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하는 몬스터-71화 (71/174)

< 21. 새로운 시작점 (2) >

전라도 시골의 한 전원주택에서는 예능프로그램의 촬영이 한창이었다. 촬영 중인프로그램은 ‘기사들의 전원주택’이라는 예능으로, 요즈음 마구잡이로 범람하는 기사예능 중에서도 가장 핫하다고 여겨진다.

이 예능의 컨셉은 ‘기사들의 전원주택’이라는 제목 그대로다.

9명의 기사들이 몬스터 청정구역인 전라도의 시골에 머물며 제작진이 짜놓은 미션과 게임도 하고, 식사도 스스로 준비하고, 진솔한 얘기도 나눈다.

언뜻 들으면 평범한 컨셉이지만 캐릭터가 확실한 9명의 기사들이 출연하니 무척 재미있는 그림이 많이 나왔다. 일례로, 9명중 8명이 어린 나이부터 기사가 되기 위한 조기교육을 받아온 터라, 밥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 밖에 없어 밥 하나를 짓는데도 난리가 났었다.

그리고 그런 각양각색의 출연자 중 가장 인기있는 기사는 단연 유세정이었다.

언제나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지만, 이따금씩 짓는 햇살같은 미소가 너무나도 매력적인 여인. 그녀의 공식적인 팬클럽이 생기게 된 이유가 이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유세정은 이 프로의 최대 수혜자임과 동시에 최대 공로자였다.

“세정이 너무 오랜만이야~ 언니가 너 보고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

“···2주전에 봤는데요 뭘."

2주에 한번, 3박 4일로 촬영하는 탓에 꽤 오랜만에 모이게 된 9명의 기사들. 그들은 서로서로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선, 여느 때처럼 PD가 줄 미션을 기다리기 위해 거실에 모였다.

“우와? 세정아, 너 그 목걸이 뭐야?”

그러는 와중에 김희수라는 여기사가 세정의 목걸이를 가리키며 물어왔다.

“네, 네넷?”

예상했던 바였지만 막상 닥치니 세정은 긴장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방송국에서도 허락해 준 간접광고라는 명목이 있긴 하지만··· 이 목걸이는 그 남자가 자신에게 처음 선물해준 물건이니까.

“흠. 남자친구가 사준 것 같은데?”

그에 소파에 앉아 괜히 무게를 잡고 있던 남기사가 탐탁치 않은 기색으로 툭 내던졌다.

그는 고려기사단의 상급기사 ‘손철준’으로, 유세정과 미묘한 러브라인이 감돌고 있었다. 러브라인이라고 해봤자 요리를 죽도록 못하는 유세정이 그를 이용했을 뿐이지만, 가장 비쥬얼이 좋은 두 사람이니만큼 PD와 작가, 시청자들이 앞장서서 엮어버렸다.

“와. 진짜야? 이야, 이거 촬영 시작하기도 전에 대사건인데?”

“촬영은 이미 시작됐어.”

“···어쨌든. 세정아. 진짜 남자친구가 선물해준 거야? 아니, 세정이 남자친구 있었어? 우와, 철준오빠 엿먹었네~”

그 즉시. 9명의 기사들이 유세정의 목걸이를 주제로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오디오가 겹친다, 는 표현이 무엇인지 여실히 알 수 있는 광경이자, 이 예능프로만의 매력이었다.

“아, 아니에요!”

결국 유세정이 소리치고 나서야 저들끼리의 대화소리가 잦아들었다.

세정은 기사와 스태프, 총 60여명의 시선집중에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그저 언제나와 같은 냉소적인 태도로 넘겼을테지만, 그러나 김세진이 관련되니 평온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일단 선물을 받은거긴 한데···.”

“남자친구는 아니다, 이 말인가?”

손철준이 짧은 웃음을 터트리며 괜히 머리를 쓸어 넘겼다.

“···.”

허나 유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어울리지 않게 모태솔로였는데, 연애경험이 없기 때문일까. 김세진이 무척 신경쓰였다.

포옹을 하긴 했지만 고백을 받지는 않았으니 연인사이가 아닌 건 확실하다. 하지만 여기서 아니라고 단언을 해버리면 혹시라도 그가 싫어하지는 않을까···.

“···뭐야. 진짜야?”

