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준비 (2) >
강원도에서도 손꼽히는 고급호텔 중 하나인 ‘Romance of dawn’의 최상층-60층은 오직 하나의 객실로써 사용된다. 그런 만큼 하루를 투숙하는 데에도 거금이 필요하니, 일반인은 꿈에도 못 꾸는 오직 부르주아만을 위한 장소라 하겠다.
그러나 지금, 그런 호텔의 최상층은 단 한사람만을 위한 진지(陣地)로 변모되어 있었다. 60층은 물론이거니와 그 아래 5층인 55~59층까지. 수 백의 마법함정과 감지결계, 무형(無形)으로 어둠속에 녹아있는 언데드는 혹시나 있을 침입자를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다.
겉보기에는 너무나도 평범한 이곳은, 혹시라도 침입한 누군가를 살해하기 위해 조성된 하나의 완벽한 ‘요새’였다.
“준비는 다 되었니?”
그리고 이 요새의 주인은 가장 고귀한 혈족 ‘프릴라니 폰 바토리’.
뱀파이어의 시조라 일컬어지는 바토리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이자, 가장 유력한 차기제왕. 암암리에 개설된 뱀파이어 커뮤니티에서는 바토리가 머리만 좋았더라면, 아니 무엇인가를 배울 욕구만 있었다면, 이미 자신들은 아주 오래전에 고향으로 돌아갔을 거라 한탄하곤 한다.
“예. 거의 완료가 되었습니다. 자꾸 하찮은 잡종들이 달라붙기는 하지만, 당장 다음 주부터 원활하게 ‘축출’작업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축출은 통로 속의 몬스터를 끄집어내는 작업을 일컫는다.
“그래. 좋네.”
그에 바토리가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런데 엘 라스는 지금까지 도대체 뭘 하고 있는거야? 여태 연락이 없네.”
멀지 않은 과거, 종족말살작전때 가장 최우선 척살대상이 되었던 ‘고귀한 가문’중에서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는 가문은 오직 둘, ‘바토리’와 ‘엘 라스’ 뿐이다.
물론 가문의 맹위는 엘 라스가 바토리에 비할 바가 없고, 엘 라스의 지도자는 아직 꼬맹이에 불과하다지만, 섣불리 맘놓고 있어도 될 정도로 우스운 가문은 아니다.
애초에 뱀파이어의 ‘제왕’이란 모든 뱀파이어를 발 밑에 굴복시키는 존재이지만, 그 제왕의 자격은 무력의 강함이나 두뇌의 영특함 따위가 아닌 법이니.
“놈들은 과거 통로를 열 시도를 한 전적이 있지만 모두 수포가 되었기에, 그들보다 빨리 성공한 저희들의 눈치를 보고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면, 아직 엘 라스의 지도자는 너무 어리니 잡아먹힐까봐 두려워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흐음··· 그러니? 그네들은 이미 겁쟁이가 다 됐구나.. 안타까워. 그렇게 살 거면 왜 아직까지 살아있는 걸까?”
바토리의 섬찟한 물음은 정체모를 한기가 되어, 남자 뱀파이어의 몸을 애워쌌다.
“···오···옳으신 말씀입니다···.”
“아 맞다. 그······. 떨거지들은?”
바토리는 ‘떨거지’라는 족속을 떠올릴 때면 가슴 속에서부터 응어리진 분노가 치솟았다. 뱀파이어보다는 몬스터와 더 가까이 맞닿아 있는 추악의 잔존물들. 가능하다면 인간 놈들보다 먼저 멸족시키고 싶은 빌어먹을 괴물들.
“아.. 떨거지 놈들은 요 근래에 생츄어리에 틀어박혀 활동이 없습니다만, 오히려 그것이 더욱 불안합니다.”
떨거지들, 일명 ‘노스페라투’.
