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레드문 (6) >
널찍한 내부 전체가 적색의 사지(死地)로 변모하여, 붉게 물든 벽면에서 수십 수백의 서슬퍼런 촉수가 뿜어져 나왔다.
김세진은 마나를 부려 제 몸을 애워싸게 만든 뒤, 초고온의 백열(白熱)로 그 성질을 변환했다.
호기롭게 쇄도한 촉수는 오크를 보호하듯 둘러싼 고열을 당해내지 못했고, 비늘에 채 닿지도 못한 채 모조리 녹아내렸다.
─크어어어어!!
내부에서부터 오크의 야성이 들끓었다.
세진은 포효를 내지르며 인형에게 돌격했다. 동굴이 격동하고 대기가 뒤흔들리는, 열화(烈火)의 쇄도였다.
하지만, 그 패악적인 외침에도 인형은 겁을 먹지 않았다. 다만 영창을 외며 다음 마법을 준비할 뿐.
투쾅-!
인형의 목전에 도달한 오크가 메이스를 내리쳤다. 굉연한 폭음, 매캐한 연기가 일렁이며 온 사위를 가렸다.
오크는 검은 연기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연신 인형을 몰아붙였다. 메이스로 놈의 베리어를 깨부수고, 맨주먹으로 머리통을 강타한다.
“끽- 껙-“
가격당할 때마다 인형은 기이한 소리를 냈다.
그렇게 오크는 인형을 압도적으로 밀어붙였으나, 별안간 인형의 가슴팍에서 기이한 기공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순간 오크의 직감이 서늘한 경종을 울렸다.
그러나 오크가 물러서기도 전에, 기공은 예리한 일섬이 되어 그 가슴팍을 꿰뚫었다.
“끅···.”
치열한 격통이었다. 그러나 그 통증이 오히려 오크의 맹목적인 본능을 일깨웠다. 시야가 붉게 물들고, 전신의 근육이 분노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조건완료: 죽음과 맞닿은 치명상 (1/3)]
- 오크 족장이 될······
알림창이 떠올랐으나, 지금의 세진은 눈에 뵈는 것이 없었을 따름이다.
─크어어어어!!!!!
오크는 분기탱천하여 체내에 영체상태로 스며든 포션을 모조리 사용했다. 상처가순식간에 아물고, 활력은 미칠듯이 솟아올랐다.
*
“뭐해요 대장님! 뛰어요!”
이혜린이 머뭇거리는 김유린을 잡아 끌었다. 그녀는 순순히 혜린을 따랐다. 오크의 목소리에 내재된, 마력적 작용 때문이었다.
기사들이 달리는 와중에도 등 뒤에서는 격렬한 전투의 증거가 전해졌다. 메이스가 무언가를 파괴하는 울림, 둔탁한 박투의 소리, 무엇보다 노면을 울리는 오크의 포효.
그때마다 유린은 무언가 착잡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길 반복했다. 그녀를 10여년 이상 알아온 혜린으로서는 난생 처음보는 아련한 눈길이었다.
‘이거 진짜 심각한데?’
그녀의 유별난 반응에 혜린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간 남자를 아무리 못 만났다고는 하여도 왜 하필 오크를···.
콰아아앙-!
그때, 등 뒤에서 새하얀 백열이 피어올라 잠시나마 동굴 안을 환하게 밝혔다. 김유린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으나, 동시에 머릿속 깊게 각인된 오크의 음성이 되새겨졌다.
‘그 쪽으로 계속 달려라.’
그래서 그녀는 뜀박질을 계속했다.
그렇게 30분여를 더 달렸을까, 마침내 기사들은 무려 40시간 동안 헤맸던 빌어먹을 결계의 출구를 발견했다.
환희가 담긴 환호를 내지르며 출구를 나서니, 이곳은 녹음이 울창하게 우거진 숲 속, 키 큰 나무의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부서져 내렸다.
가장 먼저 상쾌한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왔다. 40시간동안 음습한 동굴 안에 갇혀있었던 기사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청량하고 상쾌한 새소리였다.
“···근데 여긴 어딥니까?”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재빨리 현실을 직시한 기사 한 명이 말했다.
“아. 통신 되는 사람있나?”
본래 리더는 김유린이었으나, 그녀는 여전히 출구를 응시하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하였기에 이혜린이 대신했다.
“잠시만요!”
그러자 한 기사가 주머니 속에서 주섬주섬 수정구와 GPS기를 꺼냈다. 동굴 안에서는 먹통이었던 GPS, 그러나 지금은 원활히 작동되었다.
“위치는?”
“···.”
허나 기사는 대답없이 멍하니 GPS의 내용을 바라볼 뿐이었다.
“뭔데? 야, 뭐냐고!”
