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레드문 (3) >
레드문이라는 격랑이 휩쓸고 지난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적막과 고요함 뿐이었다.
이른 오전의 어스레한 햇볕 아래, 부상당한 기사들은 뒤쪽에 마련된 임시초소로 실려갔고, 전투의 피로에 시달리던 기사들은 막사까지 걸어갈 여력도 없어 대충 노면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이렇듯 가느다란 숨소리와 이따금씩 앓는 소리가 새어나오는 수라장에서도, 그러나 몇몇 기사들의 우선순위는 휴식따위 보다는 누군가를 놀리는 일이었다.
“···그런 거 아니라고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하니.”
그래서 막상 가장 피곤할 김유린은 휴식할 시간도 없이 변명을 해야만 했다. 역시영웅 오크를 두고 얼굴을 붉혔던 것이 문제였다. 그 발그레한 홍조는 과거 김유린의발언 ‘고블린이 이상형이에요’와 겹쳐, 그녀를 이상성애자로 몰고갔다.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저 대장님 그런 표정 처음 봐요···. 괜찮아요 대장님,저한테만 말해주세요. 저는 비밀을 잘 지키니까요.”
그 중 특히 이혜린은 한쪽 팔에 심각한 자상을 입었음에도, 발랄함을 잊지 않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김유린을 놀렸다. 사실, 혜린은 이러지 않고서는 작금의 현실을버텨낼 수 없었는 지도 모른다.
“아니, 진짜 아니라니까. 그냥 단지···.”
오크에게서 쏴아아 풍겨졌던 남자다운 향기에 잠시 당황했을 뿐이야-허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별안간 유린의 머릿속에서 뭔가 기묘한 스파크가 튀겼다.
오크의 향내는 분명 어디선가 맡았던 것과 비슷한 냄새였다. 피비린내, 쇠비린내와 섞여 그렇게 똑바로 와닿지는 않았으나, 감각이 워낙 예민한 그녀는 그 향기로부터 모호하지만 확실한 공통분모를 느낄 수 있었다.
“···단지, 그 다음은···? 아~ 진짜 어떡해, 우리 대장님 취향 왜 이래!”
“아, 아니라니까!”
“아앗! 대장님 그거 때문에 그동안 연애··· 으읍!”
유린이 황급히 달려들어 혜린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얼마 남지 않았던 기력마저 쓸데 없는 일에 쏟아 붇고 있자니, 향기의 출처에 대한 의문은 자연스레 잊혀지게 되었다.
*
살아남은 열댓 명의 오크와 함께 부족으로 돌아온 김세진은 일단 편안한 수면을 취했다. 허나 잠을 자는 시간은 고작 4시간이면 충분했다. 대전사의 몸은 그 이상의휴식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게 세진은 정확히 태양이 하늘의 중심에 떠오른 정오에 깨어나, 가장 먼저 핸드폰을 찾았다.
“아. 머핀이는 그럼 아무 이상 없는 거죠?”
─예. 붉은 달빛을 받지 않아 갑작스런 발작을 일으킨다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레드문은 피부에 직접 닿는 식으로 작용하는 광분·현혹현상이었고, 다행히 깊은 지하에 숨겨둔 머핀이에게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네. 그럼 앞으로도 단체일도 잘 관리해주세요. 뭐 엄청 큰일 아니면 한성 씨 선에서 처리하셔도 돼요. 아. 물론 직원을 뽑으려면 저한테 그 직원의 얼굴을 꼭 한번은 비춰주셔야 하고요.”
─예 단체장님.
조한성이 힘차게 대답했다. 그러나 세진은 아직 할 말이 남아있었다.
“제 말 잘 이해 하셨죠? ‘앞으로도’에요. ‘앞으로도’.
─···예?
“당장 이번주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단체 좀 잘 관리해달라고요.”
요 근래 생각한 게 있다. 단체는 발전할수록 더욱 전문화, 집적화 되어갈 텐데, 최종결정권자가 사회전반에 관련하여 무지하고 시간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치명적인 단점이 아닐까.
