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준비 (1) >
“김유린씨가 저희 단체에 가입해준다면야 뭐, 최대한 긍정적으로 검토를 해볼 수도 있겠지요.”
새로이 증축된 ‘더 몬스터’ 중심사옥의 단체장 사무실 내부.
김세진은 김유린과 업무관련 미팅을 하고 있다.
“그건··· 저도 그러고 싶지만, 저는 단체장님께서 내건 조건처럼 오랫동안 머물지못합니다. '10년 이상'이라는 단체의 규칙을 어기는 민폐가 될 바에야 단체에 가입 안하는게 나을 거구요. 그러니 너그러운 이해를 좀 부탁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오늘 두 개의 안건때문에 김세진을 직접 찾아왔다.
하나는 아직도 ‘기술점검’이라는 명목으로 판매처를 심사하는 중인 아탄이 2.0의진척상황을 물어보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아티펙트 숍에 올라온 매물을 구매하기 위함이다.
그 아티펙트는 [늑대의 손톱]이라는 이름의 흑요석 팔찌.
착용자의 신체를 강화함과 동시에, 활성화/비활성화로 나뉘어 활성을 할 경우에는 팔찌가 손 전체를 감싸는 건틀렛이 되는 신비한 아티펙트.
역시 그 이름답게 ‘늑대의 손톱’을 변형하여 새겨넣은 물품이다.
이 아티펙트에는 190억이라는 무지막지한 가격표가 붙어있긴 하지만, 보통 전투용 아티펙트는 하나를 구비해 놓으면 많은 기사들이 대여를 통해 돌려쓰기 때문에 그다지 비싼 것도 아니다.
게다가 근력과 지구력을 비롯한 신체능력이 무려 30%가까이 증진된다는 효용은 이미 증명이 되었고, 품질보증기간이 무려 30년이라 했으니, 이 팔찌를 통해 보장할 수입과 안전을 생각하면 오히려 싼 값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시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생각은 한번 해보세요. 언제나 길은 열려있으니까요.”
그는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실은 그에겐 아직 하나 더 남은 계획이 있었다. 강원도, 몬스터필드와 인접한 위치에 지어진 단체부지이니만큼, 땅을 좀 더 매입해 '단체 산하 기사단’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계획.
물론 김세진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은 아니고 기획팀에서 추천했다.
인건비, 건축비, 로비비용 등을 다 합산하면 초기자본만 최소 몇 천억, 유지비만 년 몇 백억 정도 가까이 드는게 기사단이지만, 그래도 세진은 추진하고 싶었다.
“어···. 그럼 면담은 이걸로 끝인건가요?”
“네.”
김유린이 조심스레 묻자, 김세진은 냉정하게 잘라냈다.
“···.”
그녀의 동공이 지진하기 시작했다.
아탄이 2.0과 아티펙트와 관련해서 얻은 답변은 오직 ‘생각해 볼게요’ 뿐. 확답은물론 긍정적인 여지 따위도 받아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단체에 덜컹 가입하겠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이제 가셔야지요?”
그리고 김세진은 그걸 노리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단체에 가입하더라도 훗날 결성될 기사단의 장(長)자리를 맡아줄 확률은 희박하다. 허나 그런 걸 차치하고서라도 김유린은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기사다.
“아, 아직 할말이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김세진이 직접 자리에서까지 일어나면서 쫓아내려 하자, 김유린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는 일단 자리에 착석했다.
“무슨 일이죠?”
“요즘, 더 몬스터에서 엔터테이먼트 사업도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렇죠.”
약 한달 전, 김세진은 기획팀의 전언으로 새로운 수익모델을 창출했다. 이른바 엔터테이먼트, 혹은 소속사.
더 몬스터에 소속된 단원들은 유세정과 이혜린 말고도 대부분이 화제성이 짙은 인물이었기에 기획팀에서 강력추천한 사업이었다. 게다가 장비같은 걸 미끼로 삼아기사들의 가입을 유도할 수도 있고.
그리고 사업을 시작한 지 고작 한 달이 되는 지금, 몬스터 엔터테이먼트는 문자 그대로 승승장구를 하는 중이다. 일단 이미 대스타나 다름없는 유세정과 이혜린은 두 말 할 것도 없고, 더 몬스터라는 후광에 이끌려 기사는 물론 유명한 연예인들까지 계약관련 문의를 해왔을 정도니.
“거기에 저, 김유린이 소속되겠습니다.”
“···아 그래요?”
이것은 김유린이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으나, 김세진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그에 순간 그녀는 자신이 하찮아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근데 그거는 제가 아니라, 관련 팀장에게 문의를 하셔야 되겠는데요.”
“···네? 아니··· 저··· 저 출연료가 회당 삼천만원인데···요?”
“아 그래요? 세정 씨는 이천 오백인데. 비슷비슷하네요.”
김세진은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유린을 도발했다.