핏줄 자체가 지닌 능력이 뛰어남에도, 뱀파이어가 아닌 '몬스터'의 분파이고, 아주 머나먼 과거 종족을 배신한 전력있어 결코 뱀파이어라고 인정을 받지못하는 비운의 일족.
흡혈귀 중에서도 가장 악질인 노스페라투는 일종의 자격지심 혹은 피해의식 탓에종족을 가리지 않고 음험한 수작을 부린다. 그렇기에 과거 펼쳐진 ‘종족말살작전’도놈들이 인간을 충동질하여 발생했던 것이라고, 대부분의 뱀파이어들은 그렇게 확신을 하고 있다.
수 많은 뱀파이어가 사망하고 고귀한 가문이 멸족했음에도, 노스페라투는 그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아 오히려 차기 ‘제왕’의 자리를 노릴 만큼 성장했다는 점이 그 주장을 뒷받침했다.
“하, 그 빌어먹을 놈들은 또 무슨 수작을 준비하고 있길래···.”
떨거지가 제왕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 바토리는 치를 떨 정도로 분노했다.
“수장(首長) 수테르데가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저희 정보원의 역량으로는 그놈들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발견한 거라곤 생츄어리의 위치와 내부 생활환경 뿐입니다.”
“흐음··· 근데 너 혹시, 정면승부 말고 고안한 방법은 없니?”
“···예?”
“없구나?”
바토리가 남자를 한심하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너, 혹시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말 들어봤니?”
“···예?”
바토리가 갑작스레 사자성어를 들먹이자, 남자는 잠시 어벙한 표정이 되었다. 평생 책이라곤 단 한권도 읽어 본적 없는 무식한 여자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그 눈빛은 뭐니? 혹시 죽고싶은거니?”
“아, 아닙니다! 그저 무슨 뜻인지 몰라 곰곰이 생각했을 뿐입니다!”
바토리는 머리속에 든 건 없지만 눈치는 빨랐고, 남자는 다급하게 정수리를 바닥에 처박으며 사죄했다.
“···그래? 그럼 됐어. 모를 수도 있는 거니까 봐 줄게.”
그녀는 이이제이의 그 뜻은 물론 역사적 유래까지 모조리 설명했다. 물론 절반 이상이 틀린 내용이었지만, 남자는 그것을 지적할 만큼 간덩이가 붓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내가 왜 이이제이 얘기를 꺼냈냐면은··· 나도 요즘 TV를 많이 봐서 알거든?”
그 바토리가 무려 TV라니. 남자는 약간 감격받은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라이칸이라고 알지? 우리를 들쑤시고 다닌다는 놈. 그 놈이 용병단을 하나 설립했다 하더라고. 게다가 여기는 유백송이라는 하얀 호랑이도 날뛰고 있다면서?”
“···아.”
남자는 그 즉시 납득했다. 물론 계획의 허점은 많았지만, 몹시 좋은 방법인 척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놈들이 싹 사라져도 우리 계획에 득이 되면 되었지 손해는 없잖니?”
바토리의 입가가 섬뜩하리만치 청아한 호선을 그렸다.
“알겠습니다. 즉시 꼭두각시를 이용해, 일단은 라이칸에게만 임무 의뢰를 한번 해 보겠습니다.”
“좋아. 아는 건 없어도, 이해는 빠르니 좋네.”
바토리가 만족하며 손을 내젓자, 남자는 뒷걸음질을 치며 그녀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
해가 끝나기 사흘 전, 12월 29일.
김세진은 하젤린을 찾아왔다.
"···성욕을 줄이는 마법이나 물약···?"
요즈음 가장 심한 문제다. 수련이나 대련을 할때도, 이혜린이나 유세정을 비롯한 여인들과 이야기를 할 때도 시도때도 없이 들끓는 성욕.
"네."
하지만 성욕을 줄이는 물약은 고블린의 머릿속에 없었다. 애초에 이성이 없는 몬스터이니 당연한 소리겠지만.
