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진실? (2) >
현월 경매장의 VVIP홀에는 수백의 귀객들이 모였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한 가닥 이상은 하는 걸출한 인물들이었다.
일단 이 보물을 입찰할 수 있는 사람은 원칙적으로 기사 뿐이지만, 견문과 인맥을넓히기 위해 기사의 지인자격으로 참석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 탓인지 경매장에는 인종·국적·종족 불문, 기사는 물론 정재계 거물과 월드스타까지, 한반도에서는 평생 한번도 보기 힘든 진귀한 인물들이 널려있었다.
그리고 그런 명망높은 사람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단 한 명을 찾고 있었다.
세진 킴-, 기무세진 상- 뭐 이런식으로.
“···왜 안 오신대요?”
경매가 한창 진행되는 와중, 좌불안석인 유세정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조한성에게 물었다. 평소에는 자부심과 자신감이 넘쳐났었던 그녀는 지금, 이상하게도 쭈구리처럼 몸이 움츠러든 채였다.
“저도 그건 잘··· 마지막에는 오신다고 하시긴 하셨는데, 기다리지는 말라고 하셨습니다.”
“···후.”
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숨결은 걱정보다는 안도와 가까웠다.
사실 그녀는 불안했다.
지금 이곳은 전세계에 이름을 날릴 정도로 지극히 아름다운 엘프, 여우계 수인 등등···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은 미인들이 사방을 애워싸고 있었는데, 그것이 유세정이 자신감을 잃은 이유였다.
그네들에 비해서 자신은 정말 보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얼굴은 모나고 다리는 왜 이토록 짧은지···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를 원망했다.
“때가 되면 오실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눈치없는 주지혁이 쓸데없는 위로를 해주었다. 세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서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답신인은 ‘세진오빠~’. 수백의 연락처 중에 유일하게 이모티콘이 들어간 남자다.
[오빠 경매는 우리가 알아서 잘 마무리 할 테니 급한일 있으면 안 와도 돼.]
그녀가 그렇게 메시지를 보낸 순간.
“이제, 드디어 여러분이 고대하시던 마지막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경매사의 웅대한 목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음과 동시에, 오크의 역작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보물은 베일에 꽁꽁 싸매진 채 홀의 중앙으로 옮겨졌다. 모든 이들의 침삼키는 소리가 모여 입체적으로 메아리쳤다.
“역사에 기록될, 천재 대장장이 오크가 창조해낸 보물. ‘그람’입니다.”
보물은 감히 신화를 수놓은 유물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기에, 순간 경매장 안에 소란이 일었다.
“대장장이가 말하길, 신화 속 그람을 최대한 재연하려 노력했다 하더군요.”
그러나 경매사가 보물을 가린 베일을 치우자, 그 의심과 불만은 감탄과 감동으로 승화하게 되었다.
몇몇 기사들은 차마 앉아있지도 못하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길게 뻗은 순백의 미스릴 검신, 눈부신 금빛을 띄는 검자루. 세련된 정갈함을 뽐내는 검, '그람'은 경매장의 조명을 눈부시도록 반사했다.
오크 대장장이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이 없는 문양도 새겨져있지 않아 외관은 평범하기 그지 없었지지만, 그러나 이곳에 모인 모든 기사들은 알 수 있었다. 저것이야말로 오크, 아니 세계가 빚어낸 '보물'이라는 것을.
“그럼, 경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작가는 50억, 호가는 1억 단위···.”
경매자가 그렇게 선언했을 때.
별안간 경매장의 대문이 끼이익- 열렸다.
그 틈새로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어쩌면 이 경매의 주인공.
'김세진'이었다.
그는 쑥스러워하며 재빨리 제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런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들은 저마다 모두 세진에게 한마디는 걸어보려 노력했고, 경매시작은 약 20분정도 늦춰지게 되었다.
*
마지막 경매는 무려 두 시간동안 지속되었다.
경매 낙찰가는 천 팔백억. 아무리 인플레이션이 심하다 하더라도 정말 억 소리 나는 금액이었다.
그리고 그 낙찰자는,
[칠흑기사단, 우여곡절 끝에 1800억에 낙찰 성공···]
[불편한 뒷사정, 한국 정부의 칠흑기사단 밀어주기. 새벽기사단을 압박하다?]
['그람'. 전설을 재현한 사나이, 오크 대장장이는 이미 하나의 별이 되었다.]
칠흑기사단. 곧 '대한민국'이었다.
보물치고는 낙찰가가 조금 낮다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 이건 어느정도는 예견된 결과였다.