“그.. 그런가요? 겨우 오백밖에 차이가··· 아··· 하지만, 저는 그간 방송활동을 많이 안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받아만 주신다면 더 열심히 해서 세정이와의 차이를 더욱 벌리도록······.”
그리고 그녀는 멋들어지게 걸려들었다.
*
첫눈을 기다리는 12월 초순.
‘더 몬스터’가 사업의 성공을 인정받아 등급이 B-에서 B등급으로 상승하자, 온 사방 군데에서 견제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주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서 사업허가를 무지막지하게 늦추거나, 환경관련법률을 지키지 않았다는 식으로 수십억에 달하는 환경부담금을 내게 강요하고, 부동산 투기를 했다는 악의적인 루머를 퍼트리는 등··· 참으로 치졸한 수법들이었다.
“지금 정황상으로는 복수의 대기업과 트릴로지가 합작한 걸로 추측되지만··· 확실히는 모릅니다.”
그래서 세진은 전담 대응팀까지 따로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어느샌가 지고서는 못참는 성격이 되어버렸기에.
“···그래요? 알았어요. 일단은 증거가 확실히 나올 때 까지만 기다립시다.”
허나 화를 내는 것 자체가 지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김세진은 최대한의 평정을유지했다.
“트릴로지는 일단 확실한거죠?”
“예. 그 단체의 간부가 로비한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아마도 트릴로지는 대한민국 최고의 단체라는 아성을 위협당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듯 했다.
물론 싸움 붙이길 좋아하는 언론이 이미 ‘더 몬스터’와 ‘트릴로지’의 일대기까지 비교하고 있으니 그럴만도 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더러운 수작이 아닌가.
“아, 그리고 단체장님. 길드신청은 해 둘까요?”
“네. 물론이죠.”
‘길드’, 반 년 전에 발의한 법안이 저번주에 발효되어 드디어 대한민국에 정식으로 생겨난 개념이다.
쉽게 말하자면 단체의 진화형. B등급 이상의 단체에 한하여 길드로 승격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3개월간의 복잡한 심사과정을 거쳐 ‘길드’가 되기에 마땅한 단체라 판명되면 단체에서 길드로 승격하게 된다.
서유럽의 선진국이나 미합중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는 이미 시행되고 있는 제도였으나, 대한민국은 여러가지 사정이 겹쳐 이제서야 시행되었다.
그리고 사실 이 법안이 이렇게 늦게나마 통과하게 된 이유는 더 몬스터의 공로가 컸다.
그 법안을 둘러싼 뒷배경은 이러하다.
트릴로지와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았던 새벽은 이 '길드제도’를 어마어마한 로비까지 하며 막아내고 있었다. 안 그래도 껄끄러운데, 길드제가 시행되면 트릴로지의 영향력이 더욱 강해질 테니까.
그때 마침 단체 유세정이 창립멤버로 새벽에 우호적일 수 밖에 없는 ‘더 몬스터’가 신성처럼 등장했고, 새벽은 국회에 로비할 금액을 모조리 더 몬스터에 투자해 트릴로지의 대항마가 될 '더 몬스터'의 발전을 조력했다.
그리고 그렇게 새벽의 로비가 사라지자 자연스레 ‘길드법’이 통과된 것이다.
물론 길드법안이 발효되었다고 해도 더 몬스터가 무조건 길드로 승격할 것이라는뜻은 아니다. 일단 새벽에 비우호적인 재벌들의 간부들 중에는 단체 트릴로지에 소속된 사람들이 많으니, 지금보다 더욱 추잡하고 더러운 뒷공작이 치열하게 펼쳐지겠지.
“그리고 아직 하나 더 남아있습니다.”
“또요? 허어··· 요즘 직원들이 많이 바쁜가봐요?’
거의 3시간 연속으로 계속되는 보고서행렬, 김세진은 정신적 피로로 인해 어지러운 머리를 문질렀다.
그만큼, 단체일이 참 많아졌다.
인력도 부족해서 계속 뽑다 보니 어느새 직원의 머릿수는 세 자리를 가벼이 넘기게 되었다. 세 개의 팀을 더 개설했고, 각 팀당 팀원숫자는 평균 23명으로 당장 3달전에 비해 4배 가까이 늘어났다.
그 탓에 인건비로만 년에 200억 가까이 나가는 실정이지만, 김세진은 처음에 다짐했던 대로 사람에게 쓰는 돈은 아끼지 않았다. 또한 그렇게 대우가 좋다는 사실은자연스레 소문처럼 퍼져나나가, 아주 가끔씩 추가직원을 뽑을 때면 국내 굴지의 대기업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의 직원들도 심심찮게 지원서를 보내왔었다.
“하하, 괜찮습니다. 개인배정되는 숙직실도 웬만한 가정집보다 좋고 해서, 철야해도 무리는 없습니다.”
“요즘처럼 일이 많은 날은 어쩔 수 없지만, 조금 한가해지면 정시퇴근은 최우선으로 지켜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에 결재해야 하실 건 기술팀······”
조한성이 말을 이었다.
*
“오빠. 또 무슨 생각해?”
