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하는 몬스터-80화 (80/174)

< 23. 레드문 (5) >

총 37인의 기사들은 김유린과 오크를 필두로 때아닌 동굴탐험을, 그것도 무려 24시간동안 연속으로 하는 중이다.

마법문양을 부수면서 혹한이었던 추위가 그저 쌀쌀함 정도로 격하되었기에, 점점 주려오는 배와 솔솔 몰려오는 피곤함을 제외하고는 별 다른 생리적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별안간 결계가 파손되는 것을 막는 방어기제로 보이는 기이한 몬스터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케르베로스를 닮은 머리 세 개 달린 개, 오크의 몸에 사슴머리가 달려있는 괴이한키메라, 둥둥 떠다니는 눈알-눈알에서 촉수를 뿜어내는 모양새가 여간 그로테스크한 게 아니었다- 등등···.

이 곳에 표류된 기사들은 모두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마나를 사용할 수 없었기에, 모두 영웅 오크가 나서서 손쉽게 처단했다. 기사들이 긴장할 정도로 꽤 강력한 몬스터도 오크의 메이스에는 감자칩처럼 쉽게 부스러질 따름이었다.

“어디 한번 봐요. 아, 많이 긁혔네···.”

허나 모두 레비아탄의 비늘을 뚫을 깜냥은 되는 몬스터여서 흉터는 많이 남았다. 그럴 때마다 김유린은 허리춤에 메어진 가방에서 비상용 포션을 꺼내 오크에게 발라주었다.

그리고 여타 기사들은 참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깨가 쏟아지는 그들을 관람하였다.

“···저, 저거 진짠 것 같은데? 유린 기사님은 나한테도 저렇게 해준 적 없었는데···.”

그 중에서 김수겸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까지 질투를 했다. 용기만 있다면 저 사이에 끼어들어 둘을 갈라내고 싶었지만··· 저 어마어마하게 장엄한 기골과 패악적인 메이스를 움켜쥔 오크 곁으로는 감히 다가갈 수 없었다.

“에이 설마··· 설마··· 그래도 그러면 재밌긴 하겠다. 놀릴거리도 많이 생기구.”

이혜린은 웃는 낯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감상했다.

“아~ 핸드폰만 있었어도 영상으로 남겼을 텐데··· 아쉽네 아쉬워.”

이런 음울한 동굴에서도 이혜린은 특유의 활달과 낙천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그 즐거움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동굴의 길이가 문제였다.

하루 24시간을 꼬박 걷고도 6시간을 더 걸은 기사들은 결국 피로를 견뎌내지 못하고, 동굴 한 가운데에서 야영을 하기로 결정했다.

행군을 멈추자마자 수 많은 기사들의 배에서 나는 꼬르륵- 꼬르륵- 소리가 하모니처럼 메아리쳤다.

“아아아···.”

기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공복이다. 어렸을 적부터 훈련과 마나심법을 통해 신체가 발달된 탓에 기초대사량 또한 높기 때문인데, 김유린은 그 중에서도 특히 심했다. 주린 배에서 범람한 위액의 쓰라림이 전신으로 퍼져 식은땀까지 흘릴 정도였으니.

‘···무슨 마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놈들인가.’

김세진은 속으로 불만을 터트렸지만 그래도 고민을 해야만 했다.

그의 허리에 메인 가죽주머니는 확장마법이 부가되어 있어, 자신이 거진 한달동안 생활할 수 있을 만한 식량은 물론. 요 근래 사냥을 통해 여러 짐승들의 사체도 많이 들어있다.

그걸 꺼내면 적어도 당장의 굶주림은···

─꼬르르르륵

어디선가 동굴을 진동시키는 굉음이 들려왔다. 오크가 깜짝 놀라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부끄러운 듯 얼굴이 시뻘개진 채 시선을 회피하는 김유린이 있었다.

“으으···.”

그녀의 신음에 결국 오크는 피부가 깨끗하게 발려진 멧돼지 고기를 하나 꺼내고 말았다.

이건 몬스터와 짐승의 경계에 위치한 ‘트라봉 멧돼지’라는 야수인데, 그 맛이 좋은걸로도 유명해 최고급 요리재료로 사용된다.

“어!”

“아앗!”

주머니에서 새빨간 고깃덩어리가 나오자 순간 기사들의 눈이 번뜩였다. 그 중 김유린은 말을 완전히 잃고 이쪽을 가만히 응시했다. 아, 방금 침이 한 방울 흘렀다.

“···아. 불이···.”

허나 그녀는 돌연 떠오른 생각에 낭패의 표정이 되어버린다.

오크는 속으로 웃으며 바닥에 마나를 깔았다. 자신과 기사는 마나를 사용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일까, 기사들과는 달리 별다른 어려움 없이 마나가 불로 변환되었다.

“와?”

그에 김유린을 비롯한 기사들이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달려들었다. 오크는 그 불길에 멧돼지를 뿌렸다. 치지지직- 치명적인 냄새와 소리가 기사들의 후청각을 동시에 자극했다.

그러다, 세진은 문득 조미료가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한번 해볼까.’

