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작은 발자국(2)
김유린과의 식사 당일, 김세진은 패션잡지까지 뒤져가며 옷차림에 최선을 다했다. 최선이라 해도 그냥 거기에 있는 그대로를 입었을 뿐이지만···
‘..괜찮네?’
이상하게도 생각보다 괜찮았다. 이건 무조건적인 자기미화나 나르시즘이 아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인간 김세진의 키가 2cm나 더 자라 183cm이 되었고, 골격도 전체적으로 넓어져 대충 걸쳐도 옷거리가 사는 체격이 되었기에.
‘근데 이상하네 진짜.’
그는 왠지 날카로워진 것 같은 턱선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가벼운 의문을 품었다. 정말 희미하게나마 얼굴까지 변한 듯한 기분이다.
‘..왠지 늑대로 인간화했을 때랑 닮아가는···’
-우웅
그러나 책상 위에서 핸드폰의 알림이 울렸기에, 그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전 곧 있으면 도착합니다. 김세진 씨께서는 어디이신가요?]
김유린의 지극히 사무적인 문자였다.
대충 답장을 적어넣은 세진은 핸드폰을 품에 넣고서 집 밖으로 나갔다.
*
먼저 도착한 김유린은 레스토랑 내부에서 세진을 기다렸다. 아무거나 좋으니 먼저 주문을 해 놓으라는 그의 문자에 따라 일단 주문을 넣자, 때마침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김세진인가? 싶어서 들어보니 3팀 팀장 채영호 수석기사였다. (수석기사는 상급기사에서 나뉘는 직책 중 하나로, 상급의 머리격이다.)
“···아 씨.”
그 이름 석자가 적힌 액정을 보자마자 순간 미간이 팍 좁혀졌다.
채영호.
직책은 고위기사인 자신이 더욱 높지만, 그 경력이 무려 25년이나 되는 탓에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인물.
거기에 이 작자는 자신의 경력을 십분 활용한 정치질을 하기에 정말 상대하기 껄그러운 인간 중 하나다. 같은 기사단 소속이라지만 정말 싫은 사람.
“여보세요.”
그냥 무시할까 고민도 했지만, 그냥 받았다. 어차피 안 받으면 직접 찾아올 거. 괜히 얼굴을 보게 되는 불상사보다 통화로 끝내는게 훨씬 낫다.
-어. 유린아. 들었다. 김세진 단체장을 만나러 간다면서?
첫마디부터 한숨이 팍 흘러 나왔다.
등급은 분명 이쪽이 높음에도 호칭이 언제나 저렇다. 유린아, 김유린이 등등···
거기에 기분 나쁜 태를 보이면 ‘내가 13살때부터 너를 알아왔는데······’ 의 무한반복. 알아오긴 무슨. 견제만 주구장창 했으면서.. 그래도 자신의 아버지와도 동기라 뭐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만나는 중입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그저 나이가 벼슬이지, 한탄하며 체념할 뿐이었다.
-통화가 가능한걸 보면 아직 미팅 중은 아니지 않느냐. 근데 김세진이와 약속이 잡혔으면 좀 먼저 얘기를 해주지 그랬냐? 우리 팀 애들 요즘 장비상황 심각한 거 알면서. 영진이는 이주전에 산 무기가 부러졌단다.
“..영진 기사는 중상급기사 딱지 단 지 2년도 안 됐잖습니까. 원래 그때는 그게 일상이에요.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허어.. 너는 그게 문제다 유린아. 우리가 이렇게 기다림을 당연하게 생각하니까··· 크흠. 일단 거기가 어디냐? 나도 한번 가보는게 좋을 성 싶다. 아무렴 우두머리격이 두명이나 오면 그 김세진이도 좀 더 기뻐하지 않겠냐. 그런 될성부른 떡잎은 처음부터 관리해줘야 돼.
결국 의도는 이쪽이었다.
물론 상급기사까지 될 정도로 소싯적에는 뛰어났다하다만, 별 다른 특성이 없어 노화로 인해 본신의 실력이 떨어진 이후로는 이렇듯 연명은 인맥을 통해서······.
그러나 그런만큼 채영호의 인맥은 어마어마하다. 칠흑기사단 내에서 이따금씩 불화를 일으킨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내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채영호라는 사람의 인맥을 설명하는 문장은 ‘트릴로지의 창단멤버’, 이걸로 종결.
