉아 유세정의 머릿결을 훑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내리쬐는 달빛을 조명으로 삼았기 때문일까, 그녀는 오늘따라 특히 더 예뻐 보였다. 게다가 묘한 색기마저도 느껴졌다. 반쯤 풀린 눈, 발그레한 홍조, 그리고 무엇보다 자극적인 옷차림. 그녀는 얇은 원피스형 잠옷을 하나 입고 있었는데, 몸을 비틀 때마다 예상보다 풍만한 가슴골이 힐끗힐끗 보였다.
“···왜 이렇게 늦었어? 일찍 온다면서.”
여전히 어두운 거실에서, 그녀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할 일이 있어서 조금 늦어버렸네.”
“조금이 아니라 ‘많이’. 말은 똑바로 해야지.”
“···.”
유세정은 투덜대며 그의 손을 깍지까지 끼고서 꽉 쥐었다. 미안한 마음에 세진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고, 그녀는 연신 그 손을 꼼지락꼼지락 만져댔다.
“근데 오빠 있잖아. 그거 알아? 우리 처음 만나고서 벌써 2년 넘었다?”
그러다 돌연 생각난 듯 흘러가듯 말한다.
“그렇게 오래 지났나?”
“내가 고2 초봄 때 오빠 만났는데, 지금은 스무 살 됐으니까 충분하지.”
곰곰이 생각하던 세진은 갑자기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예전에 너 싸가지 없었지. 처음엔 기대하다가 내가 사냥꾼이라 소개하니까 표정 확 일그러지고···.”
“무, 무슨··· 그, 그랬을 때도 분명 있었지만 그때는 철이 없었잖아. 지금은 많이 다르···지 않나? 나, 어디가서 성격 바뀌었단 얘기 진짜 많이 듣는데, 그거 다 오빠 때문이거든.”
“지금? 흠···.”
그는 일부러 고민하는 척했고, 유세정은 놀리지 말라며 난리를 피웠다.
"뭐야. 오빠한테 내 첫인상은 그냥 싸가지 없는 여자였어?"
"아니. 싸가지 없는 부잣집 여자."
"...하."
그렇게 때아닌 한 마디로부터 추억이라는 꽃이 알음알음 피워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같이 사냥을 했던 날, 김세진이 자신의 정체를 밝혔던 순간 등등···
대화 속에서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이제는 ‘유세정의 성인식’ 차례였다.
“그리고 그때, 오빠가 나 덮치려고 했을 때 말이야.”
“음? 아 그때는..”
“내 말 들어봐. 그때, 내가 오빠가 진심으로 날 좋아하게 될 때 까지 기다린다고 말하고 떠났잖아··· 바보 병신 천치마냥.”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무엇인가 작정을 한 듯, 침까지 꿀꺽 삼키고서 그의 옆으로 바싹 붙었다.
“바로 당일 밤에는 나 멋진거 아냐? 이러면서 도취했었는데··· 바로 다음 주 부터계속 후회했어. 밤마다 떠올라서 후회하고, 또 이불차고, 또 후회하고···. 오빠도 알잖아, 나 오빠 무지 좋아하는거. 그때가 절호의 기회였는데 내가 걷어찼다고 생각하니까 도저히 견딜 수가 없더라고."
다소 이상해진 분위기에 김세진은 애꿎은 볼을 긁적였고, 유세정은 심호흡을 크게 한번 했다.
"그러니까 단도 진입적으로 말할게. 나 이제는 정말 더 이상 못 기다릴 것 같은데, 오빠가 어떻게 좀 도와주면 안 돼?”
“···.”
“나 있잖아, 과장 조금 보태서 일주일에 일곱 번 김세진이 나오는 꿈을 꿔. 거기서 김세진이 나를 싫어하면 악몽이고, 나를 좋아해주면 단잠이야.”
담담한 고백을 들으면서도 김세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떨리는 목소리에 담겨있는 애틋함이 피부로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빠가 여자랑 만나다고 하면, 내색은 안하지만 그날 너무 힘들어. 잠이 안오고, 자도 악몽을 꾸거든.”
