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전조 (3) >
일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김세진은 가장 먼저 새벽의 도움을 얻어 정부를 비롯한 여러 관련 기관들과 복잡한 상담, 면담절차를 거쳤다. (물론 그곳에 참석한 건 김세진이 아닌 조한성이었다.) 그러나 아직 진행중인 와중에 정보가 유출되어 신문의 1면에 대서특필되었고, 세진은 결국 공식적인 기자회견을 하고서 머핀이 시승영상까지 찍어 여러 언론에 제출해야만 했다.
예상했던 대로 수없이 많은 반대가 있었다. 몬스터 관련단체에서는 아예 게거품을 물고 달려들었고, 몇몇 강경한 기사들은 몬스터를 토벌해야 한다며 검을 들고 찾아오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반대여론의 대부분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 김세진이 자신의 SNS에 게재한 하나의 영상에 의해 눈 녹듯이 진압되었다.
그 영상에는, 머핀이가 눈가를 부드럽게 휘며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는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꺄아아아- 하는 귀여운 웃음소리는 덤.
영상을 찍는 도중 조한성은 그런 머핀이를 바라보며 무언가 아주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지만, 세진에게는 그저 마냥 귀여운 애완동물일 뿐이었다.
완벽하게 길들여진 이 모습에, 찬반으로 나뉘어 거세게 들끓던 학계도 정말 깜짝 놀랐다. 단지 식량을 대가로 일시적으로 복종하는 관계라고만 생각했건만. 진실로 주인에게 길들여져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이었기에.
그렇게 대부분의 여론은 다시 ‘찬성’쪽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헌데 그러는 와중에 조금 이상한 여론도 갑자기 생겨났다. 세진이 당황하기에 충분할정도로.
그 여론의 최초 근원지는 난데없는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그럼 그 분은 영웅오크랑 대화도 나눌 수 있겠네요?
기사들이 출연하여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토크쇼. 이 프로에서 유세정이 게스트로 나왔고, 진행자는 자연스레 세진의 이야기를 물었다.
─네? 뭐··· 그럴 수도 있겠죠. 근데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그냥 말단이라서. 저는 말단에 불과하거든요. 자세한 내용은 절대 알지 못해요. 알려주지도 않으시고. 왜냐면 중요하지 않은 말단이거든요.
그녀는 세진이 단체와 관련된 사항을 일언반구도 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잔뜩삐쳐있었고, 세진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몹시 퉁명스런 태도로 일관했다.
─···아. 그러시구나.
그래서 그 주제는 단지 세 문장으로 끝이 났지만, 후폭풍은 이상하리만치 거셌다.
먼저 유세정이 연신 자기를 ‘말단’으로 비하하며 자책하던 모습이 꽤 인상깊었는지 소위 말하는 짤방으로 인터넷 등지에 퍼졌고, 그 이후에는 자연스레 대화의 내용도 주목받게 된 것이다.
사람을 단 한번도 살해하지 않고 오히려 도와주었던 영웅오크니까, 혹시 정말 설득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실제로 한국대학교 교수가 그 주제를 갖고 김세진을찾아오기까지 했었다.
물론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세진으로서는 답답하리만치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지만.
“근데, 저도 궁금하긴 해요. 그게 되는지 안 되는지.”
김유린이 세진의 눈치를 슬쩍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 두 사람은 무려 3주 전에 잡혔던 약속을, 이제 와서야 뒤늦게 이행하고 있는중이다.
“···유린 씨까지 그러시네.”
“하, 하하.. 미안해요. 역시 말도 안되는 소리였죠? 하하하, 저도 참 쓸데없는 소리를···.“
헌데 식사에 임하는 그녀의 모습이 상당히 이상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하면서도 연신 세진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그때 보았던 당당함과는 딴판이었다.
“뭐··· 완전 말도 안되는 건 아니겠죠. 충분히 대화가 통한다면, 그 오크가 우리를도와줄 수도 있는거고.”
“아하하, 그런가욥..아앗.”
극도로 긴장했기 때문일까. 유린은 결국 혀를 깨물어 버렸다.
“어, 괜찮으세요?”
“아, 예. 개차나여. 그냥··· 잠깐만요. 저 화장실 좀···.”