그러니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업무를 총괄하는게 나을지도 모른다. 아니, 나을 것이다. 어차피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은 그저 최종결재 밖에 없으니까.
─···단체장 님, 어디 멀리 떠나십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귀찮아서요. 게다가 조한성씨가 저보다 배는 똑똑하잖아요? 아, 그렇다고 완전히 물러나는 건 아니고. 한성 씨는 CEO로, 저는 대주주로. 뭐 이거랑 비슷한 식으로요.”
─그···그건.
“네. 알아요. 전화로 하기에는 조금 애매하니까, 나중에 직접 만나서 얘기합시다.일단 끊을게요. 제가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예, 예.
조한성은 갑작스런 초고속 승진에 멍한 정신 추스르면서도 용케 대답을 했다.
세진은 피식 웃고서 전화를 끊었다.
이제 다시 훈련을 해야할 시간, 그는 오크 대전사 폼으로 변화했다.
*
이튿날.
오우거 이상의 중상급몬스터가 마치 개미처럼 밀어닥쳐왔던 첫 날의 끔찍한 기억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금 두 번째 레드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이번에는 다소 헐거운 몬스터 웨이브였다.
게다가 아무래도 첫날이 특별했던 듯. 그 다음날,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출중한 기사와 마법사, 또한 이제는 익숙해진 용맹스런 일당천의 우군 ‘영웅 오크’까지 가세하니 레드문을 견뎌내는 것은 상당히 쉬웠다.
물론 레드문이 지속될 최소 일주일동안 이런 쉬운 몬스터 웨이브가 전부이지는 않겠지만, 기사들은 적어도 여유를 가지고 체력을 비축할 수 있었다.
“왜요, 아예 데이트 신청이라도 하시지~?”
5일 째 전투가 끝난 지금. 김유린이 영웅오크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이혜린이 짓궂은 너스레를 떨었다.
“푸흣.”
그 옆에서 검신에 묻은 피를 닦아내던 유세정도 웃음을 터트렸다. 허나 뒤이어 유린의 날카로운 시선이 번뜩였고, 세정은 그 즉시 고개를 아래로 처박아야만 했다.
“상황을 유념해라. 지금 이혜린 기사와 나는 수평적인 관계가 아니다. 내가 친구로 보이나?!”
“···죄송합니다.”
역시 여태 유순하게 받아줬던게 문제였다.
김유린이 짐짓 얼굴을 굳힌 채 크게 소리치자, 그제서야 이혜린도 놀림을 그만두었다.
“저는 그저 대장님의 눈빛이 너무 아련하시길래···.”
“이, 이놈이 지금!”
···그만둔 것처럼 보였다.
“그렇잖습니까. 요 근래 4일 동안 매일 전투가 끝나면 물떠다 주고~ 집에 갈 성싶으면 배웅까지 하고~ 완전 수줍은 처녀가 첫눈에 반한 남자한테 한 행동이더구만요. 처음에는 장난이었지만, 지금은 진짜 걱정되어서 이러는 거예요 대장님.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이혜린의 말이 속사포처럼 이어졌다.
그에 김유린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오크의 냄새를 탐색하려 했을 뿐이었지만, 이렇게 들어보니 충분히 오해의 소지를 일으킬 만한 행동이지 않은가.
“···이종교배 안돼요. 도의적이든 법적이든 과학적이든. 전부 안돼요.”
“이··· 이익! 그런 거 아니라고.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아니란 말이야!”
이혜린이 순도 100%의 진실된 걱정을 담아 말하자, 김유린이 얼굴을 붉힌 채 소리쳤다.
*
대국민의 걱정거리였던 레드문이 발현된 지도 어느새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허나 대한민국은 여타 국가들과는 그 피해의 정도가 판이했다.
서유럽과 북미쪽의 선진국들은 레드문 사태에 의해 막대한 금전적·인명적 피해를입은 반면, 한국은 1차 방어선도 뚫리지 않았을 정도로 대단히 선전했다.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영웅 오크’와 영민한 기사들 덕택이었다.
