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동화 (3)
김세진은 직사각형 모양의 상자안에, 유세정에게 줄 입단감사 선물을 정성스레 포장했다. 안에 든 내용물은 고블린 연금술사가 만든 포션과 명함, 그리고 감사의 내용이 몇 줄 적힌 편지.
우우웅-
그렇게 괜히 고급스럽게 변해가는 상자를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핸드폰의 알람이 울렸다. 때마침 유세정이었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저예요 오빠. 근데, 그거 사실이에요?”
참고로 어느 순간부터 호칭이 살짝 바뀌게 되었다. 세진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러한 호칭변화는 친밀함이 돈독해졌다는 방증이기에.
“어떤거? 혹시 연금술사?”
고블린 연금술사가 단체에 입단하게 된 것이 알려진 날은 이틀 전, ‘고블린의 정화’가 발매되면서였다. 그러나 유세정은 새벽의 핏줄. 그런 중요한 사실을 지금 에서야 알았을 리······
-네. 그거 진짜예요? 말이··· 아니, 어떻게, 아, 그.. 고블린 연금술사님이랑 무슨 사이였어요?”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놀람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건······ 개인사정이라 말은 못해주지. 너도 알잖아? 연금술사들은 그··· 민감한거.”
진실을 말해줄까 살짝 고민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 연금술사가 사실 나야’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상황에 맞지 않았기에, 그저 대충 둘러댈 수 밖에 없었다.
-···네. 그러면 뭐··· 어쩔 수 없지요.
“아, 그리고 지금 입단선물 싸고 있는데, 내일쯤이면 도착할거야.”
-정말요? 고마워요.
“응.”
-아, 근데─
세진은 대충 전화를 끊고서 다시금 상자 포장에 열중했다. 핸드폰에서 무슨 소리가 살짝 새어나온 것 같았는데, 무시하기로 했다. 상자포장은 의외로 재미있었다.
*
대장장이 공모대회의 최종심사는 새벽기사단의 부지 내에 위치한 강연장에서 열리는 것으로 결정이 됐다.
그리고 지금. 약 500여명의 청중심사위원단과 5명의 전문심사위원이 새벽기사단으로 초청된 최종심사 당일. 대기실에는 전문심사위원들이 모여 앉아 출품된 무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에도 오크는 모습을 안 드러냈다지? 쯧쯧··· 몇 번 치켜세워주니 벌써부터 거만해가지곤···”
그 까다로움으로 유명한 한국의 명인 유조형이 약간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모르지 않소이까. 단지 쑥쓰러워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일수도 있지요. 너무 색안경을 끼고 보지는 맙시다.”
또 다른 심사위원, 대장장이 협회장 ‘김태형’이 인자한 목소리로 그런 그를 타일렀다.
“맞아요. 무기에 열중하느라 그랬을 수도 있잖아요. 저는 그 분이 무슨 무기를 만들었을 지 벌써부터 기대되는 걸요?”
이번에는 김유린이었다. 그녀의 눈부신 미소는, 아무리 까칠한 노인이라도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크흠. 그렇다면야···. 허나, 이번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김태산이가 이길 것 같소만. 아주 칼을 갈고 나왔더군. 지 애비한테 도움을 받았나 싶을 정도의 물건이 나왔어.”
“정말요? 오크 씨는요?”
“오크? 자세히는 아니어도 힐끗 한번 보긴 했지. 근데 그게 품질은 좋다만··· 조금 평범해 보인다네. 그때 열화? 머시깽이였던 특별함은 없어. 아무래도 이번에는 김태산이가 이길 것 같아.”
유조형은 기다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연신 김태산의 승리를 점쳤다.
“김태산 대장장이의 무기에는 뭔가 특별한 점이 있나요?”
“고럼. 나도 아주 깜~짝 놀랐다니까. 직접 보면 놀랄테야. 아 맞다, 그리고 김태산이가 자네를 조금 많이 보고싶어 하는 것 같은데. 어찌, 오늘 끝나면 식사라도 같이 하겠는가?”
별안간 유조형이 갑작스런 제안을 해왔다. 이 명인에게 단호한 거절을 내놓을 수 없었던 김유린은 뒷목을 긁적이며 멋쩍은 미소만을 지을 뿐이었다.
“자네도 봤잖아. 아주 괜찮은 남자라니까? 애가 시원시원하고······.”
“리허설 시작하겠습니다~”
때마침 들어온 PD가 그들의 사이를 갈랐고, 유린은 그 즉시 자리에서 퍼뜩 일어났다.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앗! 벌써 시간이! 어서 가시죠!”
“크음.”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어가는 김유린을 두고, 유조형은 아쉽다는 듯 헛기침을 내뱉었다.
“······음?”
김유린이 대기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의외의 인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신 손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살피는 귀여운 소녀. 요즘 기사들 사이에서도 꽤나 유명한 ‘유세정’이었다. 뭐가 그리도 불만스러운 지. 미간을 찌푸린 채 제 얼굴을 살피던 세정은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훽- 하고 돌렸다.
“···앗.”
