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전조 (4) >
김세진은 그 이후로도 여러 말들을 해주었지만, 넋이 아예 나가버린 유세정은 제대로 알아듣질 못했다. 멍한 표정으로 예, 아, 그, 따위의 외마디를 내뱉을 뿐.
“...어, 어떻게 그게 가능해요?”
한참동안의 혼란 끝에 그녀가 겨우 맺어낸 문장이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까. 잠시 고민하던 그는 가장 범용적인 대답을 들려줬다.
“특성. 특성 덕분이야.”
“예에? 도대체 무슨 특성이···.”
무슨 특성이 그렇게 좋아. 유세정은 약간의 불공평함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보통 특성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완성형’과 ‘성장형’.
전자인 완성형은 처음부터 커다란 능력을 부여받게 되지만, 특성의 성장은 전무해 그 이후로는 오직 수련과 단련을 통한 ‘자기자신’의 발전밖에는 성장방법이 없다. 이 부분에서 대표적인 기사로는 ‘중검 마스터리’라는 특성을 지닌 주지혁이 있다.
허나 후자인 성장형은 완성형에 비해 처음은 미약할지라도, 노력을 기울인다면 ‘특성’과 ‘자기자신’을 동시에 성장시킬 수 있어, 그 훗날은 완성형보다 창대해질 가능성이 높다.
보통 기사나 마법사같은 특수직종들은 그 인구의 절반 이상이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현재 밝혀진 바로는 거진 80%이상이 완성형, 나머지 20%가 성장형이라고 한다.
허나 성장형인 20%의 절반 이상이 중상급 이상 기사, B등급 이상 마법사일 정도니. 성장형은 어쩌면 세계가 내린 하나의 축복이라 해도 무방하다 하겠다.
“···그렇군요.”
그리고 그녀는 김세진이 후자, 성장형 중에서도 아주 개사기 특성일 것이라 결론을 내리고 자세한 질문은 삼갔다.
세상에 이런 무지막지한 특성이 있다는 얘기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지만, 어쨌든 특성에 관한 세세한 질문은 실례로 여겨지니까.
“오. 믿어주는 거야?”
김세진이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몇 번 더 무작정 의심하고, 조금 오랫동안 캐물을 거라 예상했는데.
“그럼 뭐 어떻게 해요. 정~~말 말이 안 되지만, 그래도 오빠가 그렇다니까 믿어야지.”
유세정은 그가 보내는 따스한 눈길이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그렇게,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입가에는 어느새 깊은 미소가 그려지게 되었다.
“하암··· 근데 여기 취침실은 있어요? 저 너무 피곤한데··· 그리고 지금 정신도 몽롱하고 해서 막 꿈만 같거든요? 저 자고 일어나면 다시 말해줄 수 있죠?”
세정이 하품을 덧붙이며 말했다.
“당연하지.”
그 모습은 꽤나 귀여웠기에, 그는 세정의 발치까지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꽤나 갑작스런 스킨십이었지만··· 그녀는 그의 손길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흐흠.”
그래서 괜히 헛기침을 내뱉고선 고개를 푹 숙였다. 화끈거리는 자신의 얼굴은 분명 벌게져 있을 테니,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지하로 가자. 거기에 있어.”
김세진이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머리에서 손을 떼자, 그녀는 약간 아쉬운 기색으로 고개를 수줍게 끄덕였다.
*
칠흑기사단 본부.
간부 회의실의 출입문을 앞에 서서, 김유린은 심호흡을 한번 했다.
정말 오기로와 억지로 김세진과의 약속장소에 '혼자서' 나가기로 결심한 날. 그녀는 채영호를 비롯한 간부들과 약속을 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그 만남의 결과를 보고하는 것.
단지 두 남녀 간의 사적인 만남이라고 하기에는, 요즘 김세진의 유명세가 너무 드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오늘은 어제 있었던 김세진과의 미팅을 보고해야 하는 날. 그래도 두려울 건 없다. 아탄이와 관련해서 확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김세진이 그때처럼 ‘무기 신청서’하나를 선물해줬으니.
“···가자. 가자 김유린. 긴장하지 말고.”
