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레드문 (1) >
몬스터 필드를 목전에 두고, 김세진은 마지막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어느새 100여명으로 불어난 연락처 중. 먼저 조한성, 소여진, 주지혁, 이혜린, 김유손 순으로 간단한 안부 전화를 하고서,
“여보세요?”
-···또 뭐야.
유백송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즈음 세진의 독촉전화에 많이 시달렸기 때문일까, 그녀의 목소리에는 다분한 한숨이 묻어나왔다.
“아니. 오늘은 그냥 잘 지내나 궁금해서 전화했어요.”
-···잘 지내.
너만 아니면-
뒤에서 아주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온 것 같긴 했지만, 세진은 무시하기로 했다.
“근데 너무 귀찮아 하시는 거 아닌가? 저희 덕분에 실적도 올랐잖아요. 레드문 예측.”
약 1주 전 김세진은 특수경찰국에게 라이칸이 레드문의 징조를 발견했다고 전했고, 그에 특수경찰국이 자체적인 조사를 통해 확실한 통계자료를 들고 관련부서를 찾아갔다.
즉 징조를 가장 처음 제보한 건 라이칸이지만, 실제적인 물증을 얻어낸 건 특수경찰국 이라는 뜻. 정부도 특수경찰국의 그런 공로를 인정하여 그간 잃었던 신뢰의 회복은 물론 성과금까지 하사했다고 하던데. 이런 태도는 너무 야박한 것이 아닌가.
-아니야. 안 귀찮아. 오히려 반가운 걸.
그제서야 유백송의 목소리가 억지로나마 밝아졌다.
-근데 왜? 뭐 때문에 전화한 거야? 네 어머니와 아버지에 관련된 정보는 최대한 안 들키는 선에서 조사하고 있다고 저번에 말했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그때 전했던 정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는 오직 유백송에게만 ‘금강산에 뱀파이어가 산다’는 정보를 전했다. 당시 그녀는 고민해보겠다 말했지만, 2주가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고민의 결과를 함구하고 있었다.
-그건··· 나중에 알려줄게. 나 혼자서 생각하려니깐 머리가 아파서 힘들어.
“그래요?”
-어. 미안하다.
“···일단 알았어요. 근데 라이칸이나 제가 나중에 다시 한번 조사해 볼건데, 그때도 결과가 확실하면 함께 하시는 겁니다?”
유백송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동안 머뭇거렸다.
“대답은?”
김세진이 재촉하자, 유백송의 맥아리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당히 의외의 답변이었다.
-······아, 근데. 그러다 나 잘리면 어떻게 해? 요즘 안 그래도 혼자서 이상한거 한다고 의심 많이 받고있는데.
“···예?”
-아니. 네가 정보 주면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사실, 그거 자체가 나한테는 규율위반이야. 나는 내 상관인 대통령에게 업무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알게 되는 즉시 제출하겠다는 서약을 했다고.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전에도 말했잖아. 나는 상관(上官)이 없는게 아니야. 그 정보가 네말대로라면 1급기밀로 분류될 테고, 1급 기밀은 대통령이 직접 허가를 내리지 않는이상 나도 나서지 못한단 말이야.
“허가없이 나서면 잘려요?”
-당연히 그렇지!
유백송이 소리쳤다. 김세진은 잠시동안 멍하니 있다가, 이내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알았어요. 그럼 무리는 하지 마세요. 근데 만약, 혹시라도 유백송 씨가 잘리게 된다면 제가 고용할게요. 몬스터 용병단장으로. 지금 받는 연봉 10배정도 주고서.”
-···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요. 비록 명예는 잠시 실추될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제가 어떻게든 다시 되살릴 수 있으니까.”
김세진의 말이 끝났음에도 유백송은 한참동안이나 대답이 없었다. 그렇게 약 5분간 침묵이 계속되었을까.
그녀는,
-···필요없어. 됐고, 나중에 네 엄마랑 관련된 정보 찾으면 연락할게.
한 마디를 남기고서 전화를 끊었다.
그 이후, 김세진은 유세정과 김유린에게까지 마지막 통화를 하고서 몬스터 필드 내부로 진입했다.
*
김세진은 그저 몬스터 필드의 아무 동굴에서나 머물 계획이었지만, 필드를 거닐다보니 갑자기 호기심이 생겨났다. 그때 자신이 거둬주었던 두 연놈의 오크는 약 두달여가 지난, 지금은 어떻게 발전해 있을지.
