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태동 (4)
단체(團體).
단체제도의 처음은 그저 몬스터 사냥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일종의 ‘파티’개념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그 목표와 뜻, 범위가 점차 넓어졌다. 기사나 사냥꾼만이 가입하는 ‘사냥파티’에서, 서로 간의 교류를 통해 더 나은 내일을 추구하는 다목적 모임으로.
그리하여 요즈음은 기사와 사냥꾼을 넘어, 마법사, 대장장이, 심지어 연금술사(물론 소수지만)와 일반인까지. 거의 절반에 가까운 국민이 하나에서 둘 이상의 단체에 가입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만큼 단체의 숫자도 만만치 않게 늘어나,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약 30만에 달하는 단체가 '공식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수 많은 단체 중에서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단체는 아마도 ‘트릴로지’.
현 고려기사단장 ‘김약산’이 단체장, 일명 리더로 있는 단체다.
현존 유일 S등급 단체인(놀랍게도, 단체에도 등급제가 적용된다. 단체등급이 올라갈수록 가입 가능 인원 수가 증가한다.) 이 트릴로지에는 총 273명의 인원이 가입되어 있는데, 그 면면이 아주 다양하고 화려하다.
최소 중상급 이상의 기사와 사냥꾼, 마법사는 물론 정재계의 거물, 유명 셀럽, 심지어 대장장이와 연금술사까지. 이 트릴로지는 단체 내의 커뮤니케이션만으로도 대한민국을 쥐락펴락 할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최근엔 이 트릴로지같은 거물급 단체가 꽤 등장함에 따라, A~B등급 이상의 단체는 구분을 위해 ‘길드’ 혹은 ‘클랜’이라 부르자는 말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실제로 몇몇 언론에서는 이미 그런 표현을 시범삼아 사용하기도 했고.
“축하드립니다~ 10월 8일, 오늘이 ‘더 몬스터’의 탄생일이 되겠군요~!”
“아······ 예. 감사드립니다.”
단체가 결성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찾아온 몬스터 상점에서, 세진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의 품에는 ‘단체운영차트’와 ‘리더 명함’이 한아름 들려져 있었다.
“아주, 엄청 대단하십니다! 시작부터 D-등급이라니!”
“전설의 시작을 보는 것 같아요~!”
김세진은 공무원들의 아부가 부담스러웠다. 아니, 단체의 중요성을 모르는 그는 이들이 왜 갑자기 이런 난리 부르스를 떠는지 이해도 되지 않았다. 사실 당연했다. 평생 일에 치여 오직 혼자서만 바쁘게 살아온 그가, 왜 다수의 상징인 단체에 관심을 기울였겠는가.
“···D-등급부터 시작하는 게 대단한건가요?”
“예? 아, 네 그럼요! 보통은 F부터, 아무리 잘 쳐줘도 E부터 시작해요!”
단체의 등급은 실적을 척도삼아 성장한다. 그리고 이 ‘실적’에는 기사나 사냥꾼, 마법사의 몬스터 사냥 성과 뿐만 아니라 ‘사회 기여도’또한 포함된다.
여기서 사회 기여도라는 지수를 측정하는 주체는 ‘나라의 어딘가’로 불명확하지만, 여태 별 말이 안 나온 걸로 미루어 보아선 꽤나 투명하게 측정을 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등급이 높으면 좋나요?”
“···네?”
단체의 소속원들은 같은 단체원에게 동질감을 느끼긴 하지만, 타 단체에 배타의식을 내비치진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말 그대로 단체, 가볍게 말하면 동아리이기 때문. 원활한 구분을 위해 등급제도가 적용되기는 하나, 그로 인해 얻는 이익은 단체 내의 ‘인맥’을 제외하고는 없다.
그러니까, 그냥 인맥의 창구라고 보면 된다.
“조, 좋죠! 거기 다 두루두루 친해지면.. 아주 좋을텐데. 부럽습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세진이 결성한 단체는 꽤 유의미한 단체였다. 무려 A급 마법사와, 대재벌의 금지옥엽이 소속되어 있으니.
참고로 세진의 단체가 처음부터 D등급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A급 마법사 하젤린의 실적 덕이 컸다.
“네. 저도 등급이 높으니까 좋네요. 막 더 올리고 싶어지고 그러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
그러나 단체에 대해 무지한 세진은 그저 뒷목을 긁적이며 태연하게 돌아설 뿐이었다.
구태의연한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공무원들은 저 사냥꾼의 뒷배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라는 지극히 타당한 궁금증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
-근데 왜 하필 이름이 단체 이름이 ‘더 몬스터’예요?
