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하는 몬스터-93화 (93/174)

< 27. 경과 (1) >

‘제가, 오크입니다.’라는 선언으로 인해 한반도는 물론 전세계가 들끓었다. 오크 대장장이의 명성은 이미 세계를 수놓고 있었기에, 김세진은 전 세계의 뜨거운 토픽이 되었다.

주지혁과 이혜린, 김유린 등등 사실을 모르고 있던 단원이나 지인들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고, 국내 여론과 언론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도, 대단하다는 사람도, 비판과 비난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그간 그는 정체를 숨기며 얼마나 재밌있게, 우월감에 취해 살아왔을까-‘ 로 시작하는 비판적인 논평이 세진에게 가장 큰 내상을 입혔다. 무지 쪽팔렸다. 물론 정체를 숨긴 데에는 피치못할 사정이 있었지만, 읽으면서도 등골에 식은땀이고이고 머리가 띵- 했다.

-자료는 모두 모았습니다만은··· 아무래도 지금은 기다리는 것이 낫겠지요.

그러는 사이 김한설과 그 배후들에 대한 치부는 모두 파악이 되었다. 김한설이 자신의 야망을 위해 저지른 부정을 비롯한 많은 정보들. 거진 절반 이상이 공소시효가지났지만 어차피 여론은 그런 걸 신경쓰지 않을 터.

“네. 기다립시다.”

하지만 지금, 사건으로 사건을 묻기에는 김세진의 기자화견이 일으킨 소란이 너무 거대하다.

전세계의 유명 신문이나 주간지(가디언, 타임지 등등..)에서도 앞다투어 김세진의 진실을 보도하는 판국에 다른 내용의 기사들은 모조리 묻히는 실정이니, 아마 이기사도 지금 터트리면 별반 다를 바 없이 묻히겠지.

“이 난리, 꽤 오랫동안 계속되겠죠?”

-예.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몇 번 기자회견을 더 한다고 해서 수그러들 기미도 없으니, 몇 주 동안 그저 편히 쉬고 계시는게 좋을 성싶습니다.

“편히··· 후우.”

김세진은 창문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집 밖에 잔뜩 모인 기자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질 않는데, 편히 쉬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리고 길드장님.

“···네?”

-오늘, 꿈을 꾸었습니다. 한 흡혈귀의 눈으로, 로드가 꿈에서 깨어나는 꿈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울대로 침이 넘어갔다. 별안간 늑대의 동공이 개화되고, 손톱이 날카롭게 솟았다. 가슴이 자신을 크게 충동질하며 종족적 본능을 돋구었다.

“······어떻게 죽이죠?”

저도 모르게 나온 대답이었다. 마치 무릎반사처럼, 그저 본능적이었다.

-···예?

“아, 아닙니다. 나중에 제가 다시 전화 드릴게요.”

김유손의 당황한 목소리에 정신차리고서 재빨리 전화를 끊는다. 그럼에도 심장의박동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집 밖에서 웅성거리는 기자들은 지금 특히 더정신을 사납게 만들었다.

“···아후.”

한숨을 푹 내쉰 그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저 빌어먹을 놈들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으니, 어떻게든 방책을 찾아야 할것 같다.

“..어 세정이냐?”

수화음이 두 번 채 울리기 전에 연결된 통화.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기자회견 이후, 김세진은 약 일주일 동안 두문불출했다. 국내는 물론 외신의 인터뷰까지 '나중에'라고 모조리 거절을 놓은 채.

대신 이상한 야생 몬스터가 목격되었다는 목격담이 김세진 관련 기사 틈바구니 사이에서 솔솔 올라왔다가 금세 묻혔다.

달색 갈기는 영롱하게 빛났지만, 시야를 돌리면 언제나 짙은 암흑 실루엣 자국만이 남은 정체불명의 몬스터.

무엇보다 새처럼 허공을 박차며 활공하고 건물과 건물, 산과 산 사이를 도약하는 모습. 그것들은 모두 찰나에 불과한 잔상만이 남았지만, 그러나 우연찮게 장면을 목격한 ‘기사’들은 그 불가사의한 몬스터를 쉽게 잊어버릴 수 없었다.

물론 정작 장본인은 그딴 건 신경도 안 썼다. 지금처럼 바람을 쐬어야 쌓인 스트레스가 풀리는데, 굳이 왜 남의 시선까지 신경을 쓰면서 운신을 조심해야 하는가. 그런 건 성격에도 맞지 않는다.

