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전야 (1) >
금강산의 아득한 지하에는 일족 노스페라투가 모여사는 생츄어리가 존재한다.
“통로 하나가 완전히 궤멸되어버린 건 예상외이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어찌어찌 일은 제대로 된 것 같습니다.”
노스페라투는 사회에 녹아든 여타 뱀파이어와는 다른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전지전능한 로드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대외적으로 공표하지는 못했으나,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뱀파이어의 사회에서 지극한 천대를 받는 그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차라리 인간사회의 틈에 녹아들어 축생의 피를 섭취하며 평등하게 살아가는 것이, 실수 한번에 모가지가 날라가는 가축만한 삶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
“계획이 예상보다 너무 급진적이군. 로드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지?”
“로드는 아직 동면(冬眠)에서 깨어나지 않아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 일환으로 노스페라투의 수장 ‘수테르데’는 인간을 이용하여 통로를 조성하려는 바토리의 계획을 방해하려 했다.
물론 그 통로가 오롯이 박살 날것이라는 예상은 이쪽도 하지 못했다.
그저 레드문 이후. 몬스터의 개체수가 순간적으로 줄어든 틈을 타, 몬스터 필드 깊은 곳까지 실종된 기사들을 수색하다가 ‘통로’를 발견하기를 바랐을 뿐. (만약 기사들이 발견을 하지 못했더라도 이쪽이 익명으로 제보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애초에 바토리는 로드의 계획보다 훨씬 성급했었습니다. 동면전에 모든 일을 끝내자는 주의였으니까요. 그래서 오히려 이 일이 로드의 귀에 들어가게 하지 않으려 애를 쓸 겁니다.”
수테르데는 기다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낮은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니 저희가 두려워해야 할 건 로드가 아닌 바토리의 진노입니다. 물증은 단언컨데 단 하나도 남아있지는 않겠지만, 바토리는 심증만으로 움직이는 단순한 여자이니까요.”
“후··· 그런 단순한 여자가 막대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무슨 일을 벌일까 두렵구나. 그래, 그건 그렇고. 내가 명했던 부분은 어떻게 되었는가.”
“예. 수장님의 말씀대로, 바토리 쪽에서 라이칸에게 저희 생츄어리의 위치와 내부구조를 모두 넘겼다는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하지만 라이칸과 특수경찰국은 아직까지도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흐음···.”
부하의 전언에 수테르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라이칸,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다. 허나 용병의 세계에서 개명이나 무명은 흔한 일이었고, 여태의 심상치 않은 행보로 보아 잔뼈가 굵어도 너무 굵은 인물임은 확실하다.
레드문의 징조를 포착해내고, 숨은 뱀파이어, 그것도 지극히 위험한 바토리 일족들만 사살할 정도의 능력을 지닌 용병이라면······.
“그렇다면 라이칸 또한 우리의 저의를 어느정도는 눈치챈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금은 위협이 아닐 것이라 판단한 게지."
과연, 라이칸은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인물이었구나. 수테르데는 무거운 감탄을 터트렸다.
"그러니 일단 우리는 곧 깨어날 로드에게만 모든 초점을 맞추면 된다.”
로드는 뱀파이어의 생사여탈권을 지니고 있다.
물론 그것이 절대적인 죽음과 삶을 모두 관장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흡혈귀의 ‘흡혈본능’을 조절한다는 것은 그와 어느정도 비슷한 의미를 띤다.
“예. 알겠습니다.”
수하는 절도있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둠속으로 녹아 들었다.
* * *
같은 시각, 더 몬스터 단체의 지하 훈련실.
김세진은 오늘도 일상이 된 무술훈련을 하고 있었다.
“김유린 씨?”
“···아, 예?”
“뭐하세요?”
“그··· 아닙니다.”
하지만 교관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김유린은 아까부터 대련에 제대로 임하지 않고 자꾸 세진의 냄새를 맡으며, 그 속에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오크의 향기를 찾는 듯했다.
향기는 무슨 ‘폼’을 취하고 있느냐에 따라 확연히 다르기에-물론 비슷한 구석은 분명 존재한다- 별 다른 걱정은 되지 않으나, 이렇게 훈련시간을 날로 먹으려는 건 좀 곤란하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이만 하면 안되겠습니까?”