-게다가 김세진이는 고블린 연금술사와도 연이 깊다면서? 그러면 너 혼자로는 안된다. 근데 유린아? 거기가 어디냐니까? 왜 답이 없는게냐?
“·········아 그러니까 여기가 어디냐면요.”
때마침 레스토랑의 문에서 찰랑- 하는 종소리가 울렸다. 유린의 눈이 그쪽을 향해 번뜩였다.
김세진이었다.
“어 오셨다! 잠시만요!”
-왔다고? 아니 잠······
그 즉시 유린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김세진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저 남자는 꽤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일단 체격자체가 워낙 좋으니.
“기다리셨어요?”
그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앞자리에 앉자, 예의 향기가 쏴아아 몰려왔다.
“아니요. 저도 방금 왔습니다.”
그녀 또한 미소로 화답했다.
*
어색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이야깃거리는 충분히 많았다. 어떻게 레비아탄의 소환진을 발견했으냐, 대장장이가 단체 더 몬스터에 소속된 게 확실한 사실이냐,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고블린 연금술사는 칠흑기사단을 싫어하느냐 등등.
김세진은 모두 솔직하게 말해주었고, 덕분에 식사시간은 30분에 불과했지만 실속은 확실했다.
“단체 가입은···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그렇게 화기애애한 식사를 마친 후. 레스토랑 밖에서 유린은 어렵사리 거절을 전했다.
“···그래요? 아쉽지만.. 뭐 어쩔 수 없죠. 그리고.. 이거. 받으세요.”
그러나 세진은 기분 나쁜 내색 하나 없이 겸허히 받아들였다.
아니, 오히려 그녀에게 선물을 건넸다.
오직 그녀를 위해 만든 선물이었다. 오크의 단조는 금속이 아닌 다른 원자재에도 활용이 가능했기에.
“이건 뭐예요?”
유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어느새 자신의 품에 안겨진 박스를 바라보았다.
“선물이요. 칠흑기사단과 저희의 돈독한 관계를 위하여.”
“예? 아··· 근데 고맙긴 한데··· 저는 뭐 준비해온 게 없는데.”
그녀는 혹시라도 뭔가 있을까 싶어 주머니를 뒤적였지만 있을 턱이 없었다.
“괜찮아요. 싼 거니까. 아 그리고··· 이것도.”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그는 이내 품속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이건 또 무슨···”
평범하지 않은 코팅까지 되어있는 이 종이는 오직 ‘마나’로만 글씨를 쓸 수 있게 되어있었다. 아주 특별한 계약서에만 사용되는 보안방식이다.
“···무기 신청서?”
유린은 종이에 적힌 글자를 멍하니 읊조리다가, 순간 퍼뜩 놀란 표정이 되어 고개를 치켜세웠다.
“네. 유린 씨가 직접 쓰시거나, 마음에 드는 부하 분한테 주세요. 그냥 전투 스타일이 어떻게 되는지, 어떤 무기를 원하는지 적어놓으시고, 작성 완료되면 저한테 보내주세요. 그러면 제가 대장장이에게 전해 줄게요.”
“어··· 괜찮아요? 그···”
세진 씨는 대장장이가 아니잖아요. 그러나 유린은 뒷말을 삼키고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괜찮아요. 대장장이가 유린 씨 팬이라서, 하나 정도는 이렇게 만들어 줄 수 있대요.”
“와··· 네. 감사합니다. 아, 그 분께도 정말 감사드린다고 전해주세요."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서, 유린은 ‘무기 신청서’를 아주 소중히 코트의 품에 집어넣었다.
*
혜린 「그거 저주세요!」
승호 「아니 저요. 저 무기 지금 부서질락말락인데.」
혜린 「너는 뭔데 끼어들어!」
집으로 돌아온 김유린은 가장 먼저 1팀의 단체 톡방에 세진이 건네 준 ‘무기 신청서’를 직접 찍어서 올렸고, 그 즉시 이런 난리통이 터졌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약 999+개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을 정도로.
유린은 흐뭇한 얼굴로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가다가, 별안간 근엄한 표정으로 문자를 하나 갈겼다.