그녀는 결국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아 나 왜이래 진짜···’
세면대 거울 앞에 선 유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채영호와 담판을 지으면서까지 혼자 왔는데··· 이러다 눈물이라도 날 지경이었다.
자꾸 채영호의 ‘중요한 사람이다’ ‘핵심적인 인물이야’ ‘더 몬스터는 트릴로지의 뒤를 이을···’ 이 따위 부담감을 주는 말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게다가 요즘은 몬스터까지 길들이니 마니 하는 말도 안되는 뉴스까지 있어서 더 긴장되고, 그래서 더욱 말이 안 나오고···.
“아··· 도망가고싶다.”
김유린, 27년 생애 이런 기분은 난생 처음이었다. 언제나 꿀릴 것 없이 당당했었는데···
"후."
그러나 결코 포기란 없다.
그녀는 냉수로 세수를 한번 하고서, 어금니를 꽉 깨문 채 화장실을 나갔다.
* * *
새벽기사단 1팀 전용 회의실. 국가가 선포한 상비명령에 따라 최소인원은 기사단에 상주해야 했기에, 늦은 밤임에도 꽤 많은 기사들이 이 회의실 내부에 머물고 있었다.
“···후.”
그러나 회의실을 가득 채운 건 오직 무거운 분위기와 짙은 침묵 뿐이었다.
기사들은 단 한 명의 눈치를 보느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
유세정, 그녀는 불편한 표정으로 연신 한숨을 뻑뻑 내쉬었다.
이 곳에 있는 7인의 기사들이 전원이 고작 중하급 기사의 눈치를 본다는 것이 조금 이상해 보이지만, 그러나 유세정은 그럴 만한 인물이 맞았다.
새벽기사단장의 딸이자, 단체 ‘더 몬스터’의 창립멤버. 요즈음엔 왜인지 자꾸 ‘나는 단체의 말단 중에서도 말단’ 거리면서 자기비하를 하는 면모가 많이 보이긴 하지만.
탕-
그때, 유세정이 갑자기 핸드폰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순간 모든 기사들이 몸을 움찔 떨었다.
“···진짜.”
연락 안할 생각인가. 유세정이 꽉 움켜쥔 두 손을 부르르 떨었다.
일단, 그녀는 김세진에게 삐쳤다. 그것도 아주 많이. 잔뜩.
명목상이라도 창립멤버다. 그런데도 단체에 관한 모든 크고 작은 소식을 다른 사람, 심지어 뉴스로부터 전해 듣는 건··· 한 두 번이면 그렇다 쳐도, 이렇게 연속적이면 나를 무시 하는건가- 하는 섭섭한 감정이 생기기 마련이다.
툭 까놓고 말해서 여태 새벽이 김세진에게 엄청난 도움을 줬으면 줬지, 손해를 입힌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그건 모두 자신이 아버지나 할아버지에게 부탁했기에 가능했던 일이고. 근데 이렇게 자신만 배제하는 건···
그래서 유세정은 일부러 2주동안이나 김세진과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허나 오히려 답답한 건 이쪽 뿐이었고, 그는 계속해서 승승장구했다. 그의 SNS에는 맨날 주지혁이나 조한성을 비롯한 직원들과 찍은 속 편한 사진들만 올라오고···
결국 그녀는 당장 3시간 전. 김세진에게 아주 긴 메세지를 보냈다.
여태 축적된 모든 섭섭함을 담아서, 그러나 너무 차가워 보이지는 않게 이모티콘까지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진짜 개짜증나.”
답답함에 이를 앙 깨문 그녀는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트리고서, 핸드폰을 켜 세진에게 보낸 메세지를 다시금 확인했다.
여전히, 읽지를 않고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이번에는 그의 SNS를 탐독했다. 새로운 글이 하나 전해져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오크의 Short Sword로 첫 번째 사냥을 완료했습니다. 김세진 단체장님. 무기를 판매해주어서 고맙습니다. 저는 이 무기를 아주 잘 쓰고 있습니다. 오크 대장장이님에게 안부인사를 전해주세요.]
빅토리아 안젤라, 오크 대장장이에게서 무기를 구매해간 여자다. 그녀는 몬스터 사체 옆에 다소곳이 서서 미소를 짓는 사진을 세진에게 보내 놓았다.
