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레드문 (2) >
레드문을 대비한 기사들의 방어선이 구축되었다. 위치는 이 근방.
김세진은 집에서 챙겨온 휴대폰을 통해 그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잠깐. 이 오크들은 안 미치겠지?’
그러다 문득, 레드문의 영향력이 걱정되었다. 아마 레드문과 자신의 스킬 간의 상하관계에 따라 오크들이 무엇을 따를지 결정되겠지. 허나 레드문은 천재지변 중 하나라 불리는 광역현혹현상. 과연 일개 오크들이 그 재해를 견뎌낼 수 있을까.
“···남은 오크들을 다 데리고 오너라.”
김세진-오크 대전사의 낮고 웅대한 목소리가 넓게 울려퍼졌다.
그러자 금강산 주변으로 정찰을 나간 네 마리의 날렵한 오크를 제외한 모든 오크가 모여들었다.
“모두 모여뜹니다. 대저사님.”
“···.”
지도자 격의 오크가 말했다. 세진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면구조’ 스킬은 괜히 이식한 것 같았다. 의사소통의 편리함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오크의 몰골과 저런 혀 짧은 목소리는 끔찍할 정도로 안 어울린다.
“모두 들어와라.”
그는 고블린 형태를 취한 채 오크들을 하나 둘 씩 불러들여 문신시술을 시작했다.자신의 피를 재료로, 그 효과는 간단했다. 레드문을 견뎌낼 수 있게 해줄 ‘마법저항’.
B+등급에 다다른 고블린의 손재주로는 머릿수당 1분씩, 총 30분이면 충분했다.
신속하게 시술을 마친 그는 오크들을 돌려보내고서, 다시금 ‘마나지체’의 숙련도를 높이기 위한 훈련에 돌입했다.
마나지체는 그 자체로도 대단하긴 하지만, 활용할 수 있는 한계시간이 고작 15분에 불과하여 실전에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컸다. 게다가 인간폼으로는 그보다 더욱 줄어들은 5분이 최대. 그 이상을 사용하면 머리가 아찔해지면서 곧바로 기절하게 된다.
‘허공으로 떠올라라.’
그러니 적어도 인간폼으로 15분 이상은 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숙련시키자, 는 것이 김세진의 생각이었다.
허나 숙련도를 높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충분하지 않았다.
갑자기, 세상에 붉은 빛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
수 많은 기사와 마법사들이 구축한 방어선에는 무거운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있어봤자 거치적거리기만 할 군부대는 이미 멀찌감치 뒷전으로 빠져, 남은 것은 기사와 마법사들 뿐. 허나 그들 대부분은 대전(大戰)을 목전에 두고 긴장을 했거나, 겁에 질린 상태였다.
레드문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지만, 아마 이번 레드문은 과거보다 훨씬 막아내기 힘들 것이었다. 약한 몬스터에서 강한 몬스터 순으로 순차적으로 밀려오던 그때와는 달리, 이제는 어떠한 구분도 없기 때문이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첫 날부터 바실리스크나 맨티코어, 와이번 따위의 상급 혹은 그 이상의 몬스터가 등장할 지도 모르는 노릇.
김유린은 걱정과 불안에 떨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진심으로 이해가 되었다. 무엇보다 당장 제 자신의 심장박동도 심상치 않으니.
“괜찮은가?”
그럼에도 그녀는 제 옆에서 여타 기사들처럼 긴장하고 있는 유세정을 진정시키고자 했다.
“예? 아, 예. 괜찮습니다.”
머리를 위로 질끈 동여맨 유세정의 뒷목에는 살색의 아름다운 문신이 희미하게 엿보였다. 저게 아마도 김세진이 자랑하는 마력문신이라는 것이겠지.
혹자는 저 문신을 오직 더 몬스터의 단체원들에게만 시술을 해준다 하여 독점이라 비판하기도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김세진의 마음이 그러한 것을.
“단체장 님이 해주셨습니다. ‘절대 죽지 말라’ 면서요.”
그 시선을 눈치챈 유세정이 자랑하듯, 혹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혔다.
김유린은 그런 풋풋한 감정이 아주 살짝 부러워졌다.
“그렇군. 그럼 그 말을 따라야겠지?"
“예. 물론이죠.”
유린과 세정, 둘이 마주보며 미소를 지은 그때.
별안간 방어선에서 소란이 일었다.
그에 두 사람은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하얀 보름달에 스며든 핏물이 마치 잉크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
“시작이군요.”
