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격화 (1) >
“···.”
유세정은 김세진과 정체모를 여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그녀의 동공에는 두려움, 분노, 짜증, 황망, 망연 등등··· 수많은 감정이 뒤얽힌 채 넘실거렸다.
세진은 재빨리 옷을 갖춰 입고서 유세정에게 다가갔다.
“···어. 인사해. 여기···.”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하젤린의 의향을 묻기 위함이었다.
“괜찮아요.”
하젤린이 짐짓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뭐가 괜찮은데요?”
그러나 유세정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대체 어떤 소개를 하려고 괜찮다고까지 말하는지··· 과민인 걸 알지만, 그래도 긴장이 되었다.
“아 그러니까 이분은···”
“잠깐! 멈춰, 멈춰봐.”
세정이 소리를 지르며 그를 제지했다. 넘실대는 심장을 위해서라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것 같은···.
“···하젤린 씨야. 너도 알지?”
하지만 그는 굳이 시간을 둬서 그녀가 오해하게 두지 않았다.
흠칫 몸을 떤 그녀는 하젤린이라는 이름을 몇 번 되뇌더니,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뭐야···. 네. 알죠. 알아요···.”
불안에 떨던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새 침착을 되찾아 있었다.
세진은 피식 웃고서,
“같은 단원인데. 그래도 안될까요?”
하젤린을 지그시 바라보며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었다.
“······뭐. 세정 씨는 서면으로 많이 연락했으니까.”
그녀는 떨떠름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이고는 후드를 벗었다. 그리고 유세정은 깜짝놀랐다. 실로 엘프다운,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 그러나 다크엘프 답지 않은 백옥같은 피부. 그 압도적인 미(美)에 세정은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 수 밖에 없었다.
“직접 대면하는건 처음이지요? 반가워요 세정 씨.”
하젤린이 손을 내밀었다. 세정은 살짝 기가 죽은 채로 그 손을 맞잡았다.
“······역시, 엘프다운 아름다움이셔요.”
그 씁쓸한 찬사에, 하젤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훈련을 하고 있었어. 하젤린 씨가 도와주시기로 하셨거든."
김세진은 침울한 유세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 괜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 제 품안으로 살포시 끌어안았다.
분명 '살포시'였다.
그러나 유세정은 무슨 해일에 휘말리기라도 한 듯, 그의 품 속으로 강하게 밀려들었다.
"..두, 두분 상당히 친하시네요."
그 갑작스런 포옹에 하젤린이 당황하며 뒷목을 긁적였다.
"아 그··· 저희 사실, 무척 친해요. 발전가능성이 높은 친함···."
견제의 의도가 다분한 헛소리였기에, 김세진은 재빨리 세정의 입을 틀어막았다.
"···친한 오빠 동생 사이죠."
그리고 유세정은 그의 손바닥을 강하게 깨물었다.
*
[대장장이 오크, 대한민국 18번째 ‘명인’ 등극.]
[데뷔 2년차에 명인이 된 천재··· 해외 유수의 기사단에서 축사를 보내오다.]
[오크를 명인으로 만들게 한 무기, 6월 1일 ‘현월 경매장’에서 경매 예정. 총 103개국 200개소 이상 기사단에서 경매참가신청···..]
“난리났네.”
세진은 흐뭇한 표정으로 탁자에 신문을 내려놓았다. 탁자 위에는 국내 신문사에서 발행한 신문은 물론, 스페인·미국·영국·중국·일본 등등 수 많은 외국에서 발행한신문들도 많았다.
언어는 각기 달랐으나 헤드라인은 똑같았다. 모두 ‘오크 대장장이’가 명인에 등극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그가 만든 ‘보물’등급의 무기를 궁금해한다는 내용이 쓰여있다.
···라고 외국어에 능통한 소여진이 알려주었다.
“네. 난리 났어요 지금. 한반도 인근 아시아 국가와 서유럽 몇몇 국가에서는 총리랑 대통령까지 경매장에 참석하고 싶다고 외교공문을 보내왔는걸요.”
