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태동 (3)
이튿날 오후, 김세진은 ‘대장장이 공모대회’의 물품대금을 수령하러 강원도의 우체국으로 향했다.
당당하게 갈까 생각도 해 봤지만, 그냥 로브를 뒤집어 쓰고 가기로 했다. 신원이 밝혀지면 꽤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무기를 만드는 방법은, 타인에게 보여줄 수 없을 정도로 상식과 어긋나 있었으니.
“네. 확인······ 되었습니다.”
세진이 본인확인 암호를 입력하자, 카운터 직원은 단단히 밀봉된 박스를 하나 건네 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직원은 연신 세진의 눈치를 살피며 얼굴을 힐끗힐끗 들여다보려 노력했다. 아마 이 앞에 붙은 ‘ORK’라는 이름 때문이겠지.
직원이 부담스러워 세진은 도망치듯 우체국에서 빠져나와,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편지?”
소파에 앉아 박스를 풀어보니, 안에는 오직 하나의 편지봉투가 들어있었다.
“···억?”
편지봉투에는 억 소리가 나는 수표와 함께, 정성스레 한 글자 한 글자 씩 꾹꾹 눌러 쓴 편지가 한 장 들어있었다.
[존경하는 대장장이, 오크의 대장간 K님에게.
안녕하세요. 저는 새벽 기사단의 중하급 기사 유세정 이라고 합니다. 원래 직접 마주보고 인사를 드려야 함이 마땅하지만, 대장장이님께서는 익명을 원하시는 것 같아 실례를 무릅쓰고 몇 줄의 글을 적어보자 합니다.
먼저 대장장이님께서 보내주신 물건, ‘열화의 사브르’는 저희 새벽기사단이 구매하기로 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이런 유용한 무기를 만들어 주신 대장장이님의 깊은 노고와 각고한 노력에 감사드립니다.
대장장이님이 이 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뇌와 번민, 열성을 기울이셨을 지, 식견이 좁은 저로서는 감히 상상조차도 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
···
···
그래서 저희 새벽기사단과 기업 새벽은 대장장이님께 감히 하나의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공모대회가 끝난 이후에도 장비를 만들어 판매할 계획이 있으시다면, 혹시 저희가 작은 선물로써 대장장이님의 이름을 딴 ‘오크의 대장간’을 하나 선물해 드려도 괜찮을지, 대장장이님의 고견을 묻고 싶습니다.
물론 저희는 그 대장간에 관한 권리를 모두 대장장이님께 증여하고, 그 이외의 모든 부분은 일체 관여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단지 이렇듯 찬란한 재능을 지니고 계시는 ‘ORK’님의 앞길이 편안하길 바라는 새벽의 얕은 배려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깊이 생각을 해보시고, 아래에 적혀진 주소로 답신을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이만, 글을 줄입니다.
- 새벽 기사단 중하급 기사, 유세정]
“.......”
유세정이 아주 정중하게 쓴 편지였다. 그는 머리를 살짝 긁적이며 이 어긋난 인연을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했다.
‘대장간이 있으면 좋긴 할텐데.’
“···흐음.”
그는 편지와 수표를 번갈아 보며, 잠시동안 생각에 잠겼다.
* * * *
중급과 중상급의 차이.
그것은 일견 글자 하나의 차이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 간극은 어마어마하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중상급 몬스터는 그 '특수능력'이라는 힘 때문에, 중급 몬스터보다 평균적으로 20배 이상 강력하다.
그렇기에 기사든 사냥꾼이든, 중급에서 중상급으로 승급하기 위해서는 그 전 승급보다 더욱 특별하고 어려운 조건을 요한다.
“중상급 사냥꾼부터는 중급 사냥꾼 실적순위에서도 수위를 다투셔야 하시고, 단체도 필수로 들으시어야 하며, 기사단의 추천서도 동시에 필요하세요.”
몬스터 상점에서, 카운터의 직원이 종이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
「대한민국 중급사냥꾼 실적순위」
1위 류승한. 3309점
2위 김초랭이. 3219점
···
···
···
332위 *김세진. 989점.
===
“아, 그리고 중상급 사냥꾼이 되시면, 기사처럼 실시간 랭킹이 대중들에게 공개돼요.”
“······그렇군요.”
세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실 당황스러웠다. 그냥 몬스터 사체를 팔러 왔는데, 직원이 별안간 오지랖을 부리고 있었으니.
