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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하는 몬스터-79화 (79/174)

< 23. 레드문 (4) >

엄습하는 한기와 제 몸을 투두둑 두드리는 물방울에 의해, 김유린은 눈을 떴다.

온 사위가 새까맸다. 잇새로 퍼진 숨결이 하얗게 번져 올랐다. 추웠다. 몸에 마나강기를 두르려했다. 허나 체내의 마나가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의 심각함과 의아함에 몽롱했던 의식이 번쩍 깨어졌을 때.

“···크으.”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고개를 비틀어보니 예의 ‘영웅오크’였다.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손을 살짝 뻗으면 닿을, 생각보다 가까운 자리에 오크가 있었다.

그녀는 거칠게 박동하는 가슴을 쓸어넘기며 몸을 일으켰다. 떨어질 때 부딪힌 건지 무릎 관절이 시렸다. 하지만 고통 따위 보다는 지금 이 공간의 탐색이 더욱 우선이었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자.

지반이 그대로 무너진 것 치고는 상당히 인위적인 동굴이다. 게다가 왜 인지는 모르겠으나 체내의 마나도 움직이지 않는다.

‘결계인가?’

그녀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동굴의 새까만 벽면을 훑었다. 그 새까만 면에 손가락이 닿자 이상하리만치 차가운 기운이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으으으으···.”

그녀는 순간적인 한기에 몸을 바들바들떨며 바닥에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지켜보던 김세진은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나를 많이 사용해서인지 졸려서 쓰러질 것만 같은데, 또 무슨 이런 귀찮은 상황인지···.

‘근데 진짜 여긴 어디야?’

늑대의 동공을 발현시키고 나서야 선명하게 보이는 동굴 내부, 그러나 이 동굴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한 줌의 빛도 없는 까마득한 어둠 뿐.

답답함과 짜증남에 오크는 자신의 미간을 짓눌렀다

“결계마법입니다.”

그때 김유린이 말했다.

“그냥 지반을 무너뜨리기만 하면 '강기'를 활용하는 기사들을 확실히 죽이지 못할가능성이 크니, 특수한 결계를 쳐 놓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리치는 이런 복잡한 이중 삼중 결계를 사용하지 못합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오크를 바라보았다. 제 말을 알아듣는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는 걸 보아하니 알아듣는 것 같았다.

“이성이 없는 리치들은 단순파괴적인 마법만을 사용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이건 분명, 사람의 짓입니다.”

“···.”

그리고 오크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답답해 죽겠네.’

김세진, 오크는 입이 근질근질했다. ‘인면구조’는 숙련도가 쓸데없이 잘 올라 벌써 B등급에 달했기에 오크 폼으로 언어를 구사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그러나 말하는 오크는··· 좀 그렇지 않은가. 물론 김유린은 말하는 고블린을 만난 전적이 있긴 하지만.

“그러면··· 일단 걸을까···요?”

김유린은 이 오크가 정말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지 반신반의하며 손짓을 했다. 그러자 정말 오크가 동굴을 앞서가기 시작했다.

"허어···."

그녀는 입을 떡 벌린 채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다가,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그의 뒤를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다.

*

아무리 걸어도 동굴의 끝은 보이지 않았고 김유린의 얼굴색은 점차 보랏빛으로 질려갔다. 심각한 저체온증이었다.

옆에서 바들바들 떠는 유린을 바라보며, 김세진은 잠시 고민했다. 지금 자신의 몸속에는 영체 상태로 스며든 코트형 방어구가 하나 있다. 그걸 실체화해서 건네주면 적어도 이렇게 떨지는 않겠지.

“···하아···.”

얼어붙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어찌보면 당연했다. 이 동굴은 오크인 자신도 으슬으슬한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추위가 사무치다. 그런 혹한 속에서 기사의 전부나 다름없는 마나갑옷, 일명 ‘강기’를 사용할 수 없으니···

“···하아, 읏.”

탁-

발이 돌부리에 걸린 것을 계기로 결국 김유린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녀는 흐려지는 의식을 부여잡으려 노력했으나, 이 이상 혹한을 견뎌낼 여력이 없었다.

그렇게 그녀의 눈이 스르르- 감겨졌다.

“후.”

오크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몸 속에서 방어구 하나를 끄집어냈다.

명품의 등위에 다다른 검은색 코트형 방어구. 온도조절 따위의 효과는 넣지 않았지만, 이 코트의 주재료가 된 ‘적암석’은 자연적으로 발열이 되는 암석이라 괜찮다.