유세정이 말하자, 김유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끼에에에에엑!!
어둠으로 가물가물했던 시야가 적색으로 물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몬스터의 광기어린 비명이 산세를 울렸다. 전의를 상실케 하는 괴수들의 포효가 얽히고 얽혀 하늘로 치솟아 붉은 보름달에 닿았다. 쿵쿵쿵쿵. 흡사 대지진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진동이 밀려들었다.
─전투태세!
통신용 수정구에서 남자의 강단있는 외침이 들려왔다. 김유린의 아버지, 김현석의 목소리일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음성에 따라 검을 뽑았다.
저 먼 발치에서 몬스터 하나가 거대한 본체를 꿈틀거리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안광과 집게와 흡사한 이빨. 토양에 수 많은 다리를 비비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놈은 ‘자이언트 센테피’라는 웅대한 몬스터였다.
처음부터 까다로운 상급 몬스터다. 게다가 그 크기와 그로테스크한 형상은 아직 어린 기사들을 겁먹게 만들기에 충분할 터.
김유린이 힐끗 옆을 바라보았다. 검을 움켜쥔 세정의 손이 안쓰럽게 떨리고 있었다.
“겁먹지 마렴.”
유린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네.”
유세정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바실리스크, 자이언트 센테피, 와이번, 그리핀, 플래쉬골렘 등등··· 평생 한 마리도 볼까 싶은 상급 몬스터들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최소 일주일은 지속될 레드문의 고작 '첫번째 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험악하고 두려운 몬스터들이었다.
도망치는 기사가 많았다. 등급이 낮고 나이가 어려 이런 경험을 단 한번도 하지 못한 기사들이 그러했다.
“으허어어엉···.”
사지 중 한 쪽을 잃고 흐느끼는 기사들도 많았다.
전황은 명백한 열세(劣勢)였다.
그럼에도 김유린은 검을 휘둘렀다.
검에 서린 푸른 검강은 마나의 선풍이 되어 수 많은 몬스터를 쓸었다. 몬스터의 해일이 갈라져 확 트인 시야 속에서, 아스라이 먼 곳에 마법을 시전하는 리치가 보였다.
예로부터 기사들의 최우선 척살대상은 마법사였다. 놈을 발견한 즉시, 그녀는 검을 역수로 움켜쥐고서 대지에 꽂아넣었다.
‘목적’을 담은 일격이었다.
순간 리치가 서있던 창천에서 마나의 대검이 생성되어 노면으로 가라앉았다. 몸이 이분된 리치는 뒤이어 발생한 2차폭발에 의해 한 줌의 먼지로 산화했다.
그렇게,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의 분전을 거듭했다.
하지만 전체적인 전세는 열세, 방어선은 붕괴가 되기 직전이다. 절체절명이었다.그러나 결코 뚫려서는 안된다.
저 멀리 부하기사들의 검강이 오우거의 손목을 잘라내는 모습이 보였다. 그 속에는 왠지 모르게 자신의 어린시절이 생각나게 하는 소녀, 유세정도 있었다.
김유린은 다시금 힘을 내어, 검을 움켜쥐었다.
───!
그때, 어디선가 거센 진동이 전해졌다. 뒤이어 창천을 들끓는 함성도 들려왔다.
이건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쿵쿵쿵쿵. 점차 발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절망속에서 그 근원지를 응시했다.
그곳엔 오크의 무리가 있었다.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 선두에 선 오크의 풍채는 감히 일 천 이상의 몫을 할 수 있노라 단언할 정도로 위압적이었다.
그렇게 등장한 '오크 대전사'는 긴 머리를 흩날리며 마치 빛살처럼, 혹은 야수처럼 돌진해와 허공에 메이스를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가공할 만한 충격파가 격랑처럼 꿈틀대며 대지를 휩쓸었다.
붉은 안광을 증거로, 영웅 오크의 무리는 확실히 레드문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대상은 사람이 아닌, 몬스터였다.
오크 대전사의 메이스는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마치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파공음을 내며 몬스터들의 사지를 폭발시켰다. 그 메이스가 닿는 지점에는 때로는 불길이 치솟았으며, 때로는 대기가 얼어붙을 정도의 혹한이 엄습했다.
쾅-! 쾅-! 쾅-!
그리고 그러한 자연변화를 일으키는 주체는 역시, 메이스에 둘러져 있는 ‘마나’였다.