마나를 음식에 불어넣어 맛에 살짝 변화를 주는 것. 여태 단 한번도 시도는 안해봤으나, 고블린의 미각과 손재주 덕분에 ‘미각’에는 어느정도 경지에 다다랐다고 자부한다.

그러니 그저 간단히, 마나로 간단한 짠맛 단맛을 적절히 배합하여 음식에 넣기만 하면 되겠지.

“···크릉.”

오크는 기사들의 빈틈을 노려, 음식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

멧돼지의 크기는 컸지만 입이 워낙 많았던 탓에 몫은 1인당 6조각 뿐이었다.

하지만 음식에도 성질을 부가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김세진은 그것에 ‘포만감’을줄 수 있을 만한 성질을 부여했기에, 기사들은 그 맛과 포만감에 감동하여 모두 바닥에 주저앉게 되었다.

역시 산해진미를 만드는 최고의 조미료는 공복인 법이었다.

“···.”

그 중 김유린은 아직까지도 여운에 젖어, 눈을 감은 채 방금 입속에서 녹아 내렸던 맛을 되새기고 있는 중이시다.

“이제··· 먹었으니까 조금만 잡시다···.”

뒤에서 어느 이름모를 남자 기사의 말이 들려오고, 많은 기사들이 동의를 표했다.그에 기사들이 하나 둘 씩 동굴의 차가운 바닥에 눕기 시작했다.

“대장님, 괜찮죠?”

이혜린이 나른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래. 너무 오래 걸었으니 조금만 쉬도록 하지.”

김유린도 게슴츠레 눈을 뜨고서 대답했다. 그렇게 모든 기사들이 순식간에 단잠에 빠져들었으나, 오직 오크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대전사 폼으로는 잠이 별로 필요치도 않으니 늘어진 기사들을 대신해 불침번을 자처한 것이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주변을 둘러보던 김세진은 갑자기 지루해져, 늘어져라 자고있는 기사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모두 다 그리 편한 표정은 아니었는데, 그 중 특히 김유린은 미간에 새겨진 주름이 없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불편한 얼굴을 보자니 돌연 재미있는 생각이 난 김세진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

잠에서 깬 김유린은 몸을 뒤척거리다가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머리맡이 무슨 강철베개라도 벤 것 마냥 딱딱했다.

“···.”

의문에 눈을 떠보니 가만히 눈을 감은 오크의 얼굴이 보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었던 그녀는 상황을 살펴보다가, 자신이 오크의 종아리에 머리를 베고 있음을 깨달았다.

"으아!"

깜짝 놀란 김유린이 벌떡 일어나자 오크도 따라서 눈을 떴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자는 데 깨워서."

그러나 김유린은 자기 잠버릇 때문에 오크의 허벅지를 벴다고 착각한 듯, 자기가 먼저 사과를 해버렸다.

"끄으~"

때마침 기사들이 하나 둘 씩 잠에서 깨기 시작했다. 김유린은 아직도 떨리는 가슴을 쓸어넘기고서, 애써 태연한 척 다시 행군의 시작을 알렸다.

"모, 모두 일어섯! 출발한다!"

*

무려 하루 하고도 한나절 동안의 행군 끝에, 드디어 저 멀리 동굴의 마지막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마지막 마저도 똑같은 어둠이었지만 김세진은 구분할 수 있었다. 여태까지와 동굴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널찍한 공간.

그러나 저곳에는 흉험한 기운 또한 동시에 느껴졌다.

몬스터와는 다르다, 또한 인간과도 다르다. 익숙한 피비린내. 이것은 뱀파이어의냄새였다.

김세진이 멈춰섰다. 오크의 거대한 발소리가 끊기자, 뒤쪽에서 자그마한 소란이 일었다.

“무슨··· 일입니까?”

유린이 오크의 팔을 조심스레 붙잡으며 물었다. 너무 자연스러워 세진은 순간 목소리를 낼 뻔 했다.

“···.”

그는 말 없이 늑대 동공을 최대치로 가동했다. 순간 시야가 넓게 뻗어지며 동굴의끝까지 닿았다.

출구가 하나 있었으나, 웬 이상한 노인이 출구를 가로막은 채 수정구를 부리며 기묘한 주문을 외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저건 노인이 아니라, 노인의 형태를 한 하나의 ‘인형’이었다.

'..뭐야 저건.'

탐색을 마친 오크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김유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감히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어, 할 수 있는 짓이라곤 똑같이 그녀의 눈을 마주보는 것 뿐이었다.

“예?”

그러자 김유린이 입을 살짝 벌린 채 고개를 갸웃했다. 귀여웠다. 단순한 오크는 본능이 바로 행동으로 이어져,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말았다.

순간 바로 앞쪽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혜린과 김수겸이 입을 떡 벌리고, 멍하니 있던 김유린의 얼굴은 급속도로 빨갛게 물들어갔다.

“···크릉···.”

뒤늦게 제 실책을 알아차린 오크는 퍼뜩 손을 치우고 메이스를 들어 저 먼 곳, 출구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뭐···.”