당장 3일전에 두 영웅오크가 출몰해서 기사들과 함께 싸웠다는 소식을 들었으니,전사하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 부락에서 10일동안 생활해야겠다. 몬스터들의 틈바구니 속이지만, 오히려 수발을 들어줄 놈들이 있어 더욱 편한 생활이 될 지도 모르니까.
그런 생각으로 몬스터 필드를 헤매기 시작한 지 어언 30분.
김세진은 다행히 길을 잃지 않고, 저 멀리 높이 솟은 토벽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오크들의 냄새가 풀풀 풍겨오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와?”
김세진이 오크 대전사 폼을 취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가 다가서자 굳게 닫혔던 토문(土門)이 스르르 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활짝 열린 대문 사이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으며, 인간의 환호소리 같기도 했다.
그는 천천히 토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구아구아.”
먼저 남자 오크가 자신을 맞이했다. 그때에 비해서 머리카락이 길어지고, 근육이 더욱 튼실해진 등 신체의 변화가 확 눈에 띄었다.
세진은 자신보다 한 뼘 정도 작은 오크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두 연놈의 자녀로 추정되는 오크는 약 21개체 정도 있었다. 오크는 보통 태어난 지 4개월은 지나야 성체가 되기에 아직까지는 몸집이 모두 작았으나, 신기하게도 모두 파란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이건 세진이 문신에 ‘유전적 계승’이라는 성질을 추가한 덕분이다. 애써 부모 오크를 강하게 만들었는데, 그 아랫 것들이 유약하면 성장 혹은 발전할 가능성이 아예없어지니까.
“···좋아.”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인 그는 일단 자신이 머물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의 듬직한 등 뒤로 수십의 오크가 따라붙었다.
* * *
“이제 내일이면 레드문이 뜰 거라고 합니다.”
부하기사가 보고를 해오자, 김유린은 결연한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보름달은 하얗고, 창천엔 짙은 남색이 덧칠되어 있다.
하지만 저 달에 핏빛이 스미는 순간. 세상은 진한 적색으로 반전하겠지.
“그래. 국가의 계획은?”
“일단 몬스터 필드 내부에 1차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내부에?”
김유린이 미간을 좁힌 채 그 저의를 고민했다. 물론 몬스터 필드의 내부에 방어선을 구축하면, 방어해야하는 범위가 좁아진다는 장점이 있긴 하다.
하지만 만약 귀퉁이 하나라도 먼저 뚫려버린다면, 그곳에서부터 몬스터들이 밀고 들어와 순식간에 모든 방어병력이 포위당할 수 있어 위험도 또한 높다.
“예. 하지만 그리 깊은 곳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지도는?”
“여기 있습니다.”
그녀가 지도를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헌데 약간 의아한 장소가 하나 있었다. 방어선의 한쪽 귀퉁이, 지반이 융기하여 생겨난 가파른 절벽 바로 안쪽의 ‘주의 요망’이라는 붉은 글씨가 써져 있는 정체불명의 위치.
“···이건 무엇이지?”
“아. 거기는 영웅 오크의 부락지입니다. 약 한 달전에 발견된 장소인데, 레드문의영향 하에서 이들의 행동이 어떨지 예측이 되질 않아 주의 지역으로 분리해놓았습니다.”
“예측이 안된다고?”
“네. 이들이 붉은 달빛을 받으면서도 저희와 함께 싸워줄지, 아니면 이성을 잃고 완전한 몬스터로 돌변할 것인지. 그에 따라 전략에도 약간씩의 수정이 가해질 예정입니다.”
김유린은 검집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몬스터에게 ‘이성을 잃다’라는 말은 모순이나 다름이 없었다. 애초에 몬스터에게는 이성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 전제를 깨부순 몬스터가, 요 근래에 나타났다.
이른바 ‘영웅 오크’라는 새로운 오크. 왠지 모르게 낯뜨겁지만 이것은 세간이 지은 별명이 아니다. 전 세계 몬스터 도감에 정식으로 게재된 학명이 바로 ‘영웅오크(Hero orc)’다.
오크의 새로운 속(屬)으로 분류된 영웅 오크는, 몬스터 필드로 사냥을 나간 기사들이 위험에 처할 때면 우레와 같은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온다 하여 ‘영웅’이라는 별호가 붙여졌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탄생 혹은 발견된 오크라 하여 ‘대한민국오크’라고 불리기도 한다.