“그래? 신기하네.”
“무려 보물 등급인데 당연하죠. 저희 나라에서만 해도 30년 만인걸요. 진짜 대단한 천재같아요. 오크 대장장이님은.“
소여진의 찬사에 김세진은 제 어깨가 으쓱이려는 것을 최선을 다해 막았다.
“크음··· 그렇습니까?”
“그럼요~”
여진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그때, 단체장 전용 회선에서 비서의 음성이 들려왔다.
-단체장님. 셰나린 마법사님이 곧 도착하신다고 연락을 주셨습니다.
“아. 이제 훈련하실 시간이시네요. 저도 이만 업무보러 가보겠습니다~”
소여진이 미소를 지으며 물러났고, 세진은 하품을 크게 한번 하고서 몸을 일으켰다.
*
세진은 훈련하기에 앞서 일단 단원전용 휴게실에 도착했다. 점심시간이기 때문일까,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김유손의 아들 김선호는 제 딸에게 이유식을 먹이고 있고, 이혜린은 그 모습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본다. 주지혁은 소설책에 열중하고, 유세정은 동그란 안경을 낀 채노트북 자판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조별과제라더니 바쁘기는 한가보네.’
모두 바빠보였고, 유일하게 세진의 무료함을 달래 줄 만한 여유로운 인물은···.
“또 오셨네요?”
“옛? 아.. 예. 혜린이가 밥만 같이 먹고가자고 그래서.. 오게 됐습니다. 맛있더군요, 역시.”
낮잠에 취해 꾸벅꾸벅 졸던 김유린이었다.
“저희 구내식당이 맛 좋기로 유명하기는 하죠.”
잠재력 높은 요리사들을 쓸어왔으니까.
“···네.”
김유린은 괜히 눈치를 보며 세진의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아마도 자신은 단원이 아니기 때문이겠지.
“괜찮아요. 그렇게 눈치 안 보셔도. ‘ME(몬스터 엔터테이먼트)’소속이신데 마음껏 오셔도 돼요.”
그는 그녀의 옆에 앉아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아···. 감사합니다. 그럼 앞으로도 자주 신세 좀 져도 될까요?”
“예? 아, 그럼요.”
아마 단원전용 훈련장을 말하는 것이리라. 지인-유세정 혹은 이혜린-이 없을 때,사옥 앞에서 서성이기만 하는 김유린를 목격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으니.
“···근데···.”
김세진은 유린의 한쪽 팔에 채워진 아대를 힐끗 바라보았다. 유린은 그 시선을 눈치채고는, 아대낀 팔을 슬그머니 아래로 내렸다.
“이게 그겁니까? 영웅오크가 줬다는.”
“···혜린이가 말했습니까?”
“네.”
김유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예. 영웅오크가 준겁니다.”
“만져봐도 됩니까?”
세진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쭉 뻗었다. 그러나 순간 김유린은 몹시 기민하고 날렵하게 등을 훽 돌리고서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안됩니다.”
“···그 오크가 그렇게 좋습니까?”
“그, 그런거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그냥··· 선물이잖습니까. 선물을 함부로 만지시면 안되죠.”
“흠···”
세진은 그녀를 바라보며 짐짓 불만스러운 척 턱을 쓰다듬었다. 아. 방금 기발한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만나게 해드릴까요?”
돌연 뱉어낸 말에 김유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그, 그게 무슨···?”
“말 그대롭니다. 제가 몬스터와 대화를 할 줄 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서 영웅 오크들이랑도 친해졌는데···.”
거기까지 말하자 김유린이 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부탁한다고 다 되지는 않겠지만··· 가능성은 높겠죠?”
하지만 물론 조건은 있다.
“만약 유린 씨가 저희 단체에 가입하신다면야 뭐··· 그래도 2주에 한 번 정도는 영웅오크 대전사를 불러낼 수 있지 않을까..”
김세진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유린의 눈을 응시하였다.