핸드폰 너머, 세정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냥. 순간 화나서. 아니, 뭘 하든 간에 ‘이미 존재하는 단체명입니다’ 라고 하잖아. 그래서 아예 없을 만한 걸로 만들었지. 근데 심지어 ‘몬스터’는 이미 있었어. 그래서 앞에 The를 붙인거고.”
-확실히.. 요즘 단체가 너무 많긴 하죠. 심지어 일반인들도 일반인 단체랍시고 만드는 추세니까요. 등산단체, 축구단체 등등···. 아, 심지어 제 학교에는 스터디 그룹이랍시고 단체 만드는 애들도 있었어요.
부글부글- 통화 도중 물이 끓기 시작했다. 세진은 스피커폰 모드로 전환하고는, 탁자 위에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지금 식사중이세요?
“아니, 아직. 만들고 있지.”
-와, 혼자서요?
“어. 엄청 잘해 나. 프로수준이야.”
샥샥샥샥- 부엌칼이 마치 섬전처럼 내다 꽂히며 야채를 난도질했다. 순식간에 잘게 갈려진 야채의 면면은 자로 잰 듯 각이 정확하게 맞아 있었다.
C-등급에 다다른 고블린의 손재주는 과연 대단했다.
-풋. 그러면 사냥꾼의 식견(食見)에 한번 신청해보세요.
‘기사, 사냥꾼의 식견(食見)’은 사냥꾼이나 기사들이 대전형식으로 요리실력을 뽐내는 프로그램이다. 몇몇 기사들은 단단한 몸을 활용하여, 도구 없이 마나로 요리하는 미친 짓을 벌인다고 들었다.
“그럼 탈락 안해서 안 돼. 영원히 출연해야 되거든.”
-뭐예요 그게. 그럼 나중에 저한테도 요리 만들어주세요.
순간 세진이 행동을 멈췄다. 기분이 좋아지려는 찰나. 문득 나이차이가 생각났다. 궁합도 안 본다는 4살 차, 그러나 미성년자인 점이 걸린다.
“······그건 그렇고, 너 주소 좀 알려줄 수 있어?”
-왜 갑자기 화제를······ 강원도에 있는 걸로 알려드려요, 아니면 서울쪽으로 알려드려요? 근데 주소는 갑자기 왜요?
“더 자주 머무르는 쪽으로. 들어보니까 단체장들은 매달 혹은 매년 선물을 보내준다고 하더라고. 비싼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도와줬으니까 입단선물 보내줘야지.”
그의 말에 세정은 웃으며 주소를 불러주었다.
-근데, 어떤 선물을 주실건데요?
“어······ 나중에. 직접 받아보면 알 거야.”
줄 건 많다. 포션, 무기, 혹시나 강해지길 원한다면 마력 문신까지. 아마 유세정은 무기를 보내주면 눈이 훼까닥 돌지도 모른다.
허나···. 그러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 아직, 자신의 정체를 가감없이 보여주기에는 너무 이르니까.
‘..그냥 오크대장장이도 이 단체에 넣어버릴까.’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그렇게 하면 대장장이로서의 운신이 편해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단체장은 단체명부를 가지고 있어 번거로운 본인확인절차 없이 인원을 추가할 수 있다.
물론 동의서가 필요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동의를 구하는 건 무엇보다 쉽다.
*
이튿날 오후.
김세진은 오랜만에 ‘인간 김세진’으로 사냥을 해보기 위해 나왔다.
무장은 모두 ‘오크의 대장간 K’ 님이 만든 것으로, 성능만큼은 확실하다. 게다가 두 개의 장비도 영체화가 되어 몸 안으로 스며들어 있다.
‘뭐야?’
헌데 그가 몬스터 휴게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별안간 시선이 집중되었다. 분명 휴게실은 아주 넓다. 그러나 세진은 모두가 자신을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
지금은 유세정도 곁에 없는데? 세진은 황급히 제 옷차림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문제는 없다. 갑옷도 모두 의류형인지라 굳이 눈에 띌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하하, 안녕하십니까.”
웬 잔뜩 느끼하게 생긴 남자가 다가와서 그의 앞을 막아 섰다.
도저히 초면. 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남자가 어느 정도 거만한 자세로 반가움을 표출하며 다가오니, 세진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것이 별로 개의치 않다는 듯, 그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들었습니다 김세진 씨. 단체를 결성하셨다고요.”
“···아.”
