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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하는 몬스터-86화 (86/174)

< 25. 격화 (2) >

굳은 표정으로 아홉의 어두운 신형을 노려보던 하젤린의 뒤로, 김세진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 기척을 느낀 하젤린은 팔을 뻗어 그가 다가오는 것을 막았다.

“···미안해요 세진 씨. 괜히 저 때문에. 최대한 빨리 끝낼 테니까, 가만히 물러나 있으세요.”

“아니 그게···.”

“쉿. 조용히.”

그녀는 여전히 착각을 유지한 채. 심호흡을 깊게 했다.

“반응이 없는 걸 보니 마피아 쪽도 아닌가보구나? 혹시 야쿠자니?”

놈들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당연했다. 저들은 ‘인간’이 아니니까. 코끝에 아른거리는 비릿한 피냄새가 그것을 증명한다.

“···.”

결국 아무 말 없이, 아홉의 흡혈귀는 동시에 영창을 외기 시작했다. 그에 하젤린은 입술을 꽉 깨물고서 자신의 영창을 외웠다. 그러자 그녀의 등 뒤로 흑색 용암이 크게 치솟더니, 기다랗고 거대한 ‘창’의 형태로 응집되어 허공을 웅웅- 부유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창의 부근에는 마치 공기가 녹아내리듯 공간이 어그러지고 있었다.

마창.

마법사의 마나가 창의 형상을 이룬, 오직 적의 파괴와 절멸만이 목적인 마법. 창의 형상과 마땅한 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다량의 마나는 물론 뛰어난 마력(마나를 다룰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기에, 파괴마법의 상위와 최상위 범주에 동시에 속해있는 고급 마법이다.

그 위력은 마법의 시전자가 누구냐에 따라, 드래곤에도 대적할 수 있는 최강의 비기(?器)가 될 수 있다고 여겨질 정도.

“겁이 나면 지금이라도 꺼져주렴. 굳이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고 싶지는 않으니까. 대화로 해결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낫잖니?”

허공을 진동시키는 아홉 마창의 날이 각각 아홉의 신형을 향하고, 하젤린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딱 10초동안 지속되었다.

흡혈귀의 발 밑에서부터 시작된 기이한 ‘파동’이 그 원흉이었다. 마치 검은색 급류가 요동치듯 사방으로 뻗어 나간 이 파동은 어느 반경에 다다르자 마치 돔의 형태로 분해, ‘공간’과 ‘세계’를 분리시켰다.

이것은 김세진도 익히 알고 있는 마법, ‘결계’였다.

“···어?”

물론 A급 마법사 하젤린은 숱한 결계마법을 겪어왔을 터. 그러나 그녀는 당황을 금치 못할 수 밖에 없었다.

결계가 형성되는 순간. 흑색의 마창의 크기가 확연히 줄어들고, 체내를 순환하는 마나의 흐름또한 눈에 띄게 느려졌기 때문이었다.

예상외의 상황에 하젤린은 다급히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선 이를 까득 깨물었다.

“뭔 농간이야 이건?”

흡혈귀들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놈들의 등 뒤로 암적색의 균열이 발생하더니, 그곳에서 수십의 촉수가 뿜어져나와 먼저 마창들을 쳐내고서 뒤이어 하젤린에게로 쇄도했다.

생김새부터가 불쾌한 촉수가 날을 세운 채 그녀의 목에 닿으려는 찰나.

다섯 줄기의 칼날이 차갑게 번뜩였다. 예기로운 '손톱'의 날에 베어진 촉수들은 흔적도 없이 산화되어 바람결에 흩날렸다.

그리고 그제서야 아홉의 흡혈귀들에게 미진한 동요가 일었다.

“이런 씨··· 하아···. 하아···.”

꽤나 오랜만에 생명의 위협을 맛본 하젤린은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가쁘게 몰아 내쉬었다.

“이 미친놈들이 갈때까지 갔구나. 웬 빌어먹을 흑마법을··· 으?”

놈들을 삿대질하며 짐승처럼 으르렁대는 하젤린이었으나, 등 뒤에서 뻗어나온 우악스런 손길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하젤린 씨. 일단 진정하세요. 여기선 저희가 너무 불리하니까. 근데 결계를 풀 수 있는 방법, 알고 계시나요?”

김세진이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갑작스레 출몰한 아홉의 뱀파이어, 늑대의 직감으로 느끼는 놈들의 강함은 꽤나 당황스러울 수준이었다. 인간형으로는 결코 저 모두를 혼자서 상대할 수 없다.

“이런 결계는 저도 처음 들어요. 아무래도 흑마법의 한 종류 같은데···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세진 씨 까지···.”

하젤린은 여전히 착각 중이었고, 아직까지도 세진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괜히 긴장이 풀린 그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제가 놈들을 최대한 막아볼 테니 일단 방법부터 찾아봅시···.”

허나 뱀파이어들은 두 사람의 상의를 기다려줄 만큼 자애롭지 못했다.