그녀의 눈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안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저 그 오크 안 좋아합니다. 그 오크에게 품은 감정이 있어도 ‘전우애’뿐일 겁니다. 애초에 인간이 몬스터를 좋아한다는게 말이라도 되는 소립니까?“
그녀는 결연한 구라를 쳤다.
“···예. 뭐··· 혹시 나중에 마음 바뀌시면 말씀해주세요.”
이쯤 되니 무슨 철옹성같이 느껴진다. 괜히 오기가 생겨 오크폼으로 깔짝이면서 그리움을 돋궈버릴까, 하는 사악한 생각도 들었다.
그때 위이잉- 하고 전화가 울렸다.
하젤린이었다.
문득 하젤린과 김유린의 관계를 떠올린 김세진은 조심스럽게 바깥으로 나갔다.
“유린 씨. 입단권유 거절하셨으니까 오늘은 훈련실 출입 금지입니다. 저 확실히 말했어요.”
“예? 아니 저도 훈련하러 온건······ 알겠습니다.”
*
‘···도와주기 싫다.’
하젤린은 땅바닥에 들러붙을 듯 열심히 운동하는 김세진을 바라보며 입을 삐죽 내뺐다.
솔직히 도와주기 싫었다. 물론 고블린 연금술사, 여기서 운동하는 김세진 덕택에 자신이 연금계에서 무시못할 저명인사가 된 건 충분히 고맙다. 넘칠 듯한 은혜다.
그러나 이 불공평한 상황에는 너무 질투가 났다. 못된 심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법사는 본래 질투와 시기와 배척, 독점의 족속. 게다가 그들이 지닌 ‘마나’에 관한 자부심은 격 자체가 다르다.
그리고 일선에서 반 발자국 정도 물러나 있다고는 하나, 하젤린도 일단은 마법사.
그녀는 이런 경이로운 상승폭은 들어 본적도 경험해본 적도 없었다. 피와 땀을 흘려가며, 뼈빠진 훈련을 통해 일궈낸 마나능력이다. 그런데 이대로 1년··· 1년이 뭐야. 반년만 지나면 이 남자는 자신보다 더 많은 마나를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너무나도 불공평한 재능-혹은 특성-의 차이였다.
“후읍!”
허나 그녀의 불편한 마음을 모르는 세진은 오직 훈련, 훈련에 열중할 뿐이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한달여가 지난 지금은 별로 그렇지도 않았다. 마나가 몸으로 스미는 청량감은 훈련의 모든 고통을 이겨낼 만큼 상쾌했으니.
‘말이 안돼. 왜 저번 주보다 마나 상승폭이 더 크냐는 말이야.’
보통 하루에 그만한 마나를 흡수했으면 그 다음은 흡수량이 작아져야 정상이다. 몸이 마나를 담을 수 있는 공간이 한정되어 있으니. 하지만 이 남자는 아니었다.
근데 왜 이 남자만 예외냐고, 그녀는 울상이 되고 말았다.
“..그만, 이제 그만할까요?”
하젤린이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아뇨. 조금··· 더. 할 수 있는데.”
그는 이를 악물어가며 한 번의 팔굽혀펴기를 더 성공했다.
“···.”
하젤린은 심통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고, [‘마력’이 2, 마나 친화력이 1만큼 상승합니다.]
이런 종류의 상태창이 두 세번 더 뜨고나서야 김세진은 만족했다.
*
훈련은 총 3시간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는 사이 유세정은 당장 내일 있을 프리젠테이션의 준비를 해야한다면서 집으로 떠났고, 주지혁은 이혜린과 함께 데이트를 하러갔다.
“데려다 드릴게요.”
주차장. 세진이 자동차 문을 열며 말했다.
“흠···. 네.”
하젤린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훈련을 도와주는 것은 겉보기에는 쉬워보여도 꽤나 많은 마나를 필요로 하여서, 머리가 약간 어질거려 차를 타는 게 나을 성싶었다.
“타세요.”