그에 손철준이 잠시 여유로움을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유세정은 한참동안이나 입을 열지 않다가,

“남자친구는 아니고, 협찬 겸 선물로 받은 거예요···.”

결국 아니라고 대답했다.

손철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이번에는 여자기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기사라 하여도 어쨌든 여자인 법. 그녀들은 예쁜 목걸이를 두고 어디서 샀냐, 얼마냐, 그 루비가 진짜냐, 따위의 말들을 쏟아냈다.

“자, 진정하시고. 이제 본격적으로 촬영 들어갑시다!”

결국 PD가 나서고 나서야 그 소요사태가 진정되었다.

'징조가 좋네.'

그런 PD의 입가에는 큼지막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고작 촬영시작한 지 30분밖에지나지 않았는데,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킬 만한 꼭지를 따게 되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게다가 유세정이 수줍어하는 아주 희귀한 모습은 자신이 보기에도 껴안아 주고 싶을 정도니···

‘아니 이건 아니고.’

PD는 고개를 거세게 젓고선 준비해온 미션판을 들어올렸다.

“일단 출출하시죠? 밥부터 먹읍시다.”

*

햇볕이 쨍쨍하게 내리쬐는 오후. 7인의 기사는 먹거리를 구하기 위한 미션 혹은 채집을 하러 떠났고, 유세정은 손철준에게서 요리를 배우고 있다.

요리라고 해봤자 재료가 없는 지금은 밥을 짓는 것 뿐이지만, 그래도 세정은 손철준의 말을 경청했다.

평소에는 어쩔 수 없이 카메라가 있으니까 요리하는 시늉만 했지만, 언젠가부터. 아니, 정확히는 김세진과의 그 일이 있은 이후로 생긴 심경의 변화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이 해주는 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 그건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이거면 된 거예요?”

세정은 쓸데없이 결연한 표정으로 쌀이 담겨있는 냄비를 주시했다.

“어. 물 양도 적당하고 좋네.”

그 귀여운 모습에 철준은 피식 웃고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그러나 세정의 반응속도는 상당했고, 그의 손은 허공을 휘적이고 말았다.

“···커흠. 아 모기.”

철준은 괜히 머쓱해져서 실제로 벌레가 있는 척 두어 번 더 허공을 휘적였다.

“이제 다음은 국을 만들어 보자.”

*

“나중에 내가 더 비싼 걸로 사줄게.”

휴식시간, 철준이 별안간 세정의 목걸이를 가리키며 느글느글한 미소를 지었다.

“네?”

“그거 말이야.”

재벌 3세에게 물건의 금액을 운운하는 요상한 말이었지만, 유세정이 이미지메이킹을 위해 평소에는 용돈을 받으면서 생활한다고 인터뷰를 했기에 이해할 만했다.

“이거보다 비싼 거요?”

유세정이 살짝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몬스터 아티팩트는 아직 세간에 공개되지 않은 사안이라서 그런가. 유세정은 선물해준 목걸이를 우습게 취급하는 태도가 괜히 기분이 나빴으나, 손철준은 무척 당당했다.

“당연하지. 물론 선물의 가치가 오롯이 금액으로 결정되는 건 아니지만, 너한테 어울리는 더 예쁜 목걸이가 있을 것 같아서.”

약간 오묘한 표정의 세정은 그런 그를 한참동안이나 바라보다가,

“···이거보다 더 비싸려면 핑크 다이아몬드라도 가지고 와야 될텐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방금 자신의 멘트에 취해있던 손철준은 자세히 듣질 못했다.

“응? 뭐라고?”

“···아니에요.”

*

유세정이 김세진을 위해 요리를 배우고 있을 때, 그는 더 몬스터 사옥 지하에 위치한 단원 전용 훈련실에서 훈련을 하는 중이었다.

“와. 이거 뭐야?”

허나 훈련실 안에는 김세진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체와 제휴를 맺은 기사단, 칠흑기사단에서 그의 훈련을 도와줄 기사를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세진 님, 신체능력이 상당히 좋으시네요!”

그렇게 해서 파견된 기사, 이혜린이 그를 칭찬했다.

