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발전아닌 발전 (1)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나서 일주일 동안, 단체 가입문의가 빗발쳤다.
몬스터 필드 근처에만 가도 사람들이 달라붙었다.
헌데 그 면면들이 대단했다. 모두 저마다의 분야에서 한 가닥은 하는 중급기사, 중상급기사, B등급 마법사 등등···. 거절을 놓으면 개중 연식이 높으신 몇몇 분들은 감히 네가? 라는 시선으로 노려보았으나, 그게 충분히 이해가 될 정도로 모두 어느정도의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 뿐이었다.
허나 김세진은 모두 거절했다. 굳이 의도가 훤히 보이는 사람들을 단체에 들여보내, 물이 흐려지는게 싫었기 때문이다.
이는 유세정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경호원들에 의해 사전차단 되었으니 세진보다 불편할 일은 없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별안간 ‘투자문의’도 많이 들어왔다. 여러 기사단은 물론 마탑과 기업, 심지어 정치인들 까지.
개중 몇몇은 돈을 받지 않으면 불이익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협박까지 보내왔다.
물론 김세진은 모두 거절했다.
근데 한가지. 단호하게 거절하기에는 본능이 가로막는 제안이 하나 있었다.
바로 TV출현.
그때 ‘기사의 조건’이라는, 기사들이 사냥하는 모습을 예능으로 담아 대박을 터트린 프로를 담당했던 PD의 제안이었다. 그 프로가 대박나기도 했고,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와 함께 보던 TV에 막연한 동경이 있던 그로서는 냉정하게 잘라낼 수 없었다. 그래서 세진은 고민을 한번 해보겠다고 연락을 보내 놓았다.
그리고 지금. 김유린과 함께 식사를 하기로 약속한 날, 해가 슬슬 저물어가는 늦은 오후. 김세진은 집 앞으로 자신을 데리러 온다 말했던 유세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유린을 구해줬던 고블린이었을 때의 기억이 아른거림에 따라, 세진은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그렇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기다리고 있던 와중에, 저 멀리서 번쩍거리는 검은색 리무진이 슬슬 다가왔다.
‘..저게 맞나?’
세진은 살짝 고민했다. 파티에 참석하는 거라면 몰라도, 굳이 저녁 한 끼를 위해 저렇게 기다란 리무진을 끌고 올 필요는 없지 않은가. 저거면 오히려 부담스러울 텐데···.
그러나 리무진은 세진의 앞에 다가와서 멈춰섰다.
“···.”
세진이 멍하니 그 차를 바라보고만 하고 있자, 뒷좌석의 창문이 스르르 내려가더니 유세정이 얼굴이 빼꼼 삐져나왔다.
“오빠, 뭐해요 안 타고?”
“..어. 그래.”
떨떠름히 대답한 세진은 그제서야 뒷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내부는 더 장관이었다. 넓이가 예전에 살던 원룸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느낌. 시트도 대단히 폭신폭신해, 구름위에 엉덩이를 가져다 놓은 듯했다.
“···대단하네. 이게 그 ‘마법설계’인가?”
세진이 시트를 꾹꾹 눌러보며 말했다.
“네. 아마도 그럴거예요.”
그녀는 태연히 대답하며 등받이에 몸을 뉘었다. 그러나 세진은 감히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약간 불편한 새우처럼 몸을 비틀었다.
“근데 그건 뭐야?”
그는 모르는 척, 세정의 두 무릎 위에 고이 놓인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는 아주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상자를 열어보였다.
“’성장하는 브로드 소드’예요. 이제부터 제 주력무기가 될 검이죠. 오크 대장장이님이 편지까지 동봉해주셨어요.”
“그래?”
그는 유세정을 위해 편지까지 썼다. 부디 잘 다루어 달라고. 혹시라도 자신의 실력이 향상되면 사후처리까지 잘 해주겠다고.
그녀는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얼굴이었기에, 세진도 만족하기로 했다.
*
약속장소는 칠흑기사단 근처의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세진은 초대장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는 살짝, 아니 많이 부담스러웠다. 이런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자신과는 도저히 맞지 않다.