「앞으로 일주일 간. 내부 랭킹전 순위가 최고로 높은 사람한테 이거 준다.」
반응은 빨랐다. 평소에는 대답하라고 별 발광을 해도 미적지근하던 열 한명의 년놈들이, 0.1초 단위로 달려들어왔다.
“어휴···”
안 될 놈들이야- 덧붙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유린의 입가에는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아. 맞다.”
세진이 준 박스선물이 그제서야 떠올랐다. 이 종이선물의 임팩트가 너무 컸던 탓에···.
“장비인가?”
유하린은 적당한 크기의 상자를 품에 안고 소파 위로 올랐다.
그리곤 별 생각 없이, 뚜껑을 열었다.
“···.”
유린의 머릿속이 잠시나마 멍해졌다.
상자 안에는 장비가 아니라, 무기가 아니라, 귀여운 하프물범 인형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자세히 보면 물범이 아니다. 비슷하긴 한데··· 털이 아니라 비늘이다.
어쨌든 너무 귀여웠다. 그래서 유린은 저도 모르게 그 인형을 껴안고 말았다.
그렇게 한참동안 인형을 품에 안고 나서야, 그녀는 상자 속의 카드를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피로가 풀리는 마법아닌 마법이 걸려있습니다. 잠잘 때마다 곁에 두시면 좋을 거예요.
유린으로서는 평생 처음 받은 인형선물이었다.
*
한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변화는 꽤 있었다.
먼저 김세진이 몬스터 상점의 공무원들의 아주 과장된 축복을 받으며 중상급 사냥꾼이 되었고, 단체등급은 D-에서 D등급으로 승급했으며, 오크는 약속대로 두 개의 무기를 더 출시했다.
하나는 상품-중급의 ‘츠바이한더’. 그때 찾아왔던 주지혁 기사의 몫이었고, 전사를 표방하는 주지혁 기사의 전투스타일에 최대한 맞게 ‘견고함’, ‘파쇄’, ‘가벼움’, ‘피로회복’이라는, 최전선에 있으면 더욱 빛을 발하는 네 가지 성질을 부가했다.
무기를 직접 받고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듯 울먹이는 주지혁의 모습은 꽤나 인상적인 동시에 보기 힘들었다.
다른 하나는 상품-상급의 장도(長刀). 이것은 김유린의 부하기사라는 ‘이혜린’이라는, 근래 CF도 하나 찍은 유명 중상급기사의 손에 들어갔다.
이 무기에 부가된 성질은 C등급 ‘굴절’. 이제 이 기사가 휘두르는 장검은 주인의 의지에 따라 휘어져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혜린 기사 또한 무기를 받고 아주 만족했는지, 바로 다음 날 무려 3장에 이르는 친필편지가 배달되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자신의 셀카 사진과 친필 싸인까지, 전화번호까지 동봉한 채.
‘곧 장인으로 승급할지도 모르겠네.’
그리고 지금, 세진은 인터넷의 반응을 보며 허허- 웃었다.
이혜린과 주지혁이 SNS에 올린 사진은 큰 화제가 되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의 SNS로도 퍼져가고 있었다.
“···근데 이건 뭐야?”
아주 오랜만에 인터넷 기사의 댓글을 읽어나가는 중에, 꽤 눈에 띄는게 하나 있었다.
─나 아는 형이 칠흑기사단 기산데, 김세진이랑 밥 먹으면 무조건 무기 준다는데? 무기 신청서라고 종이 하나 주는데, 거기에 쓰면 원하는 대로 무기 만들어 준대. 나 사진 찍힌 것도 봤음. [추천 539 반대 113]
└내 아는 형이 라이칸인데 니 찾아서 죽인대. 뱀파이어마냥 갈기갈기 찢어 죽인다는데, 어쩔거냐?
└;; 내가 현직 기사인데 그런 소문 진짜로 있긴 하다. 위에 놈은 그냥 정신병자같네.
└ㅇㅇ 같이 밥 먹으면 무기신청서 준다. 그거 사실임. 근데 밥같이 먹기가 어렵지
‘뭔 말도 안되는 소리를 이렇게 사실마냥 써재껴놨냐.’
그래도 어느정도는 귀여웠기에, 세진은 피식 웃으며 다음 기사로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