대전사는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이며 달렸다. 그의 메이스 앞에서는 모든 몬스터가 차별이 없었다. 오크든, 오우거든, 놀이든, 용아병이든. 그 흉악한 궤적에 닿는 만물은 먼지처럼 찢겨나갔다.
대전사의 완벽한 육체는 어떠한 물리적 공격도 불허했다. 수백의 몬스터에 둘러싸였음에도 피해는 전무. 대전사는 공격을 방어하거나 회피할 생각따윈 없이 오롯이 파괴에만 집중했다.
앞을 가로막는 오우거의 배를 폭발시키고, 목 없는 기사 듀라한을 얼어붙게 만들며, 하늘을 배회하는 와이번에게는 파괴적인 검강을 쏘아보낸다.
혼자서 수백 수천의 적을 상대하는 저 위용이야말로 문자 그대로의 ‘대전사’, 혹은 무신(武神).
전장에 나선 기사들은 그 패악적이지만 아름다운, 모순적인 무도(武道)를 멍하니 감상했다.
─그아아아아!!!
대전사가 전신에 피를 뒤집어쓴 채 야성의 포효를 내질렀다.
그 어느때보다 두려워야 할 포효였지만,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웠다. 전황을 역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몇몇 기사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몬스터를 향해 돌격했다.
그 중에는 김유린과 유세정도 있었다.
그렇게, 2차전이 시작되었다.
***
달이 저물고 해가 밝아오기 시작했다.
오늘의 레드문이 끝났다. 사상자는 많았다. 사지가 찢겨나가 혼절한 기사는 물론, 안타깝게 그 생명을 잃은 기사도 있었다.
“···.”
하지만 이 곳에 모인 기사들은 감히 슬픔을 표현할 수 없었다. 오크의 사체를 내려다보며 쓸쓸한 표정을 짓는 대전사를 보고 있노라니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레드문의 영향 아래에서도 자신들을 도왔던 용맹한 영웅 오크들. 하지만 30에 달했던 무리는 이제 절반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원체 개체수가 적었던 만큼, 영웅 오크를 이끄는 대전사, 아니 그 족장의 슬픔은 이루 헤아릴 수 없겠지.
“···수겸아.”
그런 그를 씁쓸하게 바라보던 김유린이 제 부하기사인 김수겸을 불렀다.
“예?”
“이거, 잠시만 맡아주렴.”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보검을 맡기고서 천천히 영웅오크에게로 다가갔다.
저벅저벅.
토지에 말라붙은 혈흔을 밟아가며, 그녀는 오크 족장 앞에 멈춰섰다.
“···저기.”
유린이 손을 조심스레 뻗어 오크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오크는 그 미묘한 감촉이 느껴진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으허헉!”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얼마나 놀랐는지, 거의 백덤블링의 수준이었다.
“어···.”
그에 김유린은 약간 상처받은 표정이 되었다.
‘..뭐야.’
그러나 김세진의 황망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혹시 나, 기억··· 나니?“
“···.”
그러는 와중에 유린이 다시금 말을 걸어왔다. 이 여자는 몬스터한테 말을 거는게 취미인가, 세진은 진심으로 당황해 그저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기사님! 뭐하세요!”
뒤쪽에서 기사들의 기겁한 외침이 들려왔다.
아무리 방금 전까지 함께 싸웠다 하더라도, 상대는 절반에 달하는 동족을 잃은 오크다. 혹시라도 심기를 거스른다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데···.
“···.”
하지만 그 우려는 대전사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불식되었다.
“아.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유린은 저도 모르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왠지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기에.
“그··· 유감입니다.”
김유린이 바닥에 널브러진 오크의 사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대전사는 한참동안이나 그녀를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도 내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돌연.
대전사가 손을 높이 치켜세웠다.
“기사님!”
한 번의 주먹질로도 지금의 김유린에게는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 있다.
순간 기사들이 기겁하며 쇄도했다.
“···어?”
그러나 다음 순간, 기사들은 우뚝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대전사는 치켜든 손을 김유린의 머리에 가볍게 내리고서는, 쓱쓱- 그 정수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큼.”
쑥스러운 듯 한 번의 헛기침하고선, 대전사는 몸을 돌려 어딘가로 떠나갔다. 다른오크들이 그런 그를 따랐다.
"···응···?"
유린은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녀의 두 볼에는 이상하리만치 발그레한 홍조가 올라있었다.
< 23. 레드문 (2)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