유세정은 그를 바라보며, 제 동요를 숨기기 위해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우리··· 천천히 시작해보면 안될까? 그··· 혜린 언니한테 들어보니까 사귀면서 좋아지는 경우도 많대.”
지금 그와 눈을 마주하는 그녀의 심장은 미칠듯이 뛰고 있었다.
"오빠는 아직이더라도, 내가 더······ 노력할게. 솔직히··· 나만한 여자 어디 없는 것도 사실이잖아. 안 그래···?"
그녀는 이번 기회에 꼭 하려고 작정했던 말을, 조심스럽지만 확실하게 전했다.
허나 김세진은 침묵했고, 유세정은 거절당할까 하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응. 분명 다섯시까지 온다고 했던 남자가 지금.. 새벽 1시까지 안 왔거든.”
“···.”
그는 소파에 앉아 유세정의 머릿결을 훑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내리쬐는 달빛을 조명으로 삼았기 때문일까, 그녀는 오늘따라 특히 더 예뻐 보였다. 게다가 묘한 색기마저도 느껴졌다. 반쯤 풀린 눈, 발그레한 홍조, 그리고 무엇보다 자극적인 옷차림. 그녀는 얇은 원피스형 잠옷을 하나 입고 있었는데, 몸을 비틀 때마다 예상보다 풍만한 가슴골이 힐끗힐끗 보였다.
“···왜 이렇게 늦었어? 일찍 온다면서.”
여전히 어두운 거실에서, 그녀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할 일이 있어서 조금 늦어버렸네.”
“조금이 아니라 ‘많이’. 말은 똑바로 해야지.”
“···.”
유세정은 투덜대며 그의 손을 깍지까지 끼고서 꽉 쥐었다. 미안한 마음에 세진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고, 그녀는 연신 그 손을 꼼지락꼼지락 만져댔다.
“근데 오빠 있잖아. 그거 알아? 우리 처음 만나고서 벌써 2년 넘었다?”
그러다 돌연 생각난 듯 흘러가듯 말한다.
“그렇게 오래 지났나?”
“내가 고2 초봄 때 오빠 만났는데, 지금은 스무 살 됐으니까 충분하지.”
곰곰이 생각하던 세진은 갑자기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예전에 너 싸가지 없었지. 처음엔 기대하다가 내가 사냥꾼이라 소개하니까 표정 확 일그러지고···.”
“무, 무슨··· 그, 그랬을 때도 분명 있었지만 그때는 철이 없었잖아. 지금은 많이 다르···지 않나? 나, 어디가서 성격 바뀌었단 얘기 진짜 많이 듣는데, 그거 다 오빠 때문이거든.”
“지금? 흠···.”
그는 일부러 고민하는 척했고, 유세정은 놀리지 말라며 난리를 피웠다.
"뭐야. 오빠한테 내 첫인상은 그냥 싸가지 없는 여자였어?"
"아니. 싸가지 없는 부잣집 여자."
"...하."
그렇게 때아닌 한 마디로부터 추억이라는 꽃이 알음알음 피워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같이 사냥을 했던 날, 김세진이 자신의 정체를 밝혔던 순간 등등···
대화 속에서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이제는 ‘유세정의 성인식’ 차례였다.
“그리고 그때, 오빠가 나 덮치려고 했을 때 말이야.”
“음? 아 그때는..”
“내 말 들어봐. 그때, 내가 오빠가 진심으로 날 좋아하게 될 때 까지 기다린다고 말하고 떠났잖아··· 바보 병신 천치마냥.”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무엇인가 작정을 한 듯, 침까지 꿀꺽 삼키고서 그의 옆으로 바싹 붙었다.
“바로 당일 밤에는 나 멋진거 아냐? 이러면서 도취했었는데··· 바로 다음 주 부터계속 후회했어. 밤마다 떠올라서 후회하고, 또 이불차고, 또 후회하고···. 오빠도 알잖아, 나 오빠 무지 좋아하는거. 그때가 절호의 기회였는데 내가 걷어찼다고 생각하니까 도저히 견딜 수가 없더라고."