몇 백만원은 간단히 호가할 것 같은 정장을 입은 남자와,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 개중에는 유명한 정치인과 기사, 얼굴만 보면 누군지 딱 알 수 있는 연예인까지 있었다.
정수리부터 발 끝까지, 옷차림부터 하는 행동까지. 자신과는 완벽히 이질적인 공간.
김세진은 기가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유세정 님과 김세진 님. 확인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웨이터의 반듯한 안내를 받아 널찍한 식탁 앞에 착석했다.
“오빠, 왜 그렇게 고개를 두리번두리번 거리는 거예요?”
메뉴판을 살펴보던 유세정이 의아하다는 듯 물어왔다.
“···우릴 쳐다 보잖아.”
가뜩이나 불편한데, 주변의 유명인들이 이쪽을 주시하기까지 한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자신이 입은 체크무늬 남방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으음, 그러네요? 아마 단체 때문일걸요? 오크 대장장이 님까지 언급을 한 단체니까··· 충분히 그럴 만하죠.”
덧붙여. 유세정은 김세진이 브로드소드에 동봉한 편지를 읽고 완전히 감동받은 듯, 오크 대장장이의 열성팬이 되어버렸다. 그 대장장이가 바로 자기 앞에 있음에도 알아보지 못하는 건 조금 애처로울 따름이지만.
“근데, 정말 대장장이님이 우리 단체에 가입하신대요?”
게다가 어느새 단체의 호칭이 아주 친근한, ‘우리 단체’로 바뀌어 있었다. 세진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모르지. 근데 연락은 닿을 수 있을 것 같아.”
그가 천연덕스레 대답했다. 자기자신과 연락은 닿을 수 있다··· 어쩌면 당연한 말이다. 너무 당연해서 문제지만.
“와··· 저도, 저도 한번 연락해볼 수 있을까요?”
“그건 나도 잘···. 근데, 너는 마음만 먹으면 정체를 밝혀낼 수 있지 않아?”
세진이 의문스럽다는 듯 물었다.
새벽의 정보력이면 고블린 연금술사는 물론 오크 대장장이의 정체까지 밝혀낼 수 있다. 몇가지 단서는 필연적으로 남기 마련이니까.
오히려 새벽은 그들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 보다, ‘그 세 인물이 모두 하나의 동일인물-김세진이다’, 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더욱 어려워할 터.
“그렇긴 한데, 그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굳이 익명으로 있고 싶어하는 대장장이님의 정체를 밝혀서 관계가 악화되면, 저희만 손해니까.”
이건 명답이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갑자기. 유세정이 무언가가 번쩍 생각났다는 듯, 눈을 부릅 뜨고는 상반신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아 맞다! 대장장이님과 연락이 닿으면, 이건 꼭 말해주세요. 저희가 일부러 대장장이님 신상 보호해주고 있다고요. 다른 기업이나 기사단은 저희처럼 생각 안하는 곳도 있어서.”
“···어. 그래. 알겠어.”
그녀는 용건이 끝나니 다시 의자 등받이에 천천히 기댔다.
세진은 그런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왠지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처음과는 다른 느낌.
나이 답지않게 성숙한 면은 분명 있지만, 그래도 또래 소녀들처럼 감정이 풍부하고 명랑한 면도 분명히 존재한다··· 는 건 꽤나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래봤자 미성년자지만.
“···아! 오셨다.”
유세정이 그의 등 뒤를 가리키며 나지막하게 소리를 질렀다. 김세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코트형 갑옷을 걸치고 있는 기사, 김유린이 있었다.
그녀도 세진과 비슷한 태도, 살짝 당황을 한 기색으로 집중되는 시선을 헤치며 이쪽으로 도착했다.
“아, 안녕하세요!”
유세정이 먼저 벌떡 일어났다.
“네. 안녕하세요. 아 저.. 제가 일을 마치고 바로 온거라,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어요.”
유린은 구하지 않아도 될 양해를 구하며, 세정의 옆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김세진입니다.”