만약 해외에서 이 보물을 낙찰하기 위해서는 귀중품에 부가되는 특별관세, 특별법으로 인한 특수세금, 부가세 등등··· 여러 기타 부대비용까지 고려하여 최소 그 4~5배 이상을 지불해야만 했다. 게다가 여기에 현월은 '모두 현금'과 ‘지급기한’이라는 원칙까지 있으니···.
혹시? 라는 일말의 가능성을 노리고 경매에 참석한 여러 국가와 기사단들은 그저보물을 구경했다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을 두고 해외 여러 언론들은 한국 정부의 노골적인 편파적 태도에 아쉬움과 불만을 표했으나-끝까지 집념을 발휘하여 경매에 참여한 일본 쪽이 특히 심했다-, 그래도 전세계의 머리기사를 장식한 건 그 따위 불만이 아니라 ‘보물, 그람’의 아름다운 자태였다.
순백의 검면과 섬세하게 세공된 검자루. 그리고 그 심플한 외면에 담긴, 그람의 전설과 맞닿은 힘.
단지 이름과 사진 한 장만으로도 뭇 기사들의 심장을 떨리게 한 그람은 타임즈 선정 세계 100대 무기에서 30위를 당당하게 차지했고, 오크 대장장이는 세계 최고의대장장이 대열에 자연스럽게 편입하게 되었다.
한편 낙찰자 칠흑기사단은 ‘그람’을 기사단장 김현석에게 10년임대의 형식으로 하사했다. 그 수여식은 생중계로 방영되면서 민중들의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대한민국은 보물을 빼앗기지 않았고, 오크 대장장이는 전세계적으로 명성을 드높일 수 있었으니, 국가와 김세진 둘다 승리했다 하겠다. (그러는 와중에 갑작스레 화두에 오른 오크 대장장이의 정체를 두고, 사실 김세진이 1인 2역을 하고 있다는 말도 안되는 소문이 대중들 사이에 퍼지기도 했다.) 그렇게 한반도 전체가 여전히 보물경매의 열기에 젖어 들썩이고 있을 때, 김세진은 흐뭇해할 틈도 없이 별안간 몬스터 용병단의 긴급호출을 받았다.
“그때 제가 말씀드리었던, 뱀파이어가 머물고 있는 호텔의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130여명의 정보원, 50여명의 용병이 활동하는 몬스터 용병단은 이제 웬만한 지하조직의 정보력을 능가하게 되었다. 당장 터트릴 수 있는 특종만 해도 웬만한 언론보다 많을 정도로.
“’Romance of dawn’이라는 호텔입니다. 호텔의 상층부에서 기이한 현상이 관측됨은 물론이거니와, 호텔 복도에 설치해둔 녹취장비에 여성의 앙칼진 노성과 마법의 흔적이 동시에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그럼 정확히 누가 머무르고 있는거죠?”
“아무래도 ‘바토리’로 추정됩니다.”
순간 김세진의 눈동자에 살기가 고이고, 주먹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
아무리 갑작스러워도 바토리라는 글자는 이미 머리속 깊게 각인되어버렸다. 어머니의 살해장소에서 발견되었던 것이 ‘바토리의 심볼’이라 했으니.
이제 놈이 숨어있는 장소를 알았다. 그러니 예상외로 수월하게···.
“아니요. 바토리의 힘은 지금 저희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합니다. 바토리 가문의 수장은 한 번의 손짓으로 태산을 무너뜨리고, 하늘을 검게 물들일 수있다 전해질 정도입니다. 그것은, 어떤 과장도 없는 문자 그대로의 강함입니다.”
그러나 김유손은 그런 그를 진정시켰다.
“혈족 대대로 강함이 축적되는 뱀파이어는 저희가 상상하는 그 이상입니다. 이 소인이 소싯적에 많은 뱀파이어를 상대하여 보았으니 잘 알고 있습니다.”
일단 주거지를 알아낸 것으로 만족하고 몸을 웅크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놈이 그렇게 강합니까?"
"예. 능히 하나의 기사단과 맞먹을 정도입니다. 놈들은 강함을 위해 일족의 신하를 제물로 바치기까지 하였을 정도니까요."
반 평생을 뱀파이어와 싸워온 베테랑의 고견이었기에, 김세진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후. 그럼 일단 지하나 한번 가봅시다. 참, 단속은 단단히 하셨겠지요?"
"그럼 물론입니다. 어서 가시죠. 아이들이 그간 많이 발전했습니다."
*
그는 현재 고블린의 폼을 취하고 있다.
허나 그가 발을 딛고 선 위치가 특이했다.