다소 이상해진 분위기에 김세진은 애꿎은 볼을 긁적였고, 유세정은 심호흡을 크게 한번 했다.
"그러니까 단도 진입적으로 말할게. 나 이제는 정말 더 이상 못 기다릴 것 같은데, 오빠가 어떻게 좀 도와주면 안 돼?”
“···.”
“나 있잖아, 과장 조금 보태서 일주일에 일곱 번 김세진이 나오는 꿈을 꿔. 거기서 김세진이 나를 싫어하면 악몽이고, 나를 좋아해주면 단잠이야.”
담담한 고백을 들으면서도 김세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떨리는 목소리에 담겨있는 애틋함이 피부로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빠가 여자랑 만나다고 하면, 내색은 안하지만 그날 너무 힘들어. 잠이 안오고, 자도 악몽을 꾸거든.”
유세정은 그를 바라보며, 제 동요를 숨기기 위해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우리··· 천천히 시작해보면 안될까? 그··· 혜린 언니한테 들어보니까 사귀면서 좋아지는 경우도 많대.”
지금 그와 눈을 마주하는 그녀의 심장은 미칠듯이 뛰고 있었다.
"오빠는 아직이더라도, 내가 더······ 노력할게. 솔직히··· 나만한 여자 어디 없는 것도 사실이잖아. 안 그래···?"
그녀는 이번 기회에 꼭 하려고 작정했던 말을, 조심스럽지만 확실하게 전했다.
허나 김세진은 침묵했고, 유세정은 거절당할까 하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무거운 달빛과 동시에 짙은 적막이 가라앉았다.
그렇게 5분이 지나고 10분이 흘렀다.
그 침묵을 견뎌내지 못한 유세정이 결국 먼저 될대로 되라- 싶은 마음을 담아, 다소 저돌적으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그의 뒷목을 감싸고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일단 뒤는 생각하지 않고 일을 벌였지만, 떨리는 입술은 혹시라도 있을 거절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김세진은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주었고, 그녀는 용기를 내어 열려진 잇새로 설육을 슬며시 집어넣었다.
촉촉하게 서로를 적시며, 두 설육이 뒤얽혀갔다.
연애를 글로만 배운 유세정보다는 김세진이 훨씬 능숙하게 혀를 움직였다. 물론 그도 경험은 없었지만, 쾌락에 도가 튼 라이칸슬로프의 본능에 모든 걸 맡겼다.
그는 입을 맞추며 그녀의 실크 잠옷을 매만졌다. 얇기 때문일까, 살갗의 결과 몸의 굴곡이 여실히 느껴졌다. 과연 여기사 다운 탄탄하고 매끄러운 육체였다.
“하아···.”
그녀는 달뜬 호흡을 내쉬며 몸을 적극적으로 비틀었다. 그가 더 쉽게 자신을 만질수 있도록. 그렇게, 어느새 잠옷을 매만지던 그의 손은 그녀의 살결을 파고들게 되었다.
"···후웃."
그가 자신을 탐할수록, 그녀는 더욱 그에게 달라붙었다. 그의 귓가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으며, 조금이라도 더 흥분을 돋군다.
그리고 그 의도는 성공했는지, 어느 순간부터 세진의 움직임이 상당히 격렬해졌다. 얇은 잠옷은 벗겨지는 것이 아닌 찢겨졌고, 그는 마치 정복이라도 하듯 그녀의 나신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갔다.
"···아읏!"
마치 짐승처럼 깨무는 탓에 통증은 심했으나 그녀는 꿋꿋이 참았다. 그러나 그 통증도 잠시 뿐이었다. 달아오른 몸은 고통이 머물던 자리를 점점 쾌락으로 대신해갔다.
달이 높이 뜬 새벽 두 시, 사람이 가장 센치해진다는 시간대.
거실의 소파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채우기 위한 야릇한 열기와 타액으로 젖어들었다.
*
눈을 떴다. 아니, 눈이 뜨였다. 자꾸 품 속에서 꼬물꼬물 거리는 한 여인이 잠을 깨웠다.
“···.”
창밖을 보니 여전히 세상은 어두웠다.