또한, 어느 익명의 기사는 자신이 녹화한 레드문 방어과정이 담긴 영상의 일부분, 영웅 오크가 활약하던 부분을 세간에 공개했다. 그것에는 오크 대전사의 압도적인무위가 오롯이 찍혀있었다.
영상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국내는 물론 국외도 영웅 오크에 관한 이야기로 들끓었다.
그렇게 오크 대전사의 인지도는 고작 일주일 사이 정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치솟게 되었다. 심지어 해외에서는 한국 정부에게 영웅 오크 분양문의까지 해왔다. 암수 두 놈을 데리고 와서 자신들의 몬스터 필드에 키우고 싶다며···.
그렇게 레드문은 여러가지 화제거리와 슬픔거리를 동시에 안겨주었는데, 레드문이 발현된 지 딱 8일이 지난 오늘. 꽤 기분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드디어 내일 모레가 끝이랍니다!”
이 곳은 거진 황무지로 변모한 1차 방어선. 어디선가 전화를 받고 온 주지혁이 갑자기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에 앓는 소리를 내며 휴식을 취하던 기사들이 눈을 번쩍 떴다.
“···어? 진짜?! 누가 그래?!”
가장 먼저 이혜린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뒤이어 김유린과 유세정도 슬그머니 주지혁의 뒤축에 섰다. 허나 그들 이외의 다른 기사들은 감히 저 ‘몬스터 패밀리’에 끼어들 용기가 안나, 멀리서 귀를 쫑긋할 뿐이었다.
“단체장님께서, 라이칸이 알려주셨다고 하시는 군요.”
주지혁의 만면에는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와. 그럼 확실한 거네~ 아싸~!”
이혜린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
요즈음 라이칸은 거진 ‘신앙’ 혹은 ‘진실’ 그 자체가 되어있었다. 뱀파이어를 잡은 공로도 물론 있으나, 레드문의 징후를, 그것도 무려 발현되기 일주일 전에 포착한 ‘사람’은 라이칸이 역대 최초였기 때문이다.
“···잠깐. 오빠한테 전화가 왔다고요?”
하지만 유세정은 뭐가 그리도 불만스러운지. 표정을 굳히고서 주지혁을 노려보았다.
“예? 아··· 예.”
“근데 왜 나한테는 안왔지.”
그녀가 투덜거리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물론 김세진에게서는 아무 연락도 없었다.
“아. 곧 연락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딩딩딩-
때마침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유세정이 기대했지만 기대한 것을 표출하지않으려는 애매한 표정으로 액정화면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즉시 그녀의 입가에 아주 환한 미소가 걸렸다.
“저, 잠깐 어디좀 다녀올게요~”
세정은 사뿐사뿐, 날아갈 듯한 발걸음으로 인적이 드문-맘 놓고 통화할 수 있는-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뒷모습을, 남자친구는 커녕 좋아하는 남자도 없는 이혜린과 김유린이 부럽다는 듯이 좇았다.
* * *
하늘이 어스름으로 물들어갈 때, 기사들은 무기를 움켜쥐었고, 마법사들은 체내의 마나를 예열하며 전투를 기다렸다. 임전(臨戰)의 태세는 만전(萬全). 오늘과 내일만 무사히 지새우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도 끝이라는 일념이 사기를 고양시켰다.
-크아아아아!
어디선가 괴수들의 굉음이 드높이 치닫았다.
저 멀리 신화 속 괴수 바실리스크가 보였다. 오우거중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외눈박이 오우거 ‘사이클롭스’도 있었다.
모두 첫 날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몬스터들, 쉽지 않을 것이었다. 모두가 긴장했다. 하지만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7일간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신들은 정서적·육체적 성장을 거듭했을 것이라는 자신감과, 이 뒤에는 강력한 우군이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이 뒤늦은 안심을 전해주었다.
“전군 전투태세!”
김유린이 크게 외쳤다.
수 많은 기사와 마법사들이 뿜어낸 마나가 웅웅-하며 울었다.