그리곤 낮은 탄식. 그녀는 재빨리 손거울을 집어넣고서, 천천히 김유린의 앞으로 다가섰다. 안면근육이 경련하고 두 다리가 안쓰러울 정도로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여간 긴장한 모습이 아니었다.
“안··· 앙녕, 아니 안녕.. 안녕하세욧!”
성대가 긴장에 죄어진 탓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세정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지르고야 말았다. 그렇게 순간 주위의 이목이 집중되고, 제 실책을 깨달은 그녀의 안색이 흙빛이 되어갔다.
“아니 아니 그게······.”
“네. 안녕하세요.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김유린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세정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아.”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그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래서 세정은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봤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서 황급히 그 손을 부여잡았다.
“바바바, 반갑습니다! 저, 저.. 저 저는··· 그 유세정이라고 합니다!”
여태껏 나이답지 않게 차분하고 도도했던 모습과는 달랐다. 세정은 그 누구보다 긴장한 채 유린을 대했다. 온 몸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은 크게 박동한다.
마치 꿈결같은 상황.
소녀가 동경했던 여인은 지금 이 자리, 바로 앞에 있었다······.
“얘기 많이 들었어요. 아주 대단해요, 그 어린 나이에 벌써 중하급 기사라니.”
“아, 예예예. 예. 예. 아 저는 김유린 기사님의 유세정, 아니. 팬이라고 합니다. 초등학교, 무지무지 어렸을 적부터 기사님의 팬이었······.”
유세정은 그 이후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했다.
단지 약 5분 뒤에,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청중 심사위원단의 자리로 걸어가는 자신을 발견했을 뿐.
*
길고 길었던 공모대회, 그 끝을 알리는 최종심사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그러나 어쩌면 등수는 1등과 2등의 분간이 아니면 상관이 없었다. 실제로 모든 전문가들과 참가한 대장장이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11명 중 무려 7명의 대장장이가 실력에 한계를 느끼고 지레 기권을 선택하였을 정도니.
“···네. 이자리에 있는 네 개의 물품 중. 단 하나만이 영광의 권좌에 오를 수 있습니다.”
생방송이 시작하자 진행자가 첫 대사를 읊었다.
청중들은 박수를 치고, 총 다섯명의 심사위원들은 엄숙한 태도로 베일에 둘러싸인 물건을 유심히 관찰했다.
“물건을 심사할 심사위원분들입니다. 가장 왼쪽부터 칠흑기사단의 고위기사 김유린······”
진행자가 5명의 전문 심사위원을 간단히 설명하고서, 곧바로 물건의 심사가 시작되었다.
첫번째 물건은 흑단(黑檀)으로 만든 목검. 목검이라는 것에 의아할 순 있으나, 특성상 마나를 무척 많이 머금을 수 있는 흑단이기에, 마나 제련만 잘 되었다면 최소 중품 상급 이상의 등급을 받아낼 수 있을 물건이었다.
“좋아요. 다만, 기사의 역량에만 너무 기대려 하는 것 같아서 조금 아쉽네요.”
이 흑단 목검은 김유린의 심사평으로 정리되었다.
그 다음 물건은 강옥(鋼玉)으로 만든 시미터. 뱀처럼 휘어진 검면과 날 선 검날은 그 예리함을 자랑했다. 저번 대회였으면 우승까지도 노려볼 수 있었던 이 물건은 그러나 ‘좋지만 특색없이 너무 평범하다’는 혹평을 받아야만 했다.
“자. 그리고 이제! ‘김태산’ 대장장이님의 물건입니다.”
드디어 본격적인 시작. 심사위원과 청중들은 살짝 긴장을 했고, 김태산은 터벅터벅 걸어 제 물건 앞에 다가와 섰다.
“설명해주시길 바랍니다.”
진행자의 말에 김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제 물건 위에 드리워져 있던 베일을 걷어낸다.가장 먼저, 그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자태에 청중과 심사위원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이것은 공작석(孔雀石)과 금강석(金剛石)을 배합하여 만든, 바스타드 소드입니다. 이 검에 마나가 스며들 경우, 검면에 마나가 응집되어 푸른 결정이 생겨납니다.”
설명은 간단했으나, 이 검은 직접 사용해볼 때 더욱 빛이 나는 검. 자신만만한 김태산은 검을 들고서 전문 심사위원에게 다가갔다.
“호오··· 과연 명인의 제자다, 이건가?”
“좋구만. 좋아. 흠잡을 데가 없어.”
“정말 좋네요. 혹시 마나를 사용해봐도 되나요?”
심사위원의 찬사를 받는 와중. 고위기사 김유린이 칼자루를 움켜쥐며 물었다. 바라던 바였기에, 태산은 지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음껏.”
김태산이 허락하자, 그녀는 검에 마나를 불어넣어 보았다. 검면을 푸르게 감싸던 검은 정말 그의 말처럼 결정의 형체로 변했다. 원체 아름다웠던 외관은 더욱 환상적으로, 마나결정의 강도는 말이 필요 없을 것이 자명.
이것은 최소 상품(上品)이다.
“···완벽합니다.”