“···흠.”

지금. 늑대의 형상을 취한 김세진은 몬스터 필드 산의 봉우리에 앉아 지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격이 달라진 늑대의 시야각에는 한계란 없어 많은 몬스터들과 야간사냥을 하는 기사들이 동시에 포착되었으며, 기사와 몬스터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흐름까지도 선연하게 보였다.

“하암~”

허나 뱀파이어라면 몰라도 저들은 굳이 싸우고 싶지 않은 약체들 뿐. 하품을 한 그는 손톱을 튕겨, 저 멀리서 기사를 상대하는 리치의 마법을 소멸시켰다.

갑작스레 해제된 마법에 깜짝 놀란 기사들이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다시금 리치를 향해 돌격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그는 천천히 봉우리를 내려갔다.

산책을 끝마친 김세진은 유세정 소유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강원도 고성군의 숲 속에 위치한 저택은 단순 평수만 200평을 넘기지만, 유세정에게는 그저 전망 좋은 별장 중 하나의 수준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집사가 알려줄 때까지 이 저택이 자기 소유인지도 모르고 있었을 정도이니.

그리고 김세진은 유세정에게 부탁하여 이 저택에 잠시동안 신세를 지게 되었다.

자신의 집은 이미 점령당한 것이나 마찬가지고, 민간인에게 완전 개방이 되어있는 단체 부지도 별반 다를 바가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부지 내의 공원과 호텔에는 기자들이 숨어있는 실정이다.)물론 숙직실이나 지하부지 등 여러 장소에서 틀어박힐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면 늑대나 몬스터 폼을 취하는 데 눈치가 보이고, 햇볕도 들지 않는 지하부지에서 고블린과 함께 생활하기는 싫었다.

그런 여러 이유로 오게 된 이곳은 참 좋았다. 산 속, 인적이 꽤나 드문 호숫가에 위치한 대저택이라 공기도 맑고 수상한 눈도 없으니.

허나 예상치 못했던 점은 역시···

“오빠, 어디 갔다 오는 거예요?”

유세정.

그녀는 검은 속옷이 살짝 내비치는 와이셔츠 하나와 짧은 핫팬츠만을 입은 채 수줍게 다가왔다. 방금 막 샤워를 했는지, 얼굴은 벌게지고 머리는 촉촉하게 젖어있다.

“산책. 그것보다, 너 아직도 안 갔어? 이틀동안만 머무른다며.”

“···내 집인데 뭘.”

또한 그녀는 요 나흘 간, 라이칸으로 산책을 나가는게 필수적인 루틴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인간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은 15시간 남짓 뿐이니, 유세정이 집안에 있는 이상 9시간 정도는 밖으로 나돌아야만 했다.

“근데 무슨 산책을 그렇게 오래해?

“내 맘이지. 그것보다 현오 씨는 언제 와? 분명 주지혁도 온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연락 한번 해봐. 내 핸드폰은 지금 폭사해버렸거든.”

“아 그래? 근데 그건 나도 잘··· 무슨 일이 생겼나? 그쪽도 인터뷰 하느라 바쁠테니까.”

유세정은 그와 눈을 맞추며 천연덕스런 거짓말을 했다. 문자 메시지 내역에는 이미 ‘안 와도 돼요’라고 발신한 내용이 있었지만··· 굳이 알리기는 싫었다. 자신은 문자 그대로 ‘작정’을 하기로 작정했으니

“아침밥 준비해놨어. 먹으러 가자.”

대신 그녀는 세진의 손을 붙잡고 식탁으로 이끌었다.

*

“맛있어?”

유세정이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물었다.

“..먹고 말할게.”

그러나 방금 막 한 숟갈 뜬 볶음밥은 아직 입 근처에도 다가가지 않았을 따름이다.

나흘동안 편했지만 동시에 불편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비록 밤 9시부터 새벽 6시까지. 9시간 동안 바깥을 나돌아다니느라 취침시간은 맞지 않았지만 기상시간은 비슷하여, 아침에는 유세정이 언제나 아침밥을 준비해주었고 함께 식사를 했다.

낮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할 일이 무료하여 같이 대련이나 좀 하다가, TV를 보며 시덥잖은 대화도 나눈다. 그러고 있자면 유세정이 은근슬쩍 다가와 스킨십을 한다.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거나, 허벅지를 베개로 삼는다거나.

그때마다 김세진은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음. 너무 짜네.’