*
오크 대전사, 김세진은 수라장같은 격전 속에서 메이스를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형형한 마나가 서린 메이스에서 몬스터를 찢어발기는 충격파와 마나검강이 연신 쏘아졌다. 대지가 흉악하게 갈라지고, 피보라가 분수처럼 피어 올라 적색(赤色)의 달을 더욱 붉게 가렸다.
오크 대전사의 무위는 압도적이라는 형용이 알맞았는데, 이러한 가공할 만한 강함의 원천은 다수의 몬스터를 도륙함으로써 발생한 ‘선순환’의 덕택이었다.
스킬 포식자는 몬스터를 쓰러뜨릴 때마다 본신의 위력을 강맹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니 지금, 몬스터가 드글드글한 이곳에서 몬스터를 쳐죽일 때 마다 김세진은 성장을 한다. 그러므로 그는 오늘 죽이지 못한 몬스터도, 오늘의 성장을 밑거름 삼아 다음 날에는 죽일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마나석을 흡수하는 행위 또한 마찬가지다. 마나석을 흡수하려면 자신이 직접 심장에 박힌 마나석을 꺼내야 하기에 사람의 이목이 집중된 곳에서는 꺼려졌지만, ‘마나지체’를 활용하니 그 과정이 훨씬 편해졌다. 몬스터 사체의 표피속으로 마나를 집어넣어 마나석을 동화하기만 하면 되었으니.
그는 전투를 하면서도 이 평지에 널브러진 수 많은 몬스터 사체의 마나석을 게걸스럽게 흡수했다.
그러니 김세진에게 이 ‘레드문’은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그 강함의 격 자체가 달라지게 해주는 최고의 ‘이벤트’나 다름이 없었다.
─그어어어어!
하지만 지금 자신의 성장세에 도취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저 멀리 칼날 도깨비를 상대하며 고전하는 김유린이 보였다. 이미 전투가 무려 4시간 가량 지속되었기 때문일까, 그녀의 검에 서린 마나강기는 그 빛이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오크는 그 즉시 지축을 박차고 그 쪽으로 돌격했다. 사방에 회오리를 일으키며 그녀에게 도달한 오크는 메이스를 하늘 높이 쳐들었다. 그리곤 그 어느 무엇보다 패악적인 파괴력이 담긴 ‘강타’를 내리친다.
콰아아아앙─!
칼날도깨비는 자신의 두 팔을 들어 메이스에 대항해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아다만티움에 준하는 강도를 지녔다는 칼날도깨비의 두 팔은 유리창처럼 으스러졌다.
우지끈-!
두 팔이 박살난 칼날도깨비는 발걸음을 돌려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오크는 당연 도주를 용납하지 않았고, 그 뒤통수에 둔기를 냅다 후려갈겼다.
둔탁한 파쇄음과 함께, 놈의 머리가 토마토처럼 으깨졌다.
“끄읏!”
하지만 김유린은 오히려 오크가 일으킨 충격파에 몸이 휘말려,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그으.”
오크는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김유린은 오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그가 건넨 손을 붙잡고서 몸을 일으켰다.
“···앗.”
유린이 일어서자 오크는 또다시 그녀의 머리를 쓱삭쓱삭- 해주었다.
그녀는 왠지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좋다고 하면 알맞을 것이었다. 듬직한 남자에게 보호를 받는기분은, 아주 어렸을 적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이게 처음이었으니······.
“···하압!”
허나 김유린은 일부러 오크의 손을 거칠게 쳐내고선, 크게 기합을 내질렀다. 괜히얼굴이 화끈해졌다. 고작 오크따위가 어디서 인간을 아랫 것 보듯이 한다는 말이냐···.
“죽어!”
그녀가 마나를 담아 검을 휘둘렀다. 마나의 선풍이 마치 창파(滄波)처럼 넓게 퍼져나갔다.
허나 바로 그때. 별안간 거센 마나의 기류가 대지에서부터 솟아올랐다.
이건 범상치 않은 ‘마법’의 기운이었다.
“···모두···!”
김유린이 경악한 표정으로 부하기사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딛고 있던 땅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 23. 레드문 (3)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