김유린이 멍하니 읊조리자, 김태산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심사위원들도 김유린의 심사평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 중 특히, 대기실에서부터 김태산을 칭찬하던 유조형은 그가 이미 장인의 경지에 등극했다며 극찬을 늘어놓았다.
“네. 이제··· 마지막 물건입니다.”
고조되어가던 긴장이 슬슬 절정에 다다랐을 때. 드디어 마지막, 오크의 차례가 되었다.
“오크 대장장이는 이번 최종심사에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인 사정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오크 대장장이가 참여하지 않았기에, 진행자가 오크의 물건을 담당했다. 그는 청중과 심사위원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베일에 쌓인 단상을 중심에 놓았다.
그리곤, 샤라락-
들춰진 베일, 그 아래에는 ‘아름답다’는 형용이 가장 어울리는 무기가 놓여져 있었다.
칼자루는 푸른색과 붉은색이 조화롭게 덧칠되어있고, 검면에는 ‘오크 대장장이’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아름다운 문양이 마치 공예품처럼 수놓아져 있었다. 순백의 검신은 길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아 베기와 찌르기 모두에 용이했다.
모두 잠시동안 말을 잃었다. 김태산의 물건처럼 화려하지는 않으나, 오히려 아름다움 만큼은 이쪽이 더욱 뛰어났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굳이 애써 표현하지 않으려 해도 모두가 느낄 수 있다는 말처럼, 이것은 은은하지만 그 무엇보다 우아하고 화려한 미(美)였다.
“······좋네요.”
약 2분동안 침묵이 지속되자, 방송사고를 모면하기 위해 김유린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으음. 외관은 좋군. 하지만. 겉보기만 봐서는 특별하지가 않소만. 이런 건 대장장이가 직접 나와서 설명해줘야 하는 것이 아니오? 만약 이 검에 아무 특색이 없다면, 강옥 시미터와 다를바가 없지않소.”
그 다음에는 유조형이었다. 그는 애써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 오크 대장장이님이 말하시길, 직접 나오지는 못하지만 전화연결은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대장장이님? 혹시 보고 계시다면 자막으로 나가는 전화번호로 연락을 주십시오.”
약 20초간의 기다림 끝에, PD가 사인을 보내왔다. 전화가 연결됐다는 신호였다.
-여보세요.
“오크 대장장이님?”
-예. 맞습니다.
목소리는 합격점. 아주 듣기 좋은 톤의 안정적인 중저음이다.
“목소리가 참 좋으시군요.”
-하하하··· 감사드립니다.
나긋한 웃음소리도 좋았다. 진행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장장이에게 물품의 설명을 부탁했다.
-이 물건은··· 김태산 장인이 만든 것처럼 특별히 보여지는 효과는 없습니다.
“커흠.”
단지 한마디가 나왔을 뿐인데, 심사위원 중 한명이 못마땅하다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굳이 누군지 확인치 않아도 유조형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 무기에는 제 바람이 하나 담겨있습니다.
“그 바람이 무엇이죠?”
진행자가 기대하며 되물었다. 스토리가 있는 무기는 언제나 옳기에.
-이 무기의 주인과, 무기가 함께 성장하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무기는 주인이 성장하면 언제나 버려지기 마련입니다. 버리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그 무기가 주인의 발목을 잡는 날도 올 테니, 아마 무기도 버려지는 것을 원하겠지요.
오크 대장장이는 천천히 읊조렸다. 왠지 모르게 듣기 좋은 그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장내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서서히 빠져들었다.
“그렇다면? 그 바람은 이뤄졌습니까?”
-네. 다행히도, 이 무기는 주인과 함께 성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순간 장내에 소란이 일었다.
성장하는 무기? 그런 무기는 결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그게 증명이 가능한가요?!”
이 외침은 김태산이었다. 태산은 오크의 무기를 보고서도 내심 자신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기에, 꽤 다급했다.
“무기가 성장한다니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
-하하.. 그곳에 계신 기사 중 한 분이 한번 마나를 불어넣어 보시지요. 검은 그 마나에 맞춰 공명을 할 것입니다.
오크대장장이는 차분하게 대응했다. 그러자 김유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 칼자루를 쥐었다. 김태산이 그 모습을 잔뜩 긴장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마나를 불어넣으면 되나요?”
-네. 느낌이 오실겁니다.
유린이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마나는 아주 깔끔하게 검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대장장이가 말한 ‘공명’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검이 제 마나에 맞춰 평온하게 진동했다. 마치 노래라도 부르는 듯.
-너무 오래는 하시면 안됩니다. 주인으로 인식해버리거든요.
그 말에 유린이 퍼뜩 마나를 갈무리했다.
“···대단합니다.”
김유린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모든 광경을 TV로 지켜보던 김세진은 소리 죽여 웃었다.
그가 무기에 부여한 성질은 C등급 [성장흡수]와 [주인인식].
‘트레이노스의 뿔’ 덕분에 두 성질이 합쳐져, 주인을 완벽히 알아보고 주인과 함께 성장하는 스토리가 있는 검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TV화면에서는 열망이 가득한 눈초리로 무기를 바라보는 유세정의 모습이 담겼다.
카메라감독도 이 검의 주인이 될 기사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