이혜린은 칠흑기사단에서 김유린 다음가는 얼굴마담으로, 그 붙임성 좋은 성격 탓에 연예계 활동은 오히려 김유린보다 활발하다. 그리고 취미가 TV보기밖에 없는 김세진은 그녀의 얼굴이 무척 익숙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오크의 무기를 구매한 여인이기도 했으니.

“기사로 따지면 어느 급 정도가 될까요.”

“글쎄요···? 아마 중하급?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칠흑기사단이 많고 많은 기사 중에 특별히 이혜린을 보낸 이유는 역시 흔한 미인계, 김세진이 남자이기 때문이었다.

“아··· 그래요?”

그녀의 말에 김세진은 실망 아닌 실망을 했다.

아직 영체화를 통해 몸을 강화시키지 않았다. 그 말은 즉 오직 ‘인간 김세진’의 스펙으로만 중하급 기사까지 도달했다는 뜻.

충분히 만족해도 될 수준이긴 하지만···.

‘직접 나서기에는 아직 멀었네.’

인간인 상태로도 흡혈귀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아직 부족하다.

“뭐야, 왜 그렇게 실망해요? 이것도 엄청 대단하신 거예요~”

이혜린은 그런 김세진을 양껏 칭찬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예우적인 금칠보다는 실질적인 훈련을 원했다.

“그럼 일단 다음 훈련 갈까요? 무기술(武器術)인가?”

“아, 예 바로 넘어가죠. 빨리빨리~”

신체능력측정 이후는 무기술의 훈련이었다. 일단 오크의 특성인 ‘무기 마스터리’가 지금도 적용되긴 한다. 스킬의 등급은 고급자, 이론적으로는 모든 종류의 무기를고급 이상으로 다룰 수 있다.

"무얼 먼저 할까요~ 알아 맞춰 봅시다···."

이혜린은 살랑살랑 걸어 전시장에 놓여진 훈련용 롱소드를 두 개 집어 들어, 하나는 세진에게 건넸다.

“우선은 검. 가장 보편적인 무기예요. 일직선으로 쭈욱~ 뻗은 탓에 마나검기를 두르기에 쉽고, 진입장벽도 가장 덜하답니다. 하지만 이 검에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는데요. 먼저 저희가 쓸 검은 롱 소드라는······.”

이혜린은 방실방실 웃으면서 참 많이 떠들었다. 원래 성격이 저렇게 쓸모없이 긍정적인지, 처음에는 짜증이 났던 김세진이지만.

“이렇게 샥샥! 어때요. 잔상도 안남지요~?”

계속 보고있자니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괜히 기사보다 연예인으로 유명한 게 아니구나, 싶기도 했다.

“아, 혹시 검술 배워 보신적 있으세요?”

김세진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검집에서 검을 빼어 들자, 이혜린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어왔다.

“아뇨. 그냥 사냥하면서 익혔다 뿐이지, 특별히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이혜린은 살짝 긴장하며 대련준비자세를 취했다.

“그럼 일단 실력측정을 좀 해볼까요?”

“네. 근데 너무 봐주시지는 않아도 됩니다.”

그가 손을 풀기 위해 검을 살짝 휘젓자, 그 궤적은 마치 뱀처럼 휘며 허공을 수놓았다.

“···어···. 정말 안 배우셨어요?”

그 모습을 평범하다 보기에는 도통 힘들었기에, 이혜린이 재차 물었다.

“네. 근데 제가 아마 재능이 좀 있을지도 몰라요.”

애매한 대답. 이혜린은 약간 불안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사실 검술 그 자체가 아닌, 특성과 마나의 도움으로 중상급기사까지 된, 그러니까 흔히들 말하는 ‘특성빨’ 기사다. 노다니는 것을 좋아해 매일반복이 생명인검술을 경원시했기 때문이다. 물론 애초에 워낙 재능이 뛰어나 검술도 중급기사 수준은 되겠지만서도···

“···마나나 특성은 쓰지 말아야겠죠?”

“그럼 당연하죠. 제가 마나를 못 쓰는데.”

김세진이 이혜린에게로 검을 겨냥했다. 진검의 검날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갈까요?”

“···예? 아, 예. 오, 오세요.”

혜린은 침을 꿀꺽 삼키고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김세진은 별 다른 신호없이 쇄도했다.