“···제 순위가 꽤 낮네요?”
그래도 순위가 332위인걸 보고 있자니, 까닭 모를 승부욕이 솟아올랐다.
“예? 아.. 충분히 높으신거에요. 저 1위 류승한 님은 13년차 베테랑이시고, 2위 김초랭이 님도 8년차세요. 근데 세진씨는 고작 반년 차시니까 아~주 높으신 거죠.”
“근데 앞에 별표는 뭡니까?”
“‘루키’라는 표시예요. 아직 1년이 안된 사냥꾼들한테만 붙어있는 건데, 중급사냥꾼 중에서는 김세진씨 포함 2명 밖에 없으세요.”
세진은 턱을 매만지며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단체’라는 건 뭡니까? 기사단 소속, 그런 걸 말하는 건가요?”
“아뇨. 모임을 생각하시면 편해요. 함께 사냥도 하고, 끝나면 같이 밥도 먹고 하는. 굳이 같은 사냥꾼끼리 안 이루셔도 되고요, 그렇게 엄격한 절차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상대방이 동의만 하면 되거든요. 신청서 드릴까요?”
“흠······. 최소 인원이 몇명이죠?”
“본인 포함 최소 3명, 최대 30명요”
두 명······ 떠오르는 인물이 있긴 있었다.
아니, 사실 세진의 인맥은 그 두 명이 전부였다.
‘하젤린’과 ‘유세정’.
문득 떠올리고 보니, 숫자가 적다고 씁쓸해하기에는 그 인맥의 질이 너무 대단했다.
“···단체를 꼭 이뤄야 중상급으로 승급할 수 있다 이말이시죠?”
“네. 필요조건 중 하나죠. 기사단 추천서도 있으면 좋아요.”
“예. 알겠습니다.”
그는 일단 단체조직신청서를 받아 들고서, 집으로 향했다.
*
맑은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세진의 집으로 하젤린이 직접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눈꼬리가 반달모양으로 휘어지는 활기찬 미소를 지으며,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왔다.
“집이 되게 좋네요.”
“네 그···.”
“일단 앉아보세요. 저주부터 봐야지.”
곧바로 소파에 앉은 하젤린이 자신의 옆자리를 팡팡 두드리며 세진을 불렀다.
“아, 예.”
세진은 그녀의 옆자리에 착석하고서, 왼팔의 소매를 걷었다. 저주에 의해 한쪽 팔이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심하네요. 왜 마법사가 도망갔는지 알 거 같네.”
하젤린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걱정하지는 마세요. 제가 왔으니까.”
하젤린은 그 즉시 정화마법을 시전했다. 순간 그녀의 손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만큼, 온 사위를 순백으로 물들일 정도로 눈부신 빛이었다.
따스함을 넘어선 뜨거움, 팔이 저주와 함께 통째로 지져지는듯한 감각이었다.
“됐어요. 이제 6시간이면 다 나을 거에요.”
정화는 3분이면 충분했다. 하젤린은 어리둥절하는 세진을 바라보며 흐흥-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일이 바빠서~”
“아, 잠깐만요.”
세진은 후딱 떠나가려는 하젤린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에 화들짝 놀란 하젤린은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뭐, 뭐에요 갑자기.”
방금 전 붙잡혀졌던 손목을 매만지며, 그녀는 세진을 경계했다. 어찌보면 과민한 반응이었으나, 거절에 익숙한 김세진은 능숙하게 손을 휘저으며 결백을 표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해서요.”
“······부탁이요? 뭔데요?”
하젤린이 떨떠름하게 묻자, 세진은 그녀에게 대충 사냥꾼의 생리를 설명하고서 ‘단체’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냥 이름만 올려 달라는 부탁이었다.
“...네. 뭐··· 괜찮아요. 근데 저, 다른 이름을 사용해도 되죠?”
“다른 이름이요?”
“네. 어차피 단체면 연금술사보다는 마법사로 적혀지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서.”
살짝 멍하니 있던 세진은 그때 그 뉴스에서 본 하젤린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퍼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당연하죠.”
*
하젤린이 떠나가고서, 홀로 남겨진 김세진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시계를 슬쩍 보니 오후 1시. 아직 합숙은 진행중이지만, 지금은 점심시간이라 전화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뚜- 하는 수화음이 세 번 채 울리기 전에,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어, 나야. 김세진.”