유린은 자기최면까지 걸고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간부 회의실 내부에는 1팀에서 8팀까지의 팀장이 모두 자리하고 있었다. 여러가지 구설수에 시달려 두문불출하는 부기사단장과, 오늘 청와대에 약속이 있는 자신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간부가 모였다는 이야기다.
“오. 왔구나.”
채영호가 가장 먼저 그녀를 반겨(?)줬다. 뒤이어 쏟아지는 팀장들의 인사를 미소로 화답한 그녀는 대충 아무 자리에나 앉았다.
“그래, 무슨 이야기를 나눴느냐?”
물꼬를 튼 건 역시 채영호였다. 그는 은근한 눈길로 그녀가 손에 움켜쥔 한 장의 종이를 살폈다. 코팅된 모양새가 딱 봐도 심상치 않은 것이, 뭔가 하나 이상은 얻어온 듯 했다.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아탄이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 설명해주신 부분이 인상깊더군요.”
김유린은 짐짓 태연자약하게 말을 이었다.
세진은 당장 어제, 별 생각없이 그녀에게 아탄이의 발전방향을 일러주었다. 아탄이의 성능이 ─오크 대전사가 되어 단조기술이 성장함에 따라─ 거진 2배 이상으로 좋아질 수 있을 것 같다고.
“허어. 그럼 A등급 마나의 샘과 효율이 비슷해진다는 이야긴가? 지금 당장만 해도 B~C등급과 비슷한 효율을 내고 있는데··· 허, 참.”
그러나 세진이 별 생각없이 말했던 내용도, 이들에게는 귀중한 정보였을 따름이다. 몇몇 간부는 마나의 샘을 주로 만드는 마탑의 주식을 매도할 생각까지 했다.
“네. 또한 단지 훈련을 위한 아탄이뿐만 아니라, 여러 관련 방면으로 발전해나갈 계획도 있다더군요.”
간부들의 좋은 반응에 고무된 유린은 더욱 활기차게 말을 이었다.
“근데 그 종이는 뭐냐?”
헌데 순간 채영호가 그 맥을 툭 끊었다. 유린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지만, 이내 별 다른 내색없이 그 종이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세진 씨가 선물해주신 ‘오크 무기 신청서’입니다.”
“오호라? 이게 그 유명한 신청서구만.”
“과연··· 단둘이서 함께 식사를 하면 오크의 무기를 선물해준다더니, 그게 진실이었나 보군요.”
그녀가 꺼낸 범상치 않은 종이에, 주변 간부들은 별안간 화색이 되어선 종이 쪽으로 달라붙었다. 오직 채영호만이 살짝 탐탁치 않은 기색으로 생각에 잠겼을 뿐.
“이건 어떻게 쓸 예정이냐?”
“글쎄요. 내부 순위전 1등에게 선물하는 것도 나쁘지 않구··· 뭐든 좋겠지요!”
간부들의 반응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김유린은 채영호의 어두운 안색이 너무나도꼴보기 좋았다. 그래서 그녀는 얼굴에 미소가 만연한 채, 활기차게 말을 이었다.
“나중에 혹시 단체장님께 하고싶은 말 있으시면 저에게 부탁하세요! 무~지 친해졌으니까!······아···.”
말하고나서 순간 아차-했다. 사실 그와의 만남은 자신이 너무 긴장한 탓에, 분위기가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다. 대화도 툭툭 끊겼었고, 김세진은 답답하다는 표정도 지었었는데···
“오! 다행이구나. 요즘 다른 기사단은 그 남자와 연줄이 없어서 고민이라더니. 역시, 유린이가 복덩이야 복덩이.”
“어허, 나는 들어올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너는 아니잖아. 유린아, 저 영감은 너 고위기사 딱지 달기 한달 전부터 질투하고 있었단다.”
“그게 뭔 개소리야! 그리고 40대한테 영감이라니······”
그러나 지금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얼굴이 썩어가는 채영호를 보고 있자니···
“..하, 하하.. 그, 그런가요?”
도저히 말을 교정할 수 없었다.
헌데 그녀는 괜시리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해져오기도 했다.