“네, 얘기 많이 들었어요. 반가워요.”
김세진의 가벼운 인사를 미소로 화답한 김유린은 메뉴판을 훑어보다가, 순간 뜨억한 표정이 되었다.
“어······ 많이 비싸네요?”
두 사람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김유린은 국립기사단의 고위기사, 적어도 연 10억 이상의 돈을 버는···.
“아 제가 요즘 이사도 했고, 뭣보다 장비를 사는데 돈을 써가지고···.”
“괜찮아요! 이 레스토랑이 저희 할아버지 소유라서, 다 공짜예요.”
유세정이 제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말했고, 김유린은 그제서야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식사가 나올 때 까지, 살짝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제는 다양했다. 고블린 연금술사, 오크 대장장이, 요 근래 중국과 미국에서 연이어 균열이 크게 벌어진 대사건, 앞으로의 미래,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 맞다. 그 ‘더 몬스터’라는 단체에 정말 두 명의 괴물이 모두 가입하나요?”
“..괴물이요?”
“네. 요즘은 괴물이라고 부르더라고요. 두 분 다 각자의 분야에서 압도적인 재능을 뽐내고 계시니까, 경외가 담긴 표현이겠죠.”
그녀의 진중한 목소리가, 이것이 처음부터 얘기를 나누고 싶었던 주제임을 알려주었다.
“그건··· 모르겠어요. 고블린이 자기가 오크랑 친하다고는 말했는데···.”
살짝 애매하게 넘긴 세진은 곧바로 미소를 지으며, 능글맞게 말했다.
“관심이 많으신가봐요? 그래서 그런데, 혹시 저희 단체에 가입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그럼 두 개의 연줄이 동시에 닿을 수도 있을텐데.”
“와.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
별안간 유세정이 큰 소리로 거들었다.
···너무 큰소리였다. 주변의 이목이 집중 될 정도로.
‘쟤 왜저래?’
그가 살짝 당황해하며 세정을 바라봤다.
과연,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얼굴은 벌개지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잔뜩 고여있어,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양새다.
한숨을 푹 내쉰 그는 품에서 손수건을 하나 꺼내 그녀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아. 고마워요···.”
그에 겨우겨우 진정한 세정이 심호흡을 하며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유린은 오묘한 포정으로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영광이네요. 요즘 가장 핫한 단체가 가입권유를 먼저 주시니··· 근데 제가 조금 상황이 그래서. 그래도 생각은 한번 해 볼 게요.”
물론 가입하고 싶었으나, 유린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국립기사단의 ‘단장’은 원칙적으로 단체소속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자신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사단의 단장이 될 몸.
물론 아직 그때까지는 3년도 더 남았으나, 3년 시한부로 가입하는 것은 오히려 단체원에게 폐가 될 것 같았다.
“네. 한번 긍정적으로 생각을······.”
그 때.
별안간 바닥이 부르르- 진동했다.
“..뭐야.”
세진은 지진인가? 싶었으나, 곧 레스토랑의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그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한강의 조망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이 레스토랑에서는 볼 수 있었다. 강의 중앙에서 천천히 솟아오르려는 하나의 거대한 형체를.
“···!”
김유린이 경악한 표정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레비아탄.
한강을 비좁아 할 정도로 거대한 해수몬스터. 뱀의 몸체에, 용의 머리통을 닮아 ‘바다에 사는 이무기’라도 불리는 저것은, 한강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몬스터다.
말 그대로 바다, 그 중에서도 심해에 사는 몬스터.
그런 몬스터 지금 이 곳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오직 두 가지.
‘소환, 혹은 균열.’
그러나 후자는 다수의 몬스터를 동반하니 전자의 가능성이 높다.
허나 지금 그딴 가능성을 논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죄송합니다. 먼저 가볼게요! 배상은 하겠습니다!”
김유린은 온 몸에 마나강기를 두른 채, 유리창을 향해 빛살처럼 쇄도했다.
와장창- 깨져나간 유리를 뒤로하고, 그녀는 허공을 구르며 한강으로 활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