“와 나.”
순간 짜증이 팍 났다. 팔로워 숫자가 어느새 95만명이나 되어 자신을 턱 끝까지 추격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아니. 이건 아니고.
괜히 핸드폰을 내팽개친 세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진지함을 담아 보낸 아주 긴 문자, 아니 어쩌면 ‘편지’가 세 시간동안 씹히고 있는데. 그녀로서는 쪽팔리고 서럽고 짜증나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면서도 슬쩍슬쩍 저 멀리 튕겨나간 핸드폰을 살폈다.
혹시라도 답장이 온 건 아닌지.
“···아이씨.”
그러다 순간 자괴감이 들어, 세정은 책상 위에 엎드렸다.
바로 그때였다.
부르르- 진동이 울렸다.
그 직후 유세정의 몸놀림은 어느때보다 기민했다.
우당탕탕- 하마터면 의자와 책상이 뒤엎어질 정도로 빠르게 뛰쳐나가 핸드폰을 움켜쥔다. 액정화면에 찍힌 이름은 ‘세진오빠.’ 순간 심장이 덜컹했다.
“으으.”
그러나 그녀는 필사적으로 참았다. 참아야 한다. 바로 받으면 안된다. 일단 첫 번째는 무시하고 두 번 째에··· 근데 다시 전화가 안 오면 어떻게 하지?
결국 유세정은 진동이 정확히 4번 반복되었을 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처음은 아주 차가운 목소리로, 퉁명스레 대답한다.
─어. 문자봤어. 미안, 네가 그렇게 섭섭해 할 줄은 몰랐어. 내가 대인관계에 조금 많이 서툴거든.
언제 들어도 마음이 편해지는 중저음이었으나, 세정은 이번만큼은 호락호락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일단 최대한 삐친 척 뻐팅기다가···
─혹시 지금 만날 수 있니?
다시금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왜왜왜, 왜요? 지금, 왜요? 왜 만나자는 거예요? 지금 늦었는데.”
─아니 그, 할 말도 있고 해서.
“그, 그것보다 왜 3시간 동안이나 문자 씹었어요? 9시에 보냈는데 지금 12시잖아요.”
─미안. 일이 좀 겹쳐서.
세진으로서는 말 못할 사정이었다. 김유린과의 만남이 9시에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인간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다해 몬스터로 변해버려 답장을 할 길이 없었으니.
“무슨 일요.”
─아. 김유린 기사님이랑 얘기 좀 하고···
“예에?! 유린 기사님이랑은 왜 만났어요? 왜, 뭐 때문에요?!”
─별 건 아니고. 칠흑기사단이랑 관련된 얘기했지. 아탄이, 오크의 무기 등등.
“···.”
그 말에 유세정이 탐탁치 않은 기색으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단 둘이서 만났어요? 라는 말이 입 속에서 맴돌았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물어보면 괜히 집착하는 것처럼 비춰질 까봐. 절대 집착 아니고, 그냥 부러운 것 뿐인데.
···진짜 그것 뿐인데.
─그래서, 만날 수 있어?
“······만나요 뭐. 근데 불침번이라 지금은 안돼요. 내일.. 아니 12시 지났으니까 오늘. 오늘 아침 7시에 만나요. 불침번 끝나자마자 단체 사옥으로 갈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자마자 전화를 툭 끊었다.
"어디 한번 당해봐라. 기분이 어떤 지."
* * *
“어, 빨리 왔네?”
이른 오전. 김세진이 단체 사옥에 도착해 단체장실의 문을 열자, 의자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있는 유세정의 모습이 보였다.
“···와써요?”
끄응- 세진의 등장에, 그녀는 크게 기지개를 켜며 잠기운을 쫓아냈다.
“응.”
그는 피식 웃고는 그녀의 바로 앞자리에 앉았다. 부스스한 머리와 살짝 충혈된 두눈. 불침번의 고됨이 여실히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잠깐만요오···.”
그녀는 파우치를 뒤져 손거울을 꺼내더니, 순간 깜짝 놀라서는 얼굴을 가리며 자리에서 퍼뜩 일어났다.