“하아···”

오크는 김유린이 눈을 살짝 감은 틈을 타, 그 코트를 실체화 하여 코트가 아닌 ‘담요’의 형태로 순식간에 변환시켰다. 그리곤 연신 두 다리를 비틀거리며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김유린에게 뒤집어 씌웠다.

“···어어?”

그 즉시 담요에 내재된 적암석의 따스함이 유린의 전신을 파고들었다. 혹한속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에 그녀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끄앗!”

“···크음.”

오크는 그런 그녀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이내 그 가녀린 어깨를 붙잡고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

일어선 그녀는 제 몸에 둘러쌓인 따스한 담요를 힐끗 바라보았다. 어디서 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추위가 눈 녹듯 사라지니 마냥 좋을 뿐이었다.

“그··· 감사합니다.”

그녀는 오크의 단단한 팔에 붙들린 채 감사를 표했다. 참 이상하게도, 그런 그녀의 두 볼에는 발그레한 홍조가 올라있었다.

* * *

갑작스런 지반의 붕괴에 방어선은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수십에 달하는 기사가 실종되었고, 그 중에는 전력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고위기사 김유린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걸까요.”

칠흑기사단의 상급기사 박 현이 까마득한 아래까지 가라앉은 지반을 가리키며 물었다.

“마법으로 지반을 붕괴시킨 후, 미리 작성되었던 마법진을 이용해 소환과 결계마법을 발동시킨 것이겠지. 그 탓에 우리가 역소환을 노릴 수도 없어. 어쩔 수 없지만,결계 내부에서 직접 역소환을 해낼 수 있도록 기대하는 수 밖엔 없다.”

칠흑기사단장이자 이 방어선의 지휘관 김현석이었다. 그는 자신의 딸이 사라졌음에도 치밀한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요 지휘관님. 선두에 나섰던 김유린 기사님과 그 부하기사들 대부분이 실종되셨습니다. 이대로 두고 떠나기에는···.”

“평생을 독하게 살아왔던 아이다. 어떻게든 살아 돌아오겠지. 일단 우리는 최종 방어선까지 물러서서 마지막 하루를 대비하도록 한다. 더 이상 1차 방어선에서 버틸 수는 없다.”

만약 이 방어선을 포기한다면, 이곳에서 실종되었던 많은 기사들을 되찾기 더욱 힘들어진다. 이성적이지만 그렇기에 너무 냉정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부하기사는 감히 어떤 토도 달지 못했다.

이 지반 아래에는, 혹은 결계 속에는 김현석의 딸이 있다.

이건. 실종된 기사를 그 누구보다 되찾고 싶어할 사람이 내린 결정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

같은 시각. 한 명의 오크와 한 명의 여기사는 여전히 정체불명의 동굴 내부를 거니는 중이었다.

“동굴 곳곳에 마법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역시 이곳은 인공적으로 조성된 결계가 맞습니다. 게다가 저희 쪽의 마법사가 많음에도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걸 보면, 저희는 아마 ‘소환’의 형식으로 결계에 끌려온 것일 겁니다.”

김유린이 동굴 벽면에 새겨진 파란 문양을 유의깊게 살피며 읊조렸다. 그러자 오크도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그 문양을 함께 살펴보았다.

김유린은 그런 오크를 힐끗 곁눈질로 살펴보더니, 슬그머니 옆으로 몇 발자국 더 물러났다.

‘오크 치고는 진짜 사람처럼 생겼네.’

그러다 속으로 떠올린 생각에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이 영웅 오크는 하는 행동은 물론이거니와 외관부터가 특이하다. 오크 특유의 거대한 덧니 혹은 돌출이도 없고, 눈매를 비롯한 이목구비는 또렷하고 날카롭다. 말총처럼 묶은 머리카락도 쓸데없이 길고 윤기나서, 피부색만 하얗게 바꾸고 넙대대한 얼굴만 좀 어떻게 하면 충분히 멋진······.

“으으으···.”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왜 자꾸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지, 인간으로서 자기자신의 가치관이 스스로 의심될 지경이다.

"크릉!"

그 때. 동굴에 새겨진 문양을 지켜보던 오크가 별안간 메이스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갑작스런 상황변화에 김유린이 놀라기도 전에, 그는 메이스로 벽면을 강하게 가격했다.