"어··· 들어본 적은 없긴 한데···."
하젤린이 세진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옷깃을 여맸다. 그에 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노려보자, 그녀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큼. 큼. 요즘 많이 힘들어요? 그··· 부분이?"
"···네 조금 많이 힘드네요."
"아, 정 그러시면 한번 찾아는 봐 드릴게요. 워낙 기상천외한 물약이 많았으니, 아마 있을지도 몰라요."
하젤린이 초소형 노트북을 꺼냈다.
"···기다리고 있을까요?"
"네? 아뇨. 바쁘면 가셔도 돼요. 조금 오래 걸릴 테니까."
김세진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
-드디어, 헌해가 가고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폭죽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허나 그 즐거운 웃음소리와는 달리, 흑색늑대 폼의 김세진은 복잡한 혼란속에 갇혀 있었다.
당장 어제, ‘탁기의 고리’를 완료하자마자 떠오른 시스템창 때문이다.
[라이칸 슬로프로 진화하기 위한 조건을 모두 충족했습니다. 이제 라이칸 슬로프로 진화가 가능합니다]
[주의: 라이칸 슬로프는 인간임과 동시에 몬스터입니다. 그에 따라 만약 진화를 선택하신다면 ‘인간’폼과 ‘흑색늑대’폼이 합쳐지게 됩니다. (다만, 다른 몬스터 폼은그대로 유지됩니다.)]
[라이칸 슬로프로 진화하면 인간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최소 12시간으로 증가합니다. (기력수치에 따라 상승 폭이 조정됩니다.)]
“···후···.”
인간과 흑색늑대가 합쳐진다는 것은 즉, 지금의 김세진은 없어진다는 뜻과 일맥상통.
그 따위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리 없다.
애초에 그저 막연히 진화가 모든 걸 해결할거라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정말 문자 그대로 진퇴양난이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오크의 본능은 더욱 끓어오르지만, 그걸 해결하고자 진화를 한다면 본래 인간 김세진이 어떻게 될 지 예측조차 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진화를 한다 하더라도, 그때는 이제 라이칸 슬로프라는 종족 자체의 본능이 문제가 되겠지.
물론 가장 최선의 방법은 인간 김세진을, 오크 대전사와 대적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최근에 더욱 심해진 오크의 빌어먹을 본능이 문제가 된다. 몸을 썼다 하면 욕구가 끓어오르는 노릇이니···.
-디링링링링
깊어 가는 고민은 어디선가 들려온 핸드폰 벨소리에 의해 산만해졌다. 김세진은 미간을 좁히고서 핸드폰의 액정화면을 노려보았다.
-유세정
“아 맞다.”
성년식,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하아.”
그는 한숨을 내쉬며 전화기를 들어올렸다.
-오빠~ 나 드디어 어른 됐어~
“···그래? 축하해.”
유세정의 목소리는 유난히도 밝았다.
그러나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인 김세진은 그런 그녀가 단지 귀찮기만 할 뿐이었다.
*
“···금강산 지하요?”
오후 6시. 김세진은 유세정의 성인식에 참가하기 전에 더 몬스터에 잠시 들렸다. 김유손의 다급한 전언 때문이었다.
“그렇습니다. 익명의 제보자가 말하길, 그곳에 흡혈귀들의 지하소굴이 있다고 하더군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설득력 있는 증거 또한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단체장 님, 첩보원을 한번 보내어 볼까요?”
김세진은 동봉된 증거자료를 살폈다. 정체모를 지하에 건설된 마을의 사진이었다. 햇볕이 한치도 들지 않는 잿빛 도시.
“···특수경찰국에서는 모르는 눈치입니까?”
“예, 알았다면 벌써부터 난리가 났을 테지요. 그리고 사실··· 특수경찰국이 뱀파이어 청정지대가 아닌 것, 단체장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익명인도 특수경찰국이 아닌 우리에게 먼저 임무를 의뢰했다고 사료됩니다.”