“아. 나 샤워.. 아니 세수 좀 하고 올 게요. 꼴이 말이 아니네.”
“다녀와.”
그는 너그러이 배려해주었다. 그녀가 앞으로 들을 이야기는··· 조금 많이 충격적일 테니까, 사전준비를 해야할 필요가 있다.
정확히 10분 뒤. 유세정은 얼굴이 촉촉해진 상태로 돌아와 그의 앞에 앉았다.
“···할 얘기가 뭔데요.”
그리곤 짐짓 빈정이며 기분이며 모조리 다 상한 척, 팔짱을 낀 채 차가운 목소리로 묻는다.
세진은 설핏 미소를 지으며, 검이 메어있는 그녀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줘봐.”
“네? 왜, 왜요. 뭐 하려구요. 설마 때, 때리려고요?”
“···아니. 내가 미쳤냐. 그냥 보기만 할 게. 한번 줘봐.”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지금의 세정으로서는 거절하기 힘든 마력이 담겨져 있었다. 그녀는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검을 뽑아 그에게 건넸다.
“이거, 내가 만든 무기야.”
그러나 그의 다음 말은 다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 아, 뭐··· 저희랑 같은 단체원이 만드셨죠.”
“아니 그게 아니라··· 큼. 일단 거기, 포션 주머니에 들어있는 것도 줘봐.”
이번에 김세진은 그녀의 허벅지에 매달린 포션주머니를 가리켰다. 그녀는 고블린연금술사의 도움으로 반신불수를 치유한 이후로, 항상 고블린 포션만을 사용해왔다고 들었다. 이른바 고블린의 고정수요층, 다른 말로 하자면 열광적인 팬.
“···?”
유세정은 미간을 좁힐 정도로 의아했지만, 그래도 군말없이 포션 하나를 건네 주었다. 그는 그 포션을 움켜쥐더니, 방금전과 비슷한 말을 했다.
“이거, 내가 만든 포션이야.”
“...오빠. 아까부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제가 지금 장난이라도 하고싶어 하는 것처럼 보여요?”
그 뚱딴지 같은 말에 그녀는 결국 화를 낼 수 밖에 없었다. 진지한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기껏 와봤더니, 무슨 농담따먹기를···
그러나 김세진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태연히 다음 말을 이을 뿐이었다.
“장난이라니. 내가 너한테 숨기는게 너무 많다며? 그래서 내 가장 큰 비밀을 알려주는거야. 이거 다른 사람한테 절대 말하면 안 돼.”
“예? 뭐요? 이게 뭐가 비밀인데요. 그냥 말도 안되는 소리···.”
“말 했잖아. 이 무기를 만든 오크 대장장이, 이 포션을 만든 고블린 연금술사. 그게 다 나라고.”
“······.”
유세정이 얼굴 전체를 찌푸렸다. 도저히 믿지 못 할,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헌데 이 남자는 도대체 왜 이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진짜예요?”
“응.”
“···거짓말.”
“푸흡.”
결국 김세진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에 유세정이 그럴 줄 알았다며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순간 입술이 굳어버렸다.
“친애하는 유세정 님에게. 제가 만든 무기는 브로드소드(broadsword)로, 무기가 자체적으로 성장하는 마법아닌 마법이·········. 유세정 기사님의 열렬한 팬으로서 언제나 응원하겠습니다.”
“···어어?”
그가 한 말은, 오크 대장장이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에 적혀져 있던 그대로였다.
“맞나? 쓴 지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일단 기억나는 것만 대강 말했는데.”
“···예? 아니. 이게···.”
“이거, 원래부터 너 주려고 만든 무기야. 네가 주로 쓰던 무기가 브로드소드였잖아. 내가 사냥하면서 네가 쓰는 검의 종류가 정확히 뭐냐고 물어 보기까지 했는데, 기억 안나?”
순간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도저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왠지 모를 아귀가 맞아 떨어졌다.
단지 우연이라 치부했었지만, 그때 들었던 오크 대장장이의 목소리는 확실히···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와 너무나도 비슷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편지에 적힌 내용, 오크 대장장이 또한 되와 돼를 헷갈려 했었다.
그녀는 크게 벌려진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웃고있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