김세진은 제 품에 꼭 안겨있는 나체의 여인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젯밤의 기억은 흐릿하지만 감각만큼은 진하게 남아있다. 결국 욕망이 이성을 이겨버렸다.
‘뭐···.’
그러나 후회의 감정은 빠르게 털어버렸다. 어차피 일은 벌어졌다. 물론 일을 벌인데에는 보름달의 영향도 크겠지만, 한 지붕 아래 머물게 되면서 이런 걸 아예 예상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으니 자처한 감도 없지않아 있다.
그리고 세정이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여자이지 않은가. 예쁘고 능력좋고, 무엇보다 배경이 우리나라 최고 수준이니까.
‘..근데 얘 표정이 왜이래?’
김세진이 설핏한 미소를 지었다.
깊은 행복이 묻어나오는 유세정의 얼굴이 인상깊었다. 분명 자고 있는 것이 확실함에도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고, 연신 흐응 흐응- 하는 콧노래같은 숨소리가 퍼져 나온다. 무슨 좋은 꿈이라도 꾸는 건지···.
그 모습이 괜히 자극적이어서, 세진은 그녀를 제 품 안으로 꽉 끌어안았다. 허나 살결이 맞닿는 뭉클한 감촉이 본능이 직접적으로 건드렸다.
유세정은 아직 자고 있고, 분명 어제가 처음이어서 힘들겠지만··· 그래도 이토록 행복해하고 있으니 한 번 더는 괜찮지 않을까.
그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하반신을 살짝살짝 비틀었다.
2차전의 시작이었다.
···참고로 행위의 도중에 잠에서 깨어난 유세정은 무지 당황하며 그의 등을 거세게 긁어댔다
*
그로부터 3주가 흘렀다.
3주동안, 세진은 신혼부부가 어떻게 사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매일 함께 밥을 먹고 거의 매일 시도때도 없이 사랑을 나눈다. 제약이 사라진 세진은 문자 그대로 시도때도 없이 달려들었다. 하루에 몇 번인지 세는 것도 어느순간 부터는 그만두었을 정도로.
그는 본능이 치밀때마다 마치 짐승처럼 격렬하게 그녀를 원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3주간의 때아닌 신혼생활은 '연인'이라는 자그마한 관계를 남긴 채 끝났고, 김세진은 아쉬워하는 유세정을 뒤로하고서 집으로 컴백했다.
한편. 아무리 뜨겁게 끓었던 주제라도 식는 데는 3주면 충분했다. 김세진에 관한 이야기는 어느순간 점점 자취를 감춰갔고, 때를 노려 세진은 폭탄을 터트렸다.
[몬스터재해관리부 장관 김한설, 정재계 비리 의혹···]
[3선의원 김요한, 선거자금불법···]
김한설과 그 배후 재벌, 의원들의 정보가 폭로되었다. 그렇게 거센 역풍은 아주 천천히 시작되었다.
-제가 걸어온 인생을 걸고, 언론의 기사는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김한설과 그 배후들은 예상대로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필사적인 부정. 아직 정보의 일부분만을 터트렸기에, 저들은 저들 나름대로 '분명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고 생각하여 저러는 것이겠지. 물론 그럴수록 더욱 진창으로 가라앉을 뿐이지만.
“유백송 씨. 기사 보셨죠?”
-···.
유백송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간 자신이 따라왔던 상관에 대한 예우라는 것일까.
“대답을 안하시면 곤란한데. 당신 때문에 사건을 터트린 거니까.”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나는···.
“자세한 건 나중에 만나서 얘기하고 싶네요. 저도 바빠서. 언제 시간돼요?”
-어? 나 요즘 바빠서···.
“7월 14일 스케쥴 없죠? 그때 만나요.”
수화기 너머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특수경찰국 내부에는 이미 꽤 많은 정보원과 해킹프로그램이 잠입하여 있으니, 이 정도 알아내는 건 누워서 떡 먹기였다.
-아니, 그, 그게···.
“아. 또 전화왔다. 잠깐만요 나중에 다시 전화 걸게요.”
그는 액정화면에 찍힌 이름을 확인하고서 부랴부랴 통화 상대를 바꿨다.