별안간 결계의 하늘에서 거대한 운석이 생성되어 그들에게로 급추락하기 시작했다. 하젤린은 미약한 마나로나마 배리어마법을 시전했고, 세진은 손톱을 길게 뻗어 선풍을 날려보냈다.

그렇게 운석은 어떻게든 상쇄되었으나, 이번엔 옆구리 쪽으로 예의 촉수가 다시금 쇄도했다. 촉수는 하젤린의 배리어를 손쉽게 박살내고, 그녀의 옆구리에 큰 자상을 입혔다.

“끅!”

하젤린이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세진은 낭패섞인 욕설을 내뱉으며 손톱으로 결계를 한번 베어봤으나, 역시 끄떡 조차 없었다.

‘이거 도저히 인간으로는···.’

한숨을 내쉰 김세진은 일단 영체화되어있던 포션을 몸 밖으로 끄집어내어 하젤린의 몸을 치유해주었다.

“···으으.”

“하젤린 씨. 괜찮아요?”

그리곤 엷어진 통증에 안도하는 하젤린을 바라본다.

“그렇긴 한데···.”

“일단 잘 들으세요. 저, 절대 괴인이나 마인 아닙니다. 하젤린 씨라면 믿어줄 수 있죠?”

인간으로 분할 수 있는 몬스터, 괴인.

인간과 몬스터의 경계에 위치한 존재, 마인.

둘 중 '마인'은 다른 세계에서 이종족들이 지구로 이주해온 이후로, 본능과 본성 자체가 극히 험악하여 사회에 가장 위협적인 아인들을 뭉뚱그려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마인들은 나가나 뱀파이어와는 달리 ‘우호적인 여론’자체가 전무하여, 전세계적으로 발견되는 즉시 사살당한다. 어쩌면 라이칸슬로프가 살아있었다면 이 ‘마인’이라는 카테고리에 속하게 되었겠지.

그리고 이 두가지가 김세진이 특성을 밝히는 걸 저어할 수 밖에 없었던 두가지 이유다. 실제로 자신이 특성을 가진 인간이라 말하며 죽어간 마인이나 괴인도 심심찮게 있었으니.

“···? 그게 무슨 말 뜻···.”

그녀가 말하는 와중에도 놈들은 공격을 해왔다. 세진은 날카롭게 뻗은 손톱으로 모든 촉수를 무마했지만, 뒤이어 쇄도하는 시꺼먼 불덩이는 인간형의 손톱으로는 막아낼 수 없는 규격외였다.

"꺄악!"

세진은 한 팔로 하젤린을 내팽개치고서, 그 반대쪽으로 몸을 굴렀다.

콰아아앙-!

방금까지 두 사람이 있었던 자리가 마치 용암에 용융되어가듯 지반 전체가 어그러졌다.

“일단 이 결계를 풀 수 있는 방법부터 찾아보세요!”

어차피 이 특성을 영원히 숨길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세진은 그녀에게 소리치고서, 푸른 비닐로 덮인 괴물 영웅오크의 폼을 취했다.

2m를 가벼이 넘기는 장대한 체구와 형형한 두 눈으로 놈들을 굽어보며, 메이스를 강하게 움켜쥔다.

내부에서 분노와 뒤섞인 투쟁심이 치밀었다.

─크아아아아!

그렇기에 야성이 담긴 포효는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옆으로 튕겨졌던 하젤린이공포에 질린 모양새로 뒷걸음질을 치긴 했지만, 지금은 그녀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방에서 어지러이 뒤얽히며 쇄도해오는 촉수를 후려치고, 굳이 쳐낼 필요도 없는 그 이외의 간지러운 파괴마법은 그저 몸으로 감내하며 돌격한다. 그런 오크의 순결한 비늘에 가해지는 피해는 전무. 그 위압적인 모습은 오크의 형상을 아득히 뛰어넘어, 그야말로 한 마리의 괴마(怪魔)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저런 미친···!”

여태까지 침묵을 유지하던 흡혈귀들도 그제서야 동요를 하며 욕설을 내뱉었다.

"──!"

귀를 진동시키는 포효, 뒤이어 내려쳐지는 파괴적인 메이스. 노면을 가격한 메이스에 의해 도로가 움푹 패이고, 결계가 통째로 뒤흔들린다.

아홉 중 일곱의 흡혈귀는 몹시 당황해, 마구마구 마법을 쏘아내며 패악적인 면모를 내보이는 오크를 막아내려 했다. 그러나 아직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두 명의 뱀파이어, 일명 ‘고결한 사도’들은 오크와 자신들 사이에 하나의 벽을 세우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힘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라. 소환식을 거행하겠다.”

“···예?!”

사도의 말에 신도들이 당황한 그 찰나에, 타아아앙-! 인공적으로 세워진 벽에 메이스가 부닥치며 거대한 진동이 울렸다.

“이런 것도 ‘특성’이라는 것이겠지? 예상 외로 특이하고 껄끄럽군. 어서 소환식을준비하라.”

“하지만, 바토리님을 소환시킨다면···.”

“음? 내가 미쳤냐. 이런 상황에 그분 손은 필요가 없어. 데스나이트 정도면 충분하겠지.”