죽을만큼 노력해서 기사에게 가장 중요한 ‘실력’을 쌓았을 땐 그렇게도 평가절하하던 이 사람들이, 지금은 단지 하나의 인맥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이렇게인정해 주다니···
“언제든··· 언제든 말씀하세···요.”
*
“주 5건이요? 그렇게나 많이요?”
─예. 단체장님 요청대로, 다른 기사들이 도착하기 훨씬 전에 사태를 끝냈습니다. 출동 시간부터가 격이 다를 정도였습니다.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고작 10분밖에 안 걸릴 정도니 뭐···
“오.. 근데 그렇게 빠르면 몸에 문제가 가지 않나요?”
─그건 마나강기 덕분에 괜찮았습니다. 근데 이 정도의 기압과 공기저항을 버텨내려면 적어도 중급 이상은 되어야 할 것 같더군요.
완연히 다가온 화사한 꽃의 계절. 그러나 지구의 국면은 모두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명백히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게다가 지구촌의 수 많은 나라 중, 특히 대한민국이 가장 심했다. 한 달에 무려 31번의 몬스터 습격사태가 발생, 문자 그대로 하루에 한번 꼴로 벌어지는 원인모를 습격에 시민들은 불안에 떨 수 밖에 없었다.
헌데 이 심각한 시국의 불똥은 난데없이 머핀이와 김세진에게 튀었다. 별안간 머핀이의 안전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많아진 것이다.
그래서 세진은 여론의 반전을 위해 주지혁을 시켜 머핀이를 타고 몬스터를 처리해 달라 부탁했다.
“근데 시민들의 반응은 어땠어요? 무서워하던가요?”
─아뇨. 별로 그런 사람은 없었고, 오히려 웃는 분들은 있었습니다. 양갈래 머리가 귀엽다면서.
김세진은 혹시라도 시민들이 머핀이를 두려워할까 염려되어 마력문신으로 좋은 향기가 퍼져 나오게 만들었고, 그걸로도 모자라 긴 머리털을 양 갈래로 땋아 놓기까지 했다. 최대한 귀여워지라고. 일단 성별이 여자이기도 하니까.
“근데 머핀이가 뭐 이상한 행동은 안 하던 가요? 한성 씨는 머핀이가 사탄이라고 하던데.
─예? 사탄이라뇨.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허허. 그 분이 악몽을 꾸셨나 본데요?
“···그렇죠? 아무래도 한성씨가 과로에 시달리나 보네요. 빨리 직원을 더 뽑아야겠네.”
─하하하.. 아. 단체장 님. 저 방금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마음껏 하세요. 그럼 이만 전화 끊을게요.”
─예 단체장님.
그렇게 주지혁과의 통화가 끝나자, 김세진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서 자신의 상태창을 한번 살폈다.
[이름: 김세진] [나이: 만 23세] [키:185.01cm / 몸무게:85kg]
▶능력치
[근력 113] [지구력 112] [민첩력 116][기력 46]
[마나친화력 36] [마력 31] [운 17]
*인간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300분/343분)
“후우···”
그리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계속 커가던 키도 이주일 째 그대로고, 몸무게만 조금 변했을 뿐이었다. 그나마 그 몸무게의 변화마저도 이번에 얻은 패시브 스킬인,
[전사의 특질 (F등급)]
- 1단계. 시간이 흐를수록 육체가 ‘전사’에 알맞게 개조되어 갑니다. (현재 완료율 15.5%)- 그 이상의 단계는 1단계가 완료되어야만 해금됩니다.
이 ‘전사의 특질’ 때문일 공산일 컸기에, 이제 흑색늑대로 동화되어 가는 건 어느정도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요 근래에는 아예 성질이 다른, 무지 쌩뚱맞은 문제가 하나 생겨버렸다.
원흉은 그의 책상 위에 놓인 한 권의 노트.
이 노트는 세진이 오크의 단조를 십분 활용하여 만든 통신기구다. 두 권이 한 쌍으로 제작되었는데, 어느 노트에든 필기를 하면 다른 노트에도 그것과 똑같은 내용이 적히게 된다.
그가 이 노트를 만든 목적은 보안을 유지한 채 ‘용병의 선술집’과 통신하기 위해서였다. 혹시라도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라이칸이 활동할까 두려워, 무려 3달 전에 미리 한 권을 선술집에 보내놓았다.