흔한 몬스터 필드가 아닌, 더 몬스터 단체 부지의 ‘지하’였다.
세진은 약 3주 전, 김유손을 시켜 지하에 부지를 만들라 명령했다.
물론 부지의 용도는 결코 세간에 설명할 수 없으니 같은 단체의 직원들에게도 비밀이라 일러두었다.
그런 기밀부지의 용도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점은 ‘고블린의 부락지’였다.
현재 국내 몬스터 필드에서 고블린이라는 몬스터는 거의 멸족되다시피 했다. 유약한 몬스터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무리’를 지었기 때문인데, 지반이 뒤틀리면서 모든 무리가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구심점이 사라져 기댈 곳이 절실한 고블린을 거둬들이고, 영웅 오크가 그러했던 것처럼 고블린을 키우기로 결심했다. 게다가 그저 치고 박고 싸우는 것밖에 효용이 없는 오크와는 달리 이쪽은 훨씬 대단한 부가가치가 있으니.
오죽하면 ‘인간보다 간교한 고블린’이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당장 약재 쪽만 제대로 힘써도 이제 소중한 시간을 소모해가며 포션을 만들 필요가 없고, 주술 쪽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활용방법이 있다.
···일단 제대로 성장하기만 하면.
“그래. 말 잘 듣네.”
이 놈들은 말귀를 무척 잘 알아들었다. 일도 잘하고 교육도 잘 받는다. 물론 늑대인간폼으로 엄청난 겁박을 주긴 했지만, 그래도 예상 외의 충성심과 성실함이다.
“내가 알려준 대로 계속 포션을 만들어라. 알겠냐? 주술 놈들은 계속 연구에 매진하고.”
김세진이 고블린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들은 캬아악- 하며 소리쳤다.
“복리후생이 좋아서 그런가, 일을 무척 잘하는 군요”
김유손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몬스터한테 복리후생이라니, 우습지만 사실이다. 이곳에 머무는 고블린들은 꽤나 인간적인 숙소에서 거주하고, 깨끗한 음식과 물을 삼시세끼 공급받고 있다. 물론구내식당에서 남은 음식을 퍼다나르는 것 뿐이지만.
“그건 그렇고, 정보조사는 잘 되어가고 있습니까?”
어느새 인간형태로 모습을 변화한 김세진이 물었다.
“예. 유백송의 상사는 아무래도 몬스터관리부의 장관 김한설인 것 같더군요. 전임 국장으로 활약해왔던 터라 본인의 무위도 뛰어나지만, 여러 커넥션이 많습니다. 국회의원, 새벽의 간부 등등. 야망이 상당히 큰 사내라 하더군요.”
“그래요?”
김세진이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확히 10초 뒤에 핸드폰이 부르르 떨었다. 미간을 좁히고서 액정을 확인해보니 조한성이었다.
“여보세요?”
─저 길드장님, 조한성입니다. 이번 길드신청 관련 문제로 정부관련인사가 면담을 요청해왔습니다. 무려 장관입니다.
“크흠··· 그, 이름이 뭔데요?”
일개 고아에서 장관과 독대할 수 있는 위치까지 도달했다는 것에, 세진은 약간 감동했다. 그러나 그 감동은 찰나의 편린일 뿐이었다.
─김한설이라고, 몬스터관리부의 장관입니다.
“···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만나고싶다 일러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김세진이 통화를 끊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옆에서 김유손이 물어왔다.
“방금 막, 그 분을 직접 만날 명분이 생겼네요.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확인해봐야겠어요.”
세진은 진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
이튿날. 김세진은 언제나 그랬듯이 몬스터 필드로 향했다.
가장 먼저 영웅오크 폼으로 부락에 무슨 일이 없나 들렀다. 전체 머릿수가 세자리수로 늘어나고, 실질적인 지도자나 다름이 없는 재규어 두 놈이 왠지 모르게 대전사로 레벨업한 것 같았기에, 이제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성싶었다.
안심한 그는 이후 중상급지대로 직행했다.
오크는 빠르게 몬스터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러는 와중에 꽤나 껄끄러운 인물을 만나버렸다. 아니, 오크가 직접 만나러 갔다.
김유린.
그녀는 어느 남자와 함께하고 있었다.
멀리서 김유린의 목소리를 힐끗 들은 바로는, 저 남자의 이름이 바로 '김한설'이었다.
어차피 당장 사흘 뒤에 만날 예정이긴 하지만··· 미리 태도와 인성을 확인해봐도 나쁠 것은 없겠지.
< 26. 진실? (2)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