콰앙-!

가공할 충격과 굉연한 파열음이 동굴 내부를 진동시켰다.

“끅!”

김유린은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럼에도 머리속에 댕- 하니 기묘한 종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그녀는 불평따위는 하지 않았다. 다만 방금 오크가 메이스를 내려친 곳으로 서서히 다가가 그 벽을 유심히 살펴볼 뿐.

“···달라진 건 없습니다.”

“킁.”

오크가 불만스런 콧김을 내뿜었다. 유린은 엷은 미소를 짓고는, 오크의 팔을 툭툭두드렸다.

“다시 걸읍시다. 그래도 왔던 길이 계속 반복되지는 않으니 계속 걷다보면 답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군요···?”

허나 말과는 달리, 뒤이어 확연한 변화가 느껴졌다. 시리도록 차가웠던 동굴의 기온이 살짝 올라간 것이다.

“···아, 아니 잠깐. 변화가 있습니다. 저······. 오크 씨?”

김유린이 이상한 호칭을 사용하여 오크를 불렀다. 오크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갑시다.”

두 사람은 발걸음을 빠르게 했다.

쾅- 쾅- 쾅-

그 이후로 마나문양을 발견할 때마다, 오크는 그것을 두들겨 팼다. 본래 이런 마나현상은 물리적 피해로는 타격이 가지 않는 법이지만, 오크의 무기에 새겨진 ‘성질’이 그것을 가능케했다.

“결계가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거진 5개 정도를 그렇게 박살냈을까, 결계자체의 희미한 진동을 느낀 김유린이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오크도 짧은 웃음을 터트리고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핫."

머리를 쓰다듬는게 이 오크의 버릇인지 습관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그의 손길을 기분좋게 받아들이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 오묘한 반응에 당황한 건 오히려 김세진 쪽이었다. 그는 흠칫 놀라, 본능을 억누르며 김유린의 머리에 올린 손을 치웠다.

***

동굴의 벽에 새겨진 마나 문양을 없앨 때 마다 결계의 효과가 하나 둘 씩 소거되었고, 그렇게 체감상 8시간 정도가 지났을 즈음. 두 사람은 혼절한 동료기사들을 다수 만날 수 있었다.

“아. 오크 씨!”

동굴 한 켠에 기절한 기사들을 뉘이고 있던 유린은 저 멀리 오크가 다가오자 버선발로 달려갔다.

오크의 어깨에는 두 명의 기사가 얹혀져 있었다.

“혜린이랑 수겸이에요. 후··· 다행이네. 고마워요 오크 씨.”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나름대로의 역할분담이었다. 오크는 동굴을 거닐며 바닥에 널브러진 기사들을 데려오고, 유린은 가장 안전한 곳에서 그들을 관리하며 깨어날 때까지 기다린다.

“천천히, 천천히 주십시오.”

자신과 가장 가까운 두 기사이기 때문일까, 그녀는 호들갑을 떨면서 두 통나무를 인계받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았다.

─끄응···.

때마침 가장 앞쪽에 누워있던 기사가 앓는 소리를 냈다. 김유린은 화들짝 놀라 그즉시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한 명이 깨어나자 마치 도미노처럼, 가장 먼저 발견된 사람들부터 좌르르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김유린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오크를 발견하곤 다시 한번 기절할 뻔 하다가, 유린의 말을 듣고는 다시금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등 급진적인 감정변화를 겪어야만 했다.

“그럼 탈출은 아직 인건가요?”

“마나를 가동하는 게 불가능한걸 보니 아직 몇 개를 더 부숴야 할 것 같다.”

오크에게 했던 조신한 말투는 금세 사라지고, 김유린은 상당히 사무적인 딱딱함으로 부하기사들을 대했다.

“후, 정말 다행입니다. 그래도 저 오크 놈 덕분에···.”

“···뭐?”

유린은 부하기사의 말에 미간을 살짝 좁혔다. ‘오크 놈’이라는 불손한 지칭이 왠지 모르게 마음에 안 들었다. 허나 그걸 가지고 트집을 잡아버리면 안 그래도 이상했던 소문이 더 퍼져 나가지는 않을까···.

“왜, 왜 그러십니까?”

“···저 오크 노, 놈은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다. 혹시 모르니 최대한 말조심을 하도록.”

그녀는 옆에서 목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오크를 곁눈질하며 최대한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아. 예.."

부하기사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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