-오, 김세진 씨. 다행히도 받으시는구려. 나 김한설인데, 3주 전에 중대발표 잘 봤다네. 참으로 환상적이었어.
김한설의 전화였다. 그의 목소리는 제 치부가 드러난 것치고는 다소 태연했다.
“···예. 감사합니다.”
김세진도 최대한의 평정을 유지했다.
-허허. 그래서 그런데, 취소된 만남약속을 다시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때는 불미스러운 일이 막 터진 터라 어쩔 수 없었잖나. 내 자네를 위해 여러 선물을 준비해 두었다네.
김세진은 침묵을 했다.
김한설에게서 느껴지던 ‘중립’은 바로 이런 부류였구나. 자신의 야망을 위해 냉정하게 줄을 타는 것.
-큼. 이건 비밀인데, 사실 나는 자네가 왜 탈세 사건에 연루되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네. 누군가의 의도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수면 위로 드러날 만한 사건이 아니었거든. 그래서 내 측근을 꾸려 조사를 해봤지.
그래서 언제든지 때가 되면 동료를 팔아 넘긴다. 김한설은 아마 본능적으로 느꼈을 테지. 지금이 바로 배를 갈아탈 때라는 것을.
“···그렇습니까?”
-그래. 확실히 정치공작이었더군. 내가 그 배후를 알아냈으니 약속된 날에 함께 만나서······.
김세진은 그의 담담한 애걸을 한 귀로 흘리며 차가운 조소를 머금었다.
김한설이 작금의 위치로 올라가는 동안, 이렇게 팔려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렇게 먼지만큼 남아있던 동정도 바스러졌다. 그는 대충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딩동댕.
전화를 끊자마자 벨소리가 들려왔다.
벌컥-
그가 누군지 묻기도 전에 문이 열리더니, 유세정이 총총걸음으로 들어왔다.
“김세진 씨? 당신 애인이 여기 왔어요~”
“···하.”
쟤는 스캔들을 내려고 작정을 했나. 김세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
뱀파이어들의 제왕, 로드가 깨어나 시간에 여유를 둘 수 없게 되었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로드를 대신하여 차기 권좌를 거머쥘 제왕을 정해야 하고, 그보다 앞서 몬스터 필드에 생긴 세 개의 사균열을 연결시켜야 했으니.
결국 발등에 불이 떨어진 바토리는 흔치 않은 일을 벌여야만 했다. 바로 뱀파이어가문 '멜 아스'의 수장, 꼬맹이 '트시로넨'과 힘을 합치기로 한 것.
"아가야, 어차피 네가 자라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잖니. 그러니까 우리 함께 힘을 합치되, 로드의 자리는···"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구요. 일단 수장으로서 저희는 대등한 관계이니까요."
바토리가 이를 까득 깨물었다. 이 쪼꼬맹이가 진짜..
"우선, 그쪽은 인조심장이 없어서 통로를 연결시키지도 못하시지요? 로드가 예정한 날은 이미 다가오고 있는데 말이에요."
"..꼭 그렇다고 볼 순 없잖니?"
"그럼 저희 도움이 필요 없다는 말이시지요?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가만히 있으렴. 일단 이야기나 들어보자꾸나."
창백하리만치 새하얀의 피부와 머리, 그러나 그 순백에 극명히 대비되는 새빨간 눈. 같은 뱀파이어가 보기에도 소름돋는 외면의 트시로넨은 바토리를 앞에 두고도 당당함을 유지했다.
"일단, 노스페라투 쪽은 의심쩍으니 우리 함께 힘을 합쳐요. 그래서 통로를 열고,로드 의 다음 명령을 기다려요. 다행히도 로드는 6개월 정도 더 연명하실 수 있으시니까요. 나머지는 모두 끝내고서 정해요."
바토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린 놈이 권좌에의 욕망이 있는건지, 영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후."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 빌어먹을 만큼 무능한 부하들이 일을 그르쳤기에, 한시적으로나마 조력자가 꼭 필요했으니.
게다가 어차피 수가 틀리면 그냥···
'죽여버리면 되니까.'
바토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27. 경과 (2)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