이혜린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치자, 기사는 그제서야 침을 꿀꺽 삼켰다.
“···빨리 도망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곳은 몬스터 필드의 가장 깊숙한 곳입니다. 당장 1차 방어선과도 50km나 떨어져 있어요.”
“···.”
순간 기사들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혜린은 한숨을 푹 내쉬고서 여전히 출구를 응시하는 유린의 손목을 붙잡았다.
“떠납시다. 위험해요 대장님.”
“···그래. 모두,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난다.”
멍한 정신상태에서도 방금 남자기사의 말은 들었던 것인지, 김유린이 단호하게 선언했다. 선언이라 하기에는 목소리에 너무 힘이 없었지만, 어쨌든 그러했다.
그렇게, 기사들은 최대한 빠르게 달려 몬스터 필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아주 깊숙한 곳이니 만큼 중간중간에 흉악한 중상급 몬스터들이 많이 출몰했으나, 고작 중상급 수준의 몬스터는 김유린의 일격에 모두 손쉽게 정리되었다.
그녀의 검격은 오늘따라 유난히 난폭했다.
“···화나셨어요?”
멋모르고 습격해온 맨티코어 한 마리가 육분(肉粉)이 되어버리자, 이혜린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 전혀. 어서 빨리 달리기나 해라. 시간이 없다.”
그녀는 한마디를 내뱉고서 다시금 뜀박질을 계속했다. 혜린은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그 뒤를 빠르게 쫓았다.
*
"하아···. 하아···."
격렬한 전투의 열락이 아직 남아있는 동굴, 김세진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무려 3시간 동안의 치고 받는 싸움 끝에, 그는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스킬을 총동원하여 인형을 작동불능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희생은 결코 적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인형은 뭔 놈의 내구도가 이리도 높은지, 포션이 없었더라면 당장 과다출혈로 자신이 먼저 쓰러졌을 정도이니.
“흐···.”
그는 박살난 채 동굴 바닥에 널브러진 인형의 가슴팍에 손을 쑤셔 넣었다. 차갑지만 확연하게 박동하는 인조심장을 움켜쥐고서, 뽑아낸다. 뜯겨진 가슴에서 선혈이 분수처럼 튀어올랐다.
세진은 그것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몸과 분리되었으면서도 이 심장은 그 맥박을 계속하고 있었다.
[인조심장] [등급: 보물]
- 사람의 심장과 수백 개의 몬스터마나석을 조립하여 만든 인조심장. 지니고 있기만 해도 혈관을 흐르는 마나의 흐름이 증폭됩니다.
- 이 심장에는 총 (23/30)개의 마법이 저장되어있습니다. 마나만 충분하다면 이심장을 매개로 마법의 사용이 가능하고, 또 다른 마법을 새겨넣을 수도 있습니다.
“···흠.”
보아하니 여러모로 쓸모 있는 물건 같았다.
수백 개나 되는 몬스터의 마나석이 재료로 사용되었으므로 당장 흡수해도 급진적인 무력발전을 도모할 수 있거니와, 영체화로 몸 안에 지니고 다니면 마법을 사용할수도 있게 될 테니.
일단 그는 인조심장을 영체의 형태로 변환하여 제 몸 안에 보관하고서, 출구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 * *
같은 시각. 기사들은 마나보법을 십분 활용하여 고작 한 시간만에 몬스터 필드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저 멀리 최후 방어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부상자들의 신음이 가득했으나, 그래도 방어작전은 명백한 성공으로 끝나 있었다.
“어! 저기 기사님들이 옵니다!”
누군가가 산속에서 터덜터덜 걸어오는 기사들을 가리키며 크게 외쳤다. 순간 수천 수만쌍의 눈이 그들에게로 향했다.
“와, 와아~ 드디어 집에 갈 수 있겠네에~”
혜린은 김유린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나 유린의 어두운 표정은 풀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 저기 현석 단장님이에요!”
때마침 저 멀리 김현석의 얼굴이 보였다. 이혜린은 기회라는 듯이 소리쳤다. 그제서야 유린의 굳은 낯빛이 살짝 꿈틀거렸다.
“걱정 많이 하셨겠는데··· 뭐해요? 어서 안 가고~”
“어, 어? 자, 잠깐만!”
혜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유린은 당황하면서도 빠른 걸음으로 김현석에게 다가갔다.
“복귀인 것이냐?”
김현석은 김유린을 마주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예. 실종된 37인의 기사, 모두 무사복귀를 신고합니다.”
“그래.”
자신의 딸에게는 칭찬이 수전노만큼 인색했던 현석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는 한시도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제 딸의 어깨를 자랑스레 두드렸다.
“고맙다. 수고했다.”
“···.”