김세진이 만든 도구와 유백송의 코는 뱀파이어를 걸러낼 수 있다. 하지만 뱀파이어의 수준높은 현혹마법에 걸려든 사람들은, 자기가 현혹마법에 걸려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뱀파이어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린다.
“후··· 알겠습니다. 일단 제가 유백송과 대화를 한번 나누어 보죠. 위험하니까 첩보원은 일단 보류해주세요.”
"예. 그리고 단체장 님, 일단 이 익명인도 한번 추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보자를요?"
김유손이 고개를 끄덕였다.
*
유세정의 성년식은 새벽 일가의 대저택에서 열렸다.
역시 새벽다운 성대한 연회였다. 정재계의 거물은 물론 저명한 기사와 연예인들까지, 대한민국의 실세가 모두 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자리.
그러나 유세정은 그저 딱 한 사람이 오기를 전전긍긍하며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현오 오빠, 오빠는 아직 안 왔어?”
“어. 조금 늦겠지만 그래도 참석은 꼭 한다고 연락왔으니까 걱정하지는 마.”
“···.”
세정이 입을 꾹 다물었다. 성년식의 중심행사는 끝났다. 비녀는 이미 머리에 꽂혔고, 사람들은 제 잇속을 챙기기 위한 인맥 다지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니까, 이 성년식은 그 남자가 없다면 하등 무가치한 자리일 뿐이다.
“안녕하십니까. 유세정 기사님.”
느글느글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남자는 새벽 다음가는 기업이었던 ‘대현’의 삼남 김종혁이었다. 평소 망나니 같은 행실로 유명한 병신인데, 쓸데없이 정중한 척을 하고 있는 게 정말 같잖다.
“예.”
세정이 퉁명스레 대답하자 김종혁의 눈썹이 살짝 경련했다. 허나 그는 별다른 내색 없이 다음을 이었다.
“헌데 그 분은 성년식에 참석하지 않는가 봅니다? 유세정씨와 각별한 사이라는 소문이 맴돌길래, 많이 기대하고 있었는데. 야밤에 같은 차에서 내리신다는 소문도 있더군요? 물론 그 이상은 그 분이 거부하시는 것 같지만.”
이번에는 유세정의 얼굴이 굳었다. 이 새끼를 누가 초대했지? 순간 예의상이라도초대장을 보내야 한다던 아버지를 원망하고 싶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안 하셔도 되고, 그 분은 곧 오시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흠. 확실히, 요즘 상당히 바쁘실테니까요. 특성 뿐만 아니라 사업 수완도 범상치않다고 소문이 나셨던데.”
더 몬스터의 주가가 날로 치솟자, 세간은 김세진의 능력을 칭찬했다.
물론 김세진이 한 거라곤 그저 재능이 넘치는 사람들’만’ 뽑아 그 잠재력을 만개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주었을 뿐이다.
그 환경의 도움을 받아, 번뜩이는 직감과 출중한 재능을 십분 발휘해 더 몬스터를이끌어가는 대단한 역군이 되어준 많은 직원들. 그들이야 말로 더 몬스터가 발전한 진정한 원인이다.
허나 본래 사업이 잘 되든 안되든 대외적인 스포트라이트는 오롯이 사장이 받는 법. 그래서 어느 순간 김세진은 대한민국에서 주목하는 천재적인 사업가 되어있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늦게나마 와주신다 하셔서 감사할 따름이지요”
“예?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안절부절하시던데, 제가 혹시 잘못 본걸까요?”
김종혁이 명백한 조소를 머금자, 세정은 두 주먹을 움켜쥐고선 열기가 다분한 숨결을 뱉어냈다.
허나 그는 그녀가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다시 한번 도발을 해왔다.
“아쉽네요. 한번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는데,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으니 원···.”
유세정이 이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연회장의 거대한 문이 벌컥 열렸다.
< 22. 준비 (2)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