아무래도 단체를 만들었다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져버린 듯했다.
그때 공무원들이 반응이 좀 유별나게 부산스럽긴 했었는데, 이렇게 빨리 퍼질줄은 상상도······
“아, 제 소개를 아직 안했군요. 저는 개벽기사단의 중급기사 ‘김인수’라고 합니다.”
남자는 세진이 손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기만 하자, 일단 자기소개를 먼저 했다.
김인수. 세진은 그 이름을 되뇌이며 미간을 좁혔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적···.
“아. 그 중급기사 ‘빛의 구원자’?”
어디선가 봤었다. 아마도 옥외광고판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로 오글거리는 멘트를 내뱉던 남자. 개벽 기사단의 중급기사 김인수.
“흐흠. 역시······ 네. 제가 바로 그 빛의 구원자입니다. 참고로 곧 중상급 기사로 승급 할 예정입니다.”
“아 예. 반갑습니다. 근데 어인 일로?”
“그, 세진 씨가 단체를 결성했다고 들었습니다. 유세정 씨와 둘이서요.”
크흠- 헛기침을 내뱉으며, 김인수는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이런 각박한 세상에 단체를 결성하신 건 정말 좋은 선택입니다. 근데 그 인원이 두 명 밖에 안되는 건 조금 빈약하지 않습니까?”
그리곤 말이 없었다. 그는 뭔가 세진이 이 다음 말을 이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예. 그래도 그냥 중상급 사냥꾼이 되기 위해 만든거라 인원은 상관 없습니다. 그리고 두 명이 아니라 세명입니다.”
“아하, 그러십니까?”
이 이후로도 침묵이었다. 세진은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가 싶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몬스터 필드로 진입하려 했다.
“어엇. 어디가십니까? 저, 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김인수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세진은 살짝 짜증난다는 눈빛으로 그를 쓱 훑어보다가, 이내 그가 왜 이러는 지 깨달을 수 있었다.
“······단체에 들어오시고 싶으십니까?”
“예? 아···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뭐··· 부탁을 하신다면 그럴 수도 있지요. 왜냐면, 제가 또 유세정 씨와 친분이 있습니다. 이번에 아덴에서도 많은 대화도 나누고, 조언도 드려서···”
블라블라블라- 뭐 이리도 말이 많은지, 김인수는 정말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유세정을 말할 때 유난히 악센트를 주며 눈빛을 번뜩이는 것, 게다가 슬금슬금 볼에 홍조가 올라오고 있는 것을 미루어 보아, 이 남자는 유세정에게 명백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
“큼. 어떠십니까? 사실 세정 씨가 가입할 단체를 찾으시길래, 제가 소속된 ‘라이트 세이비어’로 초대하려고 했는데 김세진 씨가 먼저 선수를 치셨더라고요. 왜 세정 씨가 그랬는지 전 사실 그게 아주 의문이었지만··· 그래도 단체는 복수가입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실적이 분산되기 하지만, 만약 세진씨가 저를 원하신다면······.”
김인수는 ‘들어가고 싶습니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떠들며, 세진이 숙이고 들어오길 기대할 뿐.
“아··· 저는 김인수 기사님 같은 분이 단체에 들어오면 좋죠 근데······ 저희 단체는 한가지 가입조건이 있습니다.”
“예? 조건요?”
“네.”
김인수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입조건이 있는 단체는 꽤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체장이 상급 기사나 A등급 마법사 이상일 때의 이야기지. 어찌 감히 사냥꾼이······.
“신입 단원은 저에게 절대 복종을 해야 합니다.”
“···예?”
김세진이 김인수를 쫓아내기 위해, 별 생각 없이 툭 내뱉었다. 그러자 김인수는 살짝 멍하니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다가, 이내 별안간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어지기 시작했다.
이 낯짝조차도 음란하게 생긴 놈의 머리통에 어떤 생각이 아른거릴지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범위였다.
“절대복종이라니 다, 다다당신 세정 양에게 도대체 무슨···.”
“신입단원만요. 세정 씨는 신입단원이 아니에요. 창립멤버지. 그리고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건 누구한테도 안 시킬겁니다.”
“······크음.”
단풍에 물든 것 마냥 붉어졌었던 얼굴은 제 색깔을 빠르게 되찾았으나, 그래도 김인수의 가소롭다는 눈빛은 여전했다.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말 없이 김세진을 노려보던 김인수는 -그런 가입조건은 누구도 납득할 수 없을겁니다, 라며 적의가 가득 배어 나오는 말을 내뱉고서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