“만약 이 오크가 평소처럼 인간을 도와준다면, 오크를 방어에 활용하겠다는 생각인가?”
“예. 그런 것 같습니다.”
“···흐음.”
약간 불안하기는 하지만, 확실히 그렇게만 된다면 영웅오크만큼 확실한 원군도 없겠지.
김유린은 과거 자신과 함께 바실리스크에 대적했던 오크대전사의 무위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기사들을 대동하여 필드 내부로 진입한다. 방화나 벌목을 통한 방어선 구축은 이미 완료했겠지?”
“예. 물론입니다. 바리케이트는 물론 마법사들이 안전하게 머무를 결계와 망루까지 완벽히 구비해뒀습니다.”
“좋아.”
*
김유린을 비롯한 수 많은 기사들이 곧 도래할 레드문의 방비를 탄탄히 하고 있던 그 때.
[전사의 특질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관련 특질 ‘마나와 친한 육체’를 습득합니다.]
김세진은 사냥을 통해 ‘전사의 특질’의 새로운 단계를 해금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특질 ‘마나와 친한 육체’가 나약한 바다 괴수 고유의 특성 ‘물의 지배자’와 반응합니다!]
[특질이 ‘마나지체’로 격상되었습니다.]
[특질-마나지체] [숙련도 0.01%]
- 극도로 마나 친화적인 육체.
- 숙련도에 따라, 몸에 닿는 상대방의 마나 혹은 마법을 무효화할 수 있습니다.
- 숙련도에 따라, 체내에 축적된 마나를 자신의 의지대로 다룰 수 있습니다. (여러 스킬과 연동할 수 있습니다.)- 숙련도 100%를 달성하면 새로운 특질이 해금됩니다.
“흐음.”
그는 방금 막 쓰러뜨린 오우거의 사체를 깔고 앉아, 마나지체라는 새로이 얻은 특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마나를 자신의 의지대로 다룰 수 있다.’
참 듣던 중 반가운 문장이 아닌가. 자신은 마나와 관련된 교육을 받지 못해, 마나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방법조차 모르니까.
“···흠.’
근데 뭐 어쩌라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일단 손을 쫙 뻗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허나 별 다른 반응이나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흐음?”
이번에는 한 지점을 눈으로 응시했다. 눈이 충혈될 때 까지 해봤으나 역시 특별한일은 생겨나지 않았다.
“흠···.”
그렇게 한참동안 앵무새가 되었던 김세진, 그러나 그는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그 사용법을 알게 되었다.
‘의지라고 했으니 그냥 생각에 따라 움직이는 건가? 근데 들었던 거랑은 좀 다른데?’
의지만으로 움직인다, 는 것은 기사나 마법사들이 말하던 원리가 아니다. 그들은 혈관을 순환하는 마나를 ‘직접’ 움직여 체외로 방출하는 것이라 했다. 고작 생각 따위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마나라면, 왜 기사나 마법사가 귀하디 귀한 전문직이겠는가.
‘생각이면 그냥 팔 밖으로 솟아올라라 이러면···.’
그의 팔에 두툼한 마나가 솟아올랐다.
“어억!”
순간 김세진은 진심으로 깜짝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뭐야!”
황급히 몸을 일으킨 김세진은 팔에 아른거리는 마나를 바라보며 기함했다.
생각으로 마나를 조정한다, 그 따위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꿀꺽.
그는 침을 삼키고서 마나에 의념을 흘려보냈다.
넓게 퍼져라, 길게 솟아라, 낮게 가라앉아라 따위의 간단한 것은 물론.
‘불타올라라’
화륵- 마나가 넘실거리던 허공에서 별안간 불이 활활 타올랐다.
‘흙이 되어라’
투두둑- 하늘에서 타오르던 화염이 갈색의 토양이 되어 노면으로 떨어졌다.
'눈이 되어 내려라.'
새하얀 함박눈이 바삭바삭 가라앉기 시작했다.
'검이 되어라.'
['오크의 단조기술'과 연동시키기 위해선 50% 이상의 숙련도가 필요합니다.]
이건 아직 불가능했지만, 숙련도가 높아지면 가능하다.
“와···.”
그는 멍하니 감탄했다.
과연, 스킬이 아니라 '특질'이라는 항목으로 구분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