아주 간단한 두 마디였을 뿐이다. 그러나 김유린이 그 울림을 통해 느낀 감동은 격을 달리했다. 속에서부터 치미는 울컥함에 어느새 촉촉해진 동공이 그것을 대변한다.
“이제 가자꾸나.”
김유린은 눈가를 조심스레 훔치고서 의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
기자회견을 끝마친 김유린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족히 수백은 되는 기자들에게 시달려야만 했다.
별 대답할 가치도 없는 이상한 질문은 예삿일이고, 동굴에서 왜 스캔들이야기가 나오는지는 그녀로서는 결코 알아낼 수 없는 의문이었다.
역시.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기자보다는 몬스터를 상대하는게 훨씬 더 수월하고 편하다.
“···후우.”
헌데 막상 휑뎅그렁한 집으로 돌아오니 가슴 한 켠이 쓸쓸해졌다. 거진 10일 동안 집을 비웠기 때문일까, 집 전체가 쌀쌀했다.
괜히 외로워진 유린은 욕조에 물을 틀어 놓고서, 적적해진 방안을 달래기 위해 TV를 켰다.
─이번에 37인의 기사가 탈출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도움은 ‘영웅오크’가 준 걸로 밝혀졌습니다.
“아···.”
때마침 흘러나오는 뉴스에서 영웅오크가 언급되었다. 그래서 유린은 다시금 그를떠올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 오크는 지금 곁에 없다. 다만 그 듬직한 향기와 남자다웠던 목소리만이아릿하게 남아 가슴을 저밀 뿐.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 오크는 무사히 살아서 그곳을 탈출했을까. 아니면··· 탈출하지 못하고 전사해버렸을까.
“···보고싶다······어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밖으로 내뱉은 말에, 자신도 깜짝 놀라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기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오크는 기사들이 갇힌 결계를 부수고 굶주린 기사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등, 말 그대로 영웅적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뉴스가 이어졌다. 그러자 오크와 동굴에서 함께 지냈던, 당장 어제의 기억들이 상기되었다.
따뜻했던 담요와 맛있었던 음식, 그리고 단단한 허벅지와 부드러운 손길까지···.
거기까지 떠올리니, 별안간 심장박동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진짜 미쳐버린 건가?”
그에 유린은 재빨리 TV를 끄고서 화끈해진 자신의 두 볼을 움켜쥐었다. 모태솔로로 살아왔던 28년 동안의 굶주림이 이제서야 난리를 피우는건가. 그래도 인외(人外)를 좋아하게 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쫄쫄졸?
마침 욕조에 받아놓은 물이 넘치기 시작했다.
그래, 목욕으로 이 이상한 잡념을 떨쳐버리자. 그녀는 옷을 훌러덩 벗어 던지고서욕실로 직행했다.
"어우야···.”
그러나 적당히 뜨뜻한 물에 몸을 담궜음에도 오크에 관한 생각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안 죽었겠지? 그렇게나 강한데···."
아니, 오히려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때 오크의 무위와 듬직했던 몸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답답해진 김유린은 눈을 꼭 감고서 물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표면 위에 물방울이 부글부글- 피어 올랐다
* * *
1주일 뒤.
“요즘 유린언니 장난 아니야. 맨날 사냥이라는 구실로 영웅오크 부락지를 기웃거린 다니까?”
“···와. 정말로요?”
이혜린의 말에 유세정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진짜. 매일 업무 끝나면 한번 들리는게 일상이야.”
그리고 세정의 옆자리에 앉은 김세진은 목이 타서 생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유세정은 그런 그를 의아하게 살펴보다가, 틈을 노려 그의 손을 감싸쥐었다.
“오빠, 입맛에 안 맞아요?”
“어? 어··· 아니 그냥.”
김세진은 고개를 저으며 고민했다. 유린에게 한 번 얼굴이라도 비쳐줘야 하나.
“···두 사람은 근데 뭐에요? 진짜 사귀어요?”
이혜린이 미간을 좁힌 채 그런 둘을 살폈다.
“아니.”
그의 즉답에 유세정이 무진장 상처받은 표정이 되었다.
“···아직.”
한마디를 덧붙이자 그제서야 얼굴이 조금 풀린다.
“뭐예요 그건.”
그러자 혜린은 어이없다는 듯 그를 한번 쏘아보고는, 세정에게 엄중한 경고를 했다.
“세정아 조심해. 이런게 바로 어장관리야.”
“네. 알아요. 그래서 나중에 제대로 결판을 내려고요.”
“아서라. 아서. 어디 어린 놈이.”
괜히 찔린 김세진은 쓸데없이 결연한 그녀의 이맛살에 딱밤을 튕겼다.
“앗! 뭐가 어려요. 이제 나도 성인인데.”
세정이가 불만을 토로했다. 김세진은 그저 웃어넘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