콰아아앙-! 다시한번 메이스가 벽을 강타했다. 마법으로 이뤄낸 방어막에 균열이 쩌저적- 갈라졌다.

“어서. 시간이 없다.”

상황의 시급함을 느낀 아홉의 흡혈귀들이 동시에 영창을 외우기 시작했다. 한국어도, 영어도, 일어도 아닌, 다른 세계의 언어였다.

불안을 직감한 세진은 역전의 전사를 가동시키면서까지 마법벽을 후려쳤다. 그러나 균열만 좀 커질 뿐, 방어막은 그 자리를 유지했다.

“잠시 뒤로 비켜주세요!”

순간 뒤에서 마법의 기운과 함께 하젤린의 외침이 들려왔다. 김세진이 옆으로 퍼뜩 물러나자, 얇디 얇은 마창이 쇄도했다. 이내 그 마창은 방어막의 균열 속으로 쏙- 스며들어, 흡혈귀의 목에 작열한다.

“끄억!”

갑작스런 일격에 흡혈귀가 한 명이 비명횡사를 했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린 듯, 어둠으로 깊게 물든 바닥에서는 전신이 흑색인 기사의 형상이 천천히 지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것은 과거, 흡혈귀가 살던 세계의 유물.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린 기사를 재료로 만든 최강의 ‘언데드’.

데스나이트였다.

채애애애앵--!

데스나이트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방어막이 유리창처럼 박살나고, 세진은 아직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데스나이트를 향해 메이스를 내리쳤다. 그러나 빌어먹을 촉수들이 그 일격을 방해해 세진은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결계를 없앨 방법은 있습니까!”

세진이 소리쳤다. 어쩌면, 그때처럼 이 메이스로 결계를 후드려 패면 결계가 통째로 무너질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지금 찾고 있어요!”

하젤린이 그렇게 소리친 순간에 데스나이트가 완전히 깨어났다. 얼굴 전체를 가린 투구 사이로 섬뜩한 붉은 안광이 발했다.

놈은 언데드로서 자각을 되찾은 그 즉시, 허리춤에 메인 검을 뽑아 검격을 날렸다. 반월의 궤적을 그리는 암적색 검기, 세진은 그것을 메이스로 내팽개치고서 놈에게쇄도했다.

콰아아앙-!

오크의 메이스가 대기를 어그러뜨리며 놈의 대가리로 치밀었지만, 데스나이트는거검을 휘둘러 그것을 막아냈다. 일순 거대한 충격파와 흙먼지가 크게 일어 사위의 시야를 가렸다.

챙- 챙-

짙은 흙안개 속에서도 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는 계속해서 울려퍼졌다.

힘과 기술. 데스나이트는 그 어떤 면에서도 결코 세진에게 밀리지 않았다. 게다가주변에 즐비한 흡혈귀들의 도움 또한 너무 까다로웠다.

데스나이트의 검과 흡혈귀들의 마법을 동시에 방어하는 것은 지극히 힘들었다. 그래서 세진은 공격들을 최대한 흘려보내며 데스나이트를 중점적으로 상대했으나,데스나이트의 정석적인 검술은 그 어떤 빈틈도 존재하지 않는 철옹성과도 같았다.

‘···상황이 너무 불리한데.’

단단한 비늘에 점차 날카로운 상처가 나기 시작하자, 세진이 이를 까득 깨물었다.

원활한 전투를 위해서는 저 뒤에서 지원사격을 하는 마법사들부터 싸그리 죽여야만 하는 것이 옳다. 허나 이 오크 폼은 이 데스나이트보다 민첩하지 못하다.

늑대인간 폼이라면 어찌어찌 가능할지도 모르겠으나, 이 격화된 전황에서 늑대인간으로 변했다가는 일격도 견뎌내지 못하고 짜부리질것이 분명.

“······.”

김세진은 데스나이트의 어깨 위로 아른거리는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작금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 추정되는 유일한 방법.

[라이칸슬로프로 진화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저 상태창, 그 어느때보다 유혹적일 수가 없었다. 라이칸슬로프로 진화함으로써 생길 장단점도 일단은 살아있어야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방법은···!”

김세진이 소리치며 하젤린을 힐끗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바빴다. 결계의 파훼법을 알아내고 있어야할 그녀는, 어느새 두명의 흡혈귀와 피를 튀기는 혈전을 치르고 있었다.

“···씹.”

압도적으로 불리한 전황, 이대로면 몰살이다. 많은 고민을 할 시간도 없고, 이성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저 뒤에서 간교한 술수를 부리는 빌어먹을 흡혈귀들. 놈들을 지금 당장 찢어 죽여버리고 싶어 전신이 들끓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것을···.

“크어어어?!”

세진은 포효를 내지르며? 결국 [예]를 선택했다.

순간, 수 많은 알림창들이 떠올랐다. 세상을 가득 채우는 문자의 향연이 그의 시야를 가렸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광경이었다.

< 25. 격화 (2) > 끝

ⓒ 지갑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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