김유린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참담하게 중얼거렸다. 참으로 착잡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요 근래 2주 간. 멍하니 지내는 일이 잦아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잊혀지기는 커녕, 기이한 그리움은 더욱 진해졌다. 지금 자신이 품고있는 감정이 정녕 그 오크를 향한 연정(戀情)인지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만약 애정이라면, 당장 끊어내야 하는 감정일 것이었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다. 미녀와 야수, 그보다 더한 오크와 여기사. 그것은 결코 이뤄질 수 없고, 이뤄져서도 안 되는 금기다.
하지만 늦바람이 무섭다는 말이 이러할까, 평생토록 어떤 남자도 마음속에 담아본 적 없었던 그녀는 자꾸만 그 오크가 떠올랐다.
아니 떠오를 수 밖에 없었다. TV만 틀면, 기사단에만 가면 온통 죄다 영웅오크의 이야기로 들끓는데, 그때의 추억(?)이 상기되지 않을리 없다···.
“···저기요 김유린 씨? 요즘···.”
“그, 그런 거 아닙니다.”
그녀는 어느새 제 발을 저리는 솜씨도 제법 늘어 있었다.
“···.”
“그냥 요즘 심(心)적으로나 신(身)적으로나 피로하군요. 아무래도 레드문의 후유증인 듯한 것이···. 죄송합니다.”
그녀는 세진의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그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어쩔 수 없죠.”
그는 그렇게 말하며 연습용 검을 보관함에 꽂았다.
“···감사합니다.”
김유린도 마찬가지로 검을 내려놓고서 샤워실로 총총총 발걸음을 움직였다. 세진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한숨과 함께 소리쳤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일이 바빠서.”
“아, 예. 괜찮아요.”
그는 바삐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녀의 지독한 상사병을 어느정도는 해소해주기 위해서. 행선지는 이미 알고있다. 먼저 가서 기다리면 그녀가 알아서 찾아오겠지.
*
아직은 쌀쌀한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봄의 숲 속. 김세진-영웅오크는 수풀속에숨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저벅저벅-
30분정도 기다리자 발걸음소리가 들렸다. 오크는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김유린이었다.
심신이 피곤하다며 2시간 예정이었던 훈련을 30분만에 파토낸 그녀는, 훈련이 끝나자마자 심신이 더욱 피로해질 만한 몬스터 필드로 향했던 것이다.
"으음.."
높이 솟은 토벽 언저리 도달한 유린은 머뭇머뭇하며 연신 고개를 기웃거렸다.
그러다 이내 결심한 듯 조심스레 발바닥에 마나를 모으더니, 펑- 순간적인 연소를 통해 하늘높이 치솟아 토벽 너머로 넘어가버린다.
“···어?”
적당히 타이밍을 봐서 얼굴을 보여주려던 세진은 순간 당황해버렸다. 남자의 침소로 쳐들어갈 정도로 적극적인 여자인지는 몰랐는데···.
일단 수풀에서 빠져나온 그는 토벽의 먼 발치에서, 곧 나올 김유린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한 20분정도가 더 흘렀을까.
토벽 바로 너머에서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더니, 그 위로 사람의 신형이 뿅-하고 솟아올랐다. 김유린은 잡초 위로 부드럽게 착지했다.
“하아···.”
아마 안에 영웅오크 대전사가 없음을 확인했을 것이었다. 그녀는 깊은 한탄이 담긴 한숨을 푹 내쉬고서, 고개를 푹 숙인 채 힘없는 발걸음을 움직였다.
쏴아아-
때마침 봄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그 결을 타고, 가슴 속 깊이 각인되었던 예전의 그 향기가 콧속을 살랑였다.
“···!”
김유린이 황급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렇게, 그녀는 그토록 찾고 싶어하던 오크와 마주하게 되었다.
“아···.”
안 그래도 똘망똘망하니 커다랬던 눈이 두배 이상 확장되고, 정지화면인 양 모든 움직임이 멈춘다. 무려 호흡조차 않는 모습이었다.
오크는 일단 그녀를 무시하고 터벅터벅 토벽을 향해 걸어갔다.
“···저, 저!”
계속 내버려두면 자신을 지나쳐갈 기세였기에, 유린은 황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아··· 여, 역시 살아계셨군요.”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고, 두 손을 가슴에 고이 모은 채. 그녀는 조심스레 오크에게 말을 건넸다.
그를 마주하니 제 심장의 두근거림이 여실히 전해졌다. 이것은 자신이 어떻게 참아낼 수 없는 감정의 박동이었다.
“···.”
그러나 오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유린을 가만히 굽어보기만 할 뿐.
“저, 그 목소리를 한번만··· 들려주시면 안될까요···?”