“···응?”
세진은 유세정과 함께 레스토랑으로 왔다. 일은 바쁘고 머리는 어지러웠지만, 그녀의 애절한 눈빛을 무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 김유린 기사님 생각했지? 어제 면담했다며.”
또 괜한 질투가 발동한 듯, 유세정이 입을 삐죽 내빼고선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야 그런 거. 그냥··· 오늘 조금 피곤해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7시간 중 무려 4시간을 오롯이 설명을 들으며 서류를 읽고 결재하는데에만 할애했으니 지칠만도 했다.
“···그럼 오늘도 바로 집에 가야되겠네?”
“응. 미안.”
“오빠 집에 나는 영영 못 가는거고?”
“그건 원래부터 당연했던거지. 아직 고등학생 딱지도 안 땠으면서 어디 남정네 혼자 사는 집에 오려고···.”
그녀는 잔뜩 토라진 표정으로 스테이크를 거칠게 씹었다. 질겅질겅- 왠지 화난 강아지같아서 별로 위협적이지는 않다.
“···아. 갑자기 생각났는데, 오빠. 혹시 나 졸업식때 와줄 수 있어요?”
이미 말을 편하게 하기로 했으면서도, 그녀는 부탁을 할 때면 언제나 존댓말을 사용하는 이상한 습관이 있었다.
“음? 보통 그런 자리는 가족끼리 가지 않나?”
그의 물음에 유세정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늦지 않게 제 실수를 알아차릴수 있었다. 가족이 온다면, 자신을 초대할 이유도 없겠지.
“아빠는 바쁘고, 할아버지도 이제 곧 연말이라 바쁘고, 이혼한 엄마는 어딨는지도 모르겠고, 나는 외동이라 형제자매도 없거든요? 그래서 올 사람이 오빠 밖에 없어요”
그녀는 담담했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숨겨지지 않는 슬픔이 담겨있어, 세진은 잠시 말문이 막힐 수 밖에 없었다.
“와줄··· 거예요?”
굳이 그녀를 기다리게 할 필요는 없다, 어서 고개를 끄덕이자.
“···고마워요.”
유세정이 그와 눈을 마주하며 씩씩한 미소를 지었다. 세진은 그 미소가 외롭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탁자 위의 손을 살짝 움직여,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아싸.’
그리고 그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올 사람은 있다. 집사 ‘박현오’. 하지만 이제 그는 졸업식에 오지 못하게 되겠지.
*
“매번 고맙네.”
김세진과 유세정이 서로를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고마워?”
의미심장한 물음.
세진이 고개를 갸웃하자, 유세정이 그의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리곤 그가 거부할 틈도 주지 않고 기습적으로 그를 꼬옥 껴안는다.
“···뭐.”
“작별포옹. 서양에서는 다 이러잖아. 그러니까 나도··· 고마우면 조금만 이러고 있어줘요···.”
세정이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역시, 이 남자의 품은 너무 좋다. 피로와 불안이 싹 가시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품에 안겨 기분 좋은 향기를 온몸으로 만끽하고 있노라면··· 세상 그 어느무엇도 부럽지가 않다.
“가만히만 있지 말고··· 오빠도 안아줘요.”
유세정이 그를 그윽하게 올려다보았다.
애틋한 눈빛과 간절한 목소리.
그는 그녀의 허리에 자신의 팔을 둘러, 더욱 진하게 감싸 안았다.
*
이튿날, 김세진은 비밀리에 용병단 매니저 김유손을 불렀다. 열 세명의 용병과 스무 명의 첩보원이 소속되어있는 용병단의 활용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저야 어떻게 할지, 단체장님의 결정에 맡길테지요.”
김유손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현재 몬스터 용병단은 밀려드는 임무로 인해 과열되고 있다. 일단 제대로 된 용병단은 전 세계적으로 이곳 하나밖에 없으니, 자연적으로 ‘세계 최고’라는 타이틀을 획득하게 된 탓이다.
“그럼 용병은 일단 차치하고, 첩보원들의 교육은 어떤가요?”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암행과 은닉은 물론, 신분위조기술까지. 단체장님께서 지하에 마련한 몬스터 정보국에서 열심히 트레이닝하고 있습니다.”
몬스터 정보국이라 하니 왠지 쑥스럽고 멋쩍고 그렇지만, 그래도 지금의 김세진에게는 꼭 필요한 기관이다.
“···실전투입이 가능한가요?”
“스무 명 중 여섯 명, 그러니까 단체장님께서 말씀하신 ‘황금색 아우라가 진한 첩보원’은 이미 그 정도로 숙달되었습니다. 게다가 실전투입이라고 해보았자 아직은 호텔 탐색밖에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기회를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요.”
개인적으로 첩보체계를 조성하는 건 엄연한 불법이라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래요. 그럼 일단 그 여섯 명을 투입합시다.”
“예.”
목적은 흡혈귀의 차기 제왕이 도사린다는 호텔을 찾아내는 것. 망설일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