인간인 채로 기사와 싸워본 적은 처음이다. 그래서 이런 대련에서는 어떻게 임전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대신, 그는 그저 본능에 맡기기로 했다.

혜린의 지척에 닿은 그는 순간적으로 몸을 숙여, 검을 아래에서 위로 치밀었다.

“!”

그녀는 황급히 검을 비틀어 막아냈으나 위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단지 일격을 막아냈을 뿐임에도 검을 쥔 손아귀가 아려올 정도.

허나 감탄할 시간은 없었다. 세진은 쉴 새없이 검격을 쏘아냈다. 맹렬하고 저돌적인, 어느 교본에도 적혀져 있지않은 검술이었다.

쾅- 쾅-

검을 막아낼 때마다, 무슨 폭탄이 터지는 것만 같은 폭음이 울려퍼졌다. 이게 정말로 마나가 담기지 않은 검술이라고? 혜린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으, 으아··· 잠깐! 항복! 하앙복!”

둘 사이의 대련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사선으로 내리쳐지는 호쾌한 일격에 담긴 강맹한 힘, 그녀는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검을 놓쳐버렸다.

“아읏.”

이혜린은 처량한 자태로 바닥위로 엎어져서는, 피가 살짝 세어 나오는 손아귀를 매만졌다.

“어? 이겼네?”

김세진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것은 혜린이 지닌 기사로서의 자존심을 건드려버렸다.

그녀가 이를 까득 깨물고서 몸을 일으켰다.

“···이건 제가 쓰는 무기가 아니라서··· 저기요 세진 씨. 정말 누구한테 안 배우셨어요?”

어느새 호칭은 세진 님에서 세진 씨로 격하되어 있었다.

“네. 그럼 이제 훈련은 그만할까요?”

“그만하다뇨? 아직 무기는 많이 남아 있는 걸요?”

이혜린은 억지 미소를 지은 채 전시장 안에 있는 수많은 종류의 무기들을 가리켰다. 그녀는 세진이 오직 검술에만 특출한 능력이 있다고 추측한 듯, 콧김을 씩씩 뿜어대며 이번에는 창을 하나 집어 들었다.

“롱소드는 제 손에 안 맞는 군요. 창술을 가르쳐드리지요.”

혜린이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

그리고 그녀는 정확히 일곱 번 연속 패배했다.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 대련은 그녀가 주무기로 사용하는 얇은 장도를 사용한 대련이었다.

하지만 혜린은 패배했고, 자존심이 완전히 짓밟혀버린 그녀는 눈가에 물기가 가득 고인 채. 거의 울면서 집으로 도망갔다.

*

“일은 잘 되어가고 있어요?”

-···노력하고 있으니까 재촉 하지마.

유백송의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재촉은 아니에요. 그냥, 혹시라도 도움이나 인력이 필요하면 망설이지 말고 저한테 부탁하라고 전해드리려고. 아시죠? 저 요즘 용병단 육성하는거···.”

-필요 없어. 끊는다.

“아, 잠깐만요.”

유백송은 시리도록 냉정했다. 진심으로 신기한 노릇이었다. 직접 만났을 때는 아무런 반항도 못하면서, 전화통화만 하면 무슨 살쾡이마냥···.

“그거 말고 또 하나 있는데.”

-또 뭔데.

그래도 차마 먼저 끊지는 않는 걸 보면 영향이 아예 없지는 않은 듯했다.

“라이칸이 말하길, 호텔이 수상하다네요.”

이건 김유손이 건네준 정보, 그러나 세진은 그의 특성이 들키지 않게 라이칸의 정보라 둔갑했다.

-무슨 호텔?

“몰라요. 그냥 호텔.”

-···장난해 지금?

유백송의 목소리에 살짝 노기가 스몄다. 김세진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괜히 화난 고양이같고 그렇다.

“진짜예요. 라이칸을 무시하시는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냥 호텔이라고 하면 어떻게 해. 전국의 호텔을 다 수색하라고?

“그래도 한번 노력은 해주세요. 저도 지금 막 인력을 모으기 시작한 터라 가용인원이 별로 없어서.”

-아니··· 후.

유백송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마지못해 알았다 답해주었다.

< 21. 새로운 시작점 (2) > 끝

ⓒ 지갑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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