볶음밥을 몇 번 우물거리더니, 그는 냉정하게 품평했다. 라이칸슬로프로 진화하여 미각이 발달한 탓에 웬만한 음식은 입맛에 영 차지 않는다.

“앗, 진짜?”

그러자 유세정은 당황하며 자기도 볶음밥을 한 숟갈 퍼먹었다. 제 입맛에는 별로 짠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 진짜네···. 실수다. 미안, 다시 해올까?”

“아니, 귀찮게 뭘. 괜찮아.”

어차피 평생 맛있는 음식만 추구하면서 살것도 아닌데. 김세진은 대충 볶음밥을 입 속으로 퍼다 날랐다. 그렇게 접시는 3분만에 깨끗이 비워지고, 유세정은 감동받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았다.

“···꺼억.”

그가 트림을 크게 했다. 그러나 콩깍지는 이런 모습 마저도 멋지게 둔갑시키는 법, 유세정은 솔직하다며 까르르 웃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유세정은 현관으로 향하는 김세진의 뒤를 졸졸 따랐다.

“나 잠깐 밖에 좀 다녀올게.”

“어? 아직 11시밖에 안 됐는데? 그리고 방금 나갔다 왔잖아”

유세정이 놀란 얼굴로 되묻는다. 곧 있으면 자신이 출현한 예능의 재방송이 시작되는데···.

“5시에 올 게.”

그러나 세진은 별 다른 말 없이, 현관에 서서 그저 엷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갑작스런 외출에 불만스러워진 기분에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유세정은 그보다 더욱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배웅했다.

*

오늘의 일과는 간단했다. 몬스터 폼을 골고루 취하면서 몬스터 필드를 거닐다가, 조금 강하다 싶은 몬스터가 보이면 죽이고 흡수한다. 그러다가 원래 예정했던 시각에 몬스터 필드로 찾아온 김유손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뒤이어 영웅오크 폼을 취해 영웅오크의 부락지로 향한다.

‘흠··· 많이 컸네.’

완연한 마을이 된 영웅오크 부락지는 볼때마다 뿌듯하다. 기껏 한글을 가르쳐줬건만 울려퍼지는 소리는 오크의 돼지 멱따는 소리라는 건 좀 걸리지만, 그래도 부락지는 온순한 오크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 되었다.

분업도 확실하고, 오크들이 직접 지은 움집도 봐줄 만 하다. 이 규모면 아마 300가구 정도는 넘지 않을까. 이토록 많은 오크들이 자라는 것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소소하게 즐거워졌다.

그때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전혀 예측하지 못한 알림창이 하나 떠올랐다.

[조건 완료: 족장으로서의 마음가짐. (2/3)]

- 한가지 조건을 더 충족하면 오크 족장으로 진화합니다.

- 육체에 전사의 영혼이 깃들 수 있는 그릇이 새겨집니다. 전사한 몬스터의 혼을 그 강함에 따라 최대 (1~5)기까지 담아둘 수 있습니다. 몬스터의 혼령은 소유주의 능력에 따라 무력에 보너스를 부여받습니다.

“···음?”

오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알림창을 훑으며 놀라는 사이,, 부락지의 문이 쑤욱 열리더니 누군가가 들어왔다.

김유린. 그녀는 원래 자신도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인 양 익숙했다.

처음에는 별 표정이 없었던 그녀였지만, 이내 영웅오크를 확인하자마자 화색이 되어선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대련하는 날이 아니다만?”

영웅오크가 거리를 벌리며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유린은 배시시 웃으며 자신의 뒷주머니를 가리켰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저번에 사냥을 나섰다가 다친 오크가 몇 명 있더군요. 그 아이들을 치료해주기 위해 포션을 조금 가져온 겁니다.”

“···.”

오크가 모호한 눈빛으로 유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은 즉 여태 꽤 자주 오크를보살펴 왔다는 뜻일 테니.

몬스터를 보살피는 여자, 언론이 알면 아주 좋아라 하겠네.

“그러니까 저도, 별로 당신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뜻이죠. 게다가 이 영웅오크 부락지는 칠흑기사단이 밀렵으로부터 보호하기로 했습니다."

방금 자신의 환하디 환했던 표정은 생각지도 않고, 유린은 그렇게 떠들면서 짐짓 냉정히 오크를 지나쳤다.

오크는 피식 웃고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웬일, 따라오네?’

뒤를 힐끗 돌아본 김유린의 입가가 실룩였다.

밀당은 성공적이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 27. 경과 (1) > 끝

ⓒ 지갑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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