‘···처벌한다고 할 땐 언제고.’
그는 약간 어이없어 하며 다시금 노트를 집어 들었다. 21페이지의 중간에는 정확히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국가에서 라이칸에게 임무를 맡기고 싶다는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내용은 지금 벌어지는 사태의 원인을 밝혀줄 것. 보수는 ‘오크가 만든 무기’와 여태 저지른 범죄사실의 소거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여태 국가에서 라이칸 님에게 해온 잘못이 있어 이렇게 센 보수를 부른 것 같습니다만, 선택은 전적으로 라이칸 님에게 맡기겠습니다.
이 노트는 이후에 특수경찰국에게 압수될 예정입니다. 이 전의 페이지는 모두 내용을 전달받은 그 즉시 찢은 후 불태웠습니다만, 들켜서 정말 죄송합니다.]
보수가 오크가 만든 무기란다. 참,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어이없네 진짜.”
몇 주전부터 정부관련인사가, 그것도 부이사관이라는 사람이 이틀 걸러 하루 간격으로 찾아와서는 제발 아탄이를 좀 정부에 팔아줄 수 없겠느냐고 애걸복걸을 했었다. 순수하게 타국과의 관계개선, 즉 ‘외교’를 위한 목적으로만 사용하겠다고.
그냥 무시하려 했지만 그래도 좋은 목적으로 쓴다고 하니, 세진은 아탄이는 안 된다 말하고 대신 ‘오크 무기 신청서’를 건네 줬었다.
‘근데 내가 준 걸 여기다가 쓰네.’
물론 김세진과 라이칸이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은 몰랐겠지만, 이건 좀 아니지. 이게 외교야?
“···후.”
한숨을 내쉰 세진은 거절의 의사가 담긴 내용을 노트에 적어냈다. 괜히 괘씸해서,일부러 배짱과 허세도 좀 부렸다.
[하루아침에 사람을 범죄자 취급해 놓고, 이제서야 도움을 요청하다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사실 저는 여태까지 벌어진 사태의 전말과 원흉을 모두 꿰뚫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범죄자가 된 몸으로 일을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잠시 멈췄다. 필적을 숨기기위해 왼손으로 쓰려니 조금 많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블린의 손재주 덕분에, 이 왼손 글씨체도 평범한 사람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저는 먼저 범죄사실이 소거되고, 특수경찰국의 장(長)인 유백송이라는 호랑이가 직접 저에게 사과를 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실마리도 제공하지 않고 은둔할 예정입니다.]
*
*
김세진이 그렇게 내용을 적어낸 순간.
콰아아아앙─!
노트가 놓여져 있던 책상이 한 여인의 주먹질에 의해 톱밥수준으로 으스러졌다.
“으아!”
“엄마야!”
주변에 있던 사람의 비명과 함께, 순간 주변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호랑이를 닮아 흉포하고 난폭한 심성. 그러나 매스컴에서는 대한민국의 수호신이라 비춰지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이중적인 여인,
“하··· 호랑이? 이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잡놈이 감히···”
세계 유일 신수(神獸)과 수인 유백송. 그녀는 난데없는 문자모욕에 순간 화를 참지 못했다. 파르르 떨리는 눈썹과,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그 분노의 격렬한 정도를 대변하는 듯 하다.
"와. 나. 미쳐버리겠네. 호랑이?"
그녀는 호랑이라는 말을 가장 혐오했다. 백호인 자신은 고작 호랑이따위와는 철저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합리적인 집착이 그녀에게는 있었기 때문이다.
“크아아아앙!”
유백송이 짐승의 포효를 내질렀다. 물론 그래도 그녀는 인간, 그것도 체구가 조금작은 '여인'이기에 그렇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앙증맞다면 옳다구나 할 수준.
그러나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을 땐 이런 작위적인 행동을 하곤 했다.
자신이 1세대 수인이라는 자부심과 종족적 야성을 표출하기 위해서라나 뭐라나.
"크아앙! 크아아아앙!"
그 탓에, 내부의 사람들은 정말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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