아쉬운 사람이 더 간절하다고 했다. 여기서 아쉬운 건 명명백백 김유린이었다.
그녀는 너무 간절했으나, 오히려 그랬기에 김세진은 너무나 오글거렸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입가가 경련했다.
“부탁드릴게요. 아, 별 다른 의미는 아니고. 그저 그때의 감사를 전하기 위해서···.”
그러나 그런 김세진의 속마음과는 달리, 김유린은 세상 진지했을 따름이다. 감사를 전하는 것과 목소리를 내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전혀 모를 따름이지만.
“···꺼져라.”
오크의 첫 마디였다. 차가운 말에 김유린이 몸을 흠칫 떨었다.
어느정도 예상은 했어도 막상 거절당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럼에도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나마 주머니에서 물건을 하나 꺼냈다. 또 하나의 주머니였다.
“이건··· 감사의 표시입니다.”
“필요없다.”
오크는 냉정히 거부하고 지나치려했다. 이쯤 하면 포기할 줄 알았지만 그녀는 예상외로 끈질겼다. 제 얼굴만한 오크의 손을 강하게 붙잡고, 억지로 억지로 주머니를끼운다.
“이 이상 귀찮게 안하겠습니다. 포션이 많이 들어있어요. 아플 때 마시거나 바르면 돼요. 그럼, 저는 이만··· 꺼질게요.”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녀는 오크의 매정한 태도에 가슴이 찢어질 듯 상심하여, 고개를 아래로 처박은 채 뒤로 돌아섰다.
그대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너무 쓸쓸했다. 저건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던 김유린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크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작게 소리쳤다.
“멈춰라.”
다행히도 그녀는 무척 말을 잘 들었다.
그는 우뚝 멈춰선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 손목에 매워진 강옥(鋼玉)제 아대를 풀었다.
“받아라.”
겉보기에는 너무 크지만 신축성이라는 성질이 부가되어있어 충분히 그녀에 맞게 조절될 터. 오크는 유린에게 아대를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내리깔고서, 입술을 꽉 깨물 뿐.
“···.”
진짜 큰 상처를 받은건가. 본래 그럴 의도이긴 했으나 막상 세진은 어이가 없어졌다. 무슨 28살먹은 노처녀가 짝사랑하는 소녀처럼···.
“네 선물에 대한 나의 보답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유린의 턱을 들어올려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어느새 촉촉한 물기가 고인 눈망울은 너무나도 가여웠고, 진실로 아름다웠다.
순간 오크는 정신이 혼미해져 다른 생각이 들 뻔 하였으나, 다행히도 성욕억제포션의 효과는 아직까지 남아있었다.
“···받아라.”
그는 아까 그녀가 했던것처럼, 손을 붙잡고 억지로 아대를 쥐어주었다. 그리곤 냉정하게 뒤돌아선다.
“저··· 또 만날 수 있을까요?”
등 뒤로 그녀의 간절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아니. 다시는 오지마라.”
그러나 오크는 시리도록 차가운 한 마디를 대답으로 남겼다.
그럼에도 여인은 한참동안이나 그 뒷모습을 좇으며, 그가 건네준 투박하지만 단단한 아대를 꼬옥 움켜쥐었다.
*
“이런 빌어먹을!”
로브를 뒤집어쓴 한 남성이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상판은 그 주먹질 한번에 이분(二分)이 되었다.
“통로가 갑자기 왜 부서져!”
바토리는 시간낭비를 가장 싫어한다. 게다가 당장 어제 TV를 지루해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러니, 이제 그녀의 닦달이 도래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단 말이다.
“···저희도 잘··· 아무래도 레드문의 영향을 받은 리치의 마법과 겹쳐졌다거나, 모종의 방해꾼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씨··· 인조심장은 어떻게 됐어!”
문자 그대로 피땀을 흘려가며 만든 인공심장은 뱀파이어가 제조한 보물이나 다름이 없다. 그 자체만으로도 귀하지만, 통로를 여는데 가장 중요한 촉매가 될 것이었다. 절대 잃어버려서는, 빼앗겨서는 안되는 물건이다.
“지금 위치를 알아낼 방법을 찾고는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곳에 갇혔던 기사 중 한명이 가져갔을거라 생각됩니다. 일단 지금은 심장의 기운을 추적하려 시도하고는있습니다만···.“
“후···.”
사도(使徒) 베렌은 관자놀이를 강하게 짓눌렀다.
허나, 엎친데 덮친 격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수정구에 붉은색이 스며들었다.
바토리의 신호였다.
< 24. 전야 (1)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