하지만 주변의 기사들과 김유린은 얼마간의 충격에 빠져 그 행동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짐짓 화가 난 척 그르렁거려도 깜짝 놀라기만 할 뿐.

결국 오크는 먼저 앞서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기사들은 오크의 뒷모습이 아주 작아지고 나서야 부랴부랴 그의 뒤를 쫓았다.

“오크치곤 멋지긴 한데 그래도···.”

“알아, 안다고. 그런거 아니라니까.”

이혜린이 조심스레 물어오자 김유린은 언제나처럼 퉁명스레 대답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크게 박동하는 심장은 그 이후 꽤 오랫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

기사와 오크는 출구로 보이는 개활지에 도착했으나 감히 기뻐할 수 없었다. 기묘하고 괴이한 기운을 풍기는 꼭두각시 인형의 존재가 너무도 위압적이었다.

“마나는 움직일 수 없어도 무기는 있으니 협공을 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요.”

이혜린이 장도를 뽑아들며 말했다. 하지만 오크는 그녀를 제지하고서, 인형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갔다.

기사들은 마나를 사용할 수 없고, 상대는 인형이긴 하지만 막강한 뱀파이어의 분신. 그리고 무엇보다 가슴속에 응어리진 투쟁심이 뜨겁게 반응하니, 이건 자신이 상대하는 것이 옳다.

오크는 뒤쪽의 기사들을 한번 바라보고는 메이스를 들어 놈의 뒤쪽에 있는 출구를 가리켰다.

그리곤 그들이 감동하기도 전에, ─그어어어어!

야성의 포효와 함께 인형에게 돌격했다.

그 순간 발 밑에서 적색촉수가 뻗어져나와 발목을 붙잡았으나, 오크의 괴력은 허투루 있는 것이 아니다. 오크는 오로지 힘만으로 촉수를 끊어낸 뒤 인형의 옆구리에메이스를 휘둘렀다.

─탱! 콰아앙-!

뱀파이어의 인형이 마치 깡통처럼 튕겨져나가 바닥에 내리꽂혔다.

그렇게 방해물이 없어지자 오크는 다시금 출구 쪽을 가리켰다.

“···갑시다!”

그러자 기사들은 하나 둘 씩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직 한 명, 김유린을 제외하고.

“대장님, 뭐해요! 빨리 와요!”

“오크 씨. 같이, 같이 갑시다!”

김유린은 뱀파이어에게 돌격하려는 오크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동굴의 온 사방이 적색으로 물들었다. 그 적색 벽면에서는 날카로운 촉수가 뿜어져 김유린과 오크를 향해 쇄도했다.

모두 쳐내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오크는 김유린을 제 품 안에 꽉 껴안고서, 레비아탄의 비늘을 극도로 활성화했다.

허나 촉수는 그 고강도의 비늘을 뚫어내었고, 날카로운 날붙이의 따끔한 느낌이 등골을 서늘하게 적셨다.

“아 씨··· 왜! 으으···! 으아···!”

오크는 자신의 품에 안긴 김유린을 내려다보았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몸 안의 마나를 끌어올리려 끙끙- 애쓰는 모습은 안쓰러웠고 동시에 고마웠다.

허나 이대로 놔두면 이 답답한 여자는 끝까지 이곳에 남아있을 것 같았기에, 결국오크는 입을 열 수 밖에 없었다.

“···가라.”

남자보다 더 남자다운, 무척이나 장대한 목소리가 동굴 안을 무겁게 울렸다.

─츠스스스···.

김유린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듦과 동시에, 뱀파이어의 분신에게서 심상치않은 스산함이 느껴졌다.

“출구는 길다. 모두 탈출할 때까지 저 놈을 막아야 한다.”

오크는 그렇게 말하며 역전의 전사를 발동시켰다.

영화를 찍는 것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무슨 빌어먹을 상황인가 싶었다. 무엇보다이 여자가 너무나도 귀찮았다. 심장은 부서질만큼 크게 뛰고, 몸은 근질거려서 당장이라도 놈에게 달려들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은데.

왜 여기서 이년이랑 쓰잘데기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어야 하는지.

“보아하니 너희 인간놈들의 마나를 억제하고 있는 건 저 놈의 수정구라고 생각된다. 허나 방금 놈의 심장속으로 스며들었지.”

오크의 동공이 암적색으로 물들고, 전신에서도 마찬가지로 붉은 기운이 짙게 피어올랐다.

“그러니 저 놈을 죽이기 전까지는 마나가 흐르지 않는다는 뜻. 너는 이 싸움에서 쓸모가 없어. 방해만 될 뿐이니까, 썩 꺼져.”

오크는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져 나오지 못하는 그녀의 허리춤을 붙잡고서, 마치 투창하듯 출구 쪽으로 강하게 내던졌다.

"꺄악!"

무기 마스터리는 이런 상황에도 적용이 되는지, 투척된 김유린은 아주 절묘한 궤적을 그리며 출구쪽으로 골인했다.

“그 쪽으로 계속 달려라.”

그 마지막 한마디를 끝으로, 동굴 안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 23. 레드문 (5) > 끝

ⓒ 지갑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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