하젤린이 조수석에 올라타고, 뒤이어 세진이 운전석에 올랐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드라이브를 했다. 대부분 유세정과 단체 '더 몬스터'에 관련된 주제들이었다.
"세정 씨, 귀엽던데요? 메신저로 맨날 뭐하냐고 물어보고, 그러다가 귀신같이 끊기고 그러거든요? 요 근래 그게 뭐 때문인지 생각을 한번 해봤는데, 아무래도 저를 견제하는것 같아요."
"견제요?"
"네. 세진 씨랑 연락이 안 될때, 혹시 이 남자가 하젤린이랑 연락하고있나- 뭐 이런 심리로 저한테 메세지를 보내서 찔러보는거죠."
김세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에이 설마요."
"에이? 정말이라니까요? 맨날 첫 마디가 '언니 뭐하세요?' 라니까요. 아니면 '누구 만나세요?' 라던가. 어쩔때는 무서울 지경인데··· 잘 좀 대해주세요. 그쪽 되게 많이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김세진이 하젤린을 향해 웃어보인 그 찰나.
늑대의 직감이 의식에 서늘한 경종을 울렸다.
순간적으로 체감시간이 늘여지고, 세상이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차체의 옆구리 쪽으로 무형(無形)의 물체가 별안간 강하게 치밀어왔다. 뭔지는 모른다. 마법인지 마나인지 아니면 언데드인지. 김세진은 재빨리 브레이크를 밟고,하젤린을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늘려진 시간속에서 그녀의 표정변화가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보였다.
신기했으나 감상할 틈은 없었다.
재빨리 체내의 마나를 끄집어내어, 그녀와 자신을 감싸는 막을 형성한다. 푸르른 막은 원형이 되어···
그 직후.
흉악한 충격과 함께 차체가 하늘로 치솟았다. 부웅? 활공한 승용차 위로, 거대한암흑이 쏟아져내렸다.
*
“···괜찮아요?”
영롱한 푸른빛이 비치는 마나의 막 속에서, 김세진이 하젤린의 어깨를 뒤흔들었다. 오만상을 찌푸린 그녀는 뒷목을 부여잡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긴 한데··· 어떤 개같은 새끼일까요?”
“···.”
다소 과격한 언사에 세진은 잠시 말을 잃었다.
때마침 마나의 막 너머로 저벅저벅- 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오네.”
하젤린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서 전신의 마나를 끌어올렸다.
“이거, 어떻게 치워요?”
그리곤 세진이 생성한 마나의 막을 건드리며 묻는다.
“···아. 잠시만요.”
이렇듯 분노한 하젤린의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세진은 최대한 공손하게 막에 구멍을 뚫었다.
흉악하게 일그러진 차의 뼈대가 가장 먼저 보였다.
“──.”
하젤린이 눈을 감은 채 정체모를 영창을 외웠다.
타아아앙-!
그 즉시, 뚫린 구멍 사이로 어마어마한 공기파가 뿜어져나가 방해물이 될 차체를 통째로 날려버렸다.
“됐어요. 다 풀어봐요.”
“아. 예.”
그가 방어막을 풀자, 하젤린이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반파된 차체를 빠져나왔다.
“···나와. 어떤 놈들이니? 지금 안 나오면 산채로 태워버린다?”
하젤린의 스산한 목소리가 인적이 드문 도로 한 가운데에서 울렸다.
그 목소리에 반응한 듯, 뒤이어 어둠속에서 하나의 신형이 솟아올랐다.
“너, 미쳤구나? 장난치고는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
그러나 한 명이 아니었다. 둘, 셋, 넷, 다섯, 여섯··· 총합 여덟. 심상치 않은 여덟개의 신형이 갑작스레 나타나자, 하젤린은 살짝 긴장한 듯 혀로 입술을 핥았다.
“···작정하고 왔네. 어디서 보냈니? 삼합회 쪽이야?”
그리고 그녀는 뭔가 이상한 착각을 한 듯했다.
"..마피아 쪽이구나? 그래. 그럴 것 같기는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