-네. 알고 있어요. 무슨 일이에요?
“아 그게······.”
그는 바쁜 세정을 위해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했다. 단체를 만들 예정인데, 최소 인원이 3명이라 혹시 이름만 올려주면 안되겠느냐고.
-네. 그럴게요.
“아, 정말 고마워.”
-아뇨 사실 저도 합숙 끝나면 단체에 들 생각이었거든요. 지금 여기 ‘협동심’이라는 항목도 있어서. 오히려 제가 고맙죠.
“그럼 다행이네. 나중에 전화 갈 테니까, 거기서 동의한다고 말해주면 돼.”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핸드폰에서 유세정의 목소리가 황급히 튀어나왔다.
-자자, 잠깐만요.
“······왜?”
-아덴에서 벌어진 일. 궁금하지 않으세요?
유세정은 꼭 궁금해야 한다는 말투로 물었다. 세진은 별로 궁금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별 말 없이 승낙해준 그녀가 고맙기도 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1차 시험은 신체훈련이었어요. 근데 이게 제가 생각했던 신체훈련이 아니었어요. 정신계마법을 버텨내면서 줄다리기를 하는 거였는데, 진짜 정신이, 혼이 빠져······
솔직히 잠깐이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잠깐은 5분, 10분으로 늘려지더니 그렇게 결국은 20분이 되었다.
교관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유세정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그녀는 여태까지 아덴에서 있었던 일을 조곤조곤 끝까지 설명하려 들었다.
'설명하는 벌레...'
-아, 이제 가볼게요.
"응. 열심히 해."
-네. 고마워요. 나중에 봐요.
*
“여기요.”
한적한 오전. 한 남자가 찾아와서 단체조직신청서를 제출하고서 떠나갔다. 갓 출근했던 터라 피곤했던 직원은 하품이나 하며 여유롭게 그 신청서를 들여다보았다.
“······음?”
근데 적혀진 내용이 조금 이상했다. 약간의 오타 아니면 오류가 섞여있는 것 같은······
“···”
직원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고는, 이내 적혀진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분명 장난 혹은 오류일 것이라 확신하며.
-여보세요.
“···아, 예··· 혹시 셰나인 님 되시나요? 그 A급 마법사 셰나인? 님? 아니시죠?”
-네? 아뇨. 셰나인 맞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순간 직원의 숨이 멎었다.
고작 중급 사냥꾼이 단체장으로 있는 단체에 A급 마법사가 도대체 왜······? 이건 말이 안되는 이야기다. 분명 누군가 장난을 쳤음이 분명하다······.
“그··· 단체 일 때문에··· 연락을 드렸는···데요··· 역시 아니시겠죠?”
-뭐가 아니라는 거죠? 제가 분명 사인도 하고 도장도 찍었을 텐데요?
“아니.. 그··· 이 단체에 셰나인 님이 참여하신다는···”
-아, 네. 맞아요.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일단 지금은 제가 너무 바빠서 이만 끊을게요. 참여하는 건 확실해요.
뚝-
전화가 끊겼다. 입을 떡 벌린 직원은 방금 자신이 들은 무엇인가를 되뇌었다. 하지만 아무리 되새겨도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벙쪄있기에는 아직 하나가 더 남아있었다. 이번에도 가관이었다.
‘새벽 기사단 소속 중하급기사 유세정’.
새벽의 금지옥엽이 고작 사냥꾼이 단체장으로 있는 단체에? 직원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아··· 혹시 그··· 새벽 기사단 소속 유세정 님 되시나요?
-예. 맞아요.
순간 직원의 숨이 멎었다. 데자뷰였다.
“단체··· 맞으시나요? 단체.”
너무 놀라, 말도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유세정은 과연 개떡같은 말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예. 참여합니다. 김세진 씨가 단체장으로 있는 단체 말하시는 거죠?
“······네? 아, 네. '중급 사냥꾼'...김세진 씨요.”
-맞아요. 제 이름 올려 두세요. 새벽기사단에서도 곧 연락 드릴거에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통화가 끊겼다.
···직원의 정신줄도 동시에 끊겼다.
“······.”
그는 엄청난 거물과 통화했던 3분전의 자신을 떠올리다가,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중급 사냥꾼이 두고 있는 인맥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