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일상의 변화 (3)
“아··· 결국 그 포션도 새벽이 가져간거야? 요즘 새벽 장난 아니네.”
칠흑기사단의 본관, 기사들을 위한 휴게실 내부. 한 기사의 실망어린 말이 한숨처럼 퍼졌다. 본의 아니게 그 말을 엿듣게 된 김유린이 괜히 몸을 흠칫 떨었다.
“어. 요즘 존나 공격적이지. 게다가 이번 대장장이 공모대회도 잭팟이잖아. 운 좋은 놈은 자빠져도 처녀 치마폭이라더니만. 아무도 기대 않던 공모전에 거물이 둘이나 등장하고, 거기다 재야의 은둔고수까지. 송사리만 모였던 우물이 갑자기 무림맹이됐어.”
“아 맞다. 공모대회도 있었지. 그 뭐, ‘오크의 대장간’이랬나? 이번 2차심사는 어떤데? 물건 봤냐?”
“나는 못봤지. 선배들이 봤다는데, 대박이래. 고작 2차심사용 물건이 작년 우승자랑 맞먹는 중품-중급이란다. 근데 우리는 손가락이나 빨면서 구경해야지 어쩔 수 있나, 새벽이 선점권을 가지고 있는데.”
남자기사는 생각만 해도 짜증난다는 듯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하······ 그것 때문에 요즘 새벽애들 기세등등해서 설치고 다니는데··· 진짜 꼴 보기 싫어 살겠냐 이거?”
그들의 대화는 요즈음 '전투적' 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급격히 치고 올라오는 새벽기사단에의 푸념일 뿐이었으나, 별안간 김유린이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아이 씨···.”
너무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지금 이 사태는 모두 자신의 탓이기 때문이다.
먼저 ‘고블린 연금술사’. 요즘 연금계와 기사계를 들끓게 만드는 이 연금술사는 요선 알케미하우스와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고, '요선' 쪽이 고블린 시리즈 포션의 독점 공급권을 취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칠흑 기사단이 그 ‘고블린 연금술사’의 정보를 받지 못한 이유는. 오직 김유린과 하젤린의, 최악이라는 형언도 모자랄 정도로 험악한 관계 탓이다.
다음으로 대장장이 공모대회. 새벽이 엄청난 금액을 후원하면서 대장장이협회에 바란 것은 오직 각 심사 당 하나의 무기를 선점할 수 있는 권리.
과거 같았으면 말도 안된다 반발하여 다른 기사단과 협업을 해서라도 저지했겠지만, 이 공모대회는 명백한 하락세였기에 그냥 놔뒀다.
차라리 그 돈으로 다른 인프라에 투자하는 것이 낫다고, 김유린 자신이 직접 주장했다.
허나 그 예측은 멋들어지게 어긋났다. 태백의 제자가 참가한다고 들었을 때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오크의 대장간’. 성별나이종족,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는 이 묘연한 인물의 등장은 아득한 예상 외였다.
당장 어제, 김유린은 그가 2차 심사용으로 제출한 무기를 심사했다. ‘열화(熱火) 강철제 사브르’.
그녀는 사브르의 우아하고 서늘한 귀족적 자태에 놀라고, 그 앞에 붙은 평생처음 보는 수식어에 한번 더 놀랐다.
처음에는 ‘열화(熱火)’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고작 5분 동안의 시용(試用) 끝에, 그 뜻을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감탄했다.
검에 마나를 불어넣자 마나의 검광은 붉은색으로 물들었고, 그 붉은 검기는 고열로 들끓었다. 비록 성능은 중품에 불과하기에 많은 마나를 불어넣을 순 없었지만, 마나의 성질에 열화를 더해주는 효과는 말 그대로 대박.
대단히 좋은 무기였다. 칠흑기사단에 꼭 가져오고 싶을 정도로 아주, 지극히 좋은 무기.
그러나 그것은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다.
‘무기 선점권’이 문제였다. 새벽이 바보가 아닌 이상, 당연히 이 사브르를 선점할 터. 그녀는 이런 좋은 무기를 경쟁도 못해보고 새벽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사실에 밤잠을 설쳤다.
“이 병신 병신 병신···.”
“그, 그만하세요!”
결국 참다못한 유린이 제 머리통을 후려갈기며 자해를 시작했을 때, 별안간 김수겸이 튀어나와서 그녀를 말렸다.
“···으음. 언제부터 보고 있었니?”
괜히 멋적어진 그녀는 뒷목을 긁적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담한 키에 귀여운 얼굴. 그러나 그 앳된 얼굴과는 정반대로 재능만큼은 특출나, 23살의 어린 나이에 벌써 중급기사로 승급한 칠흑기사단의 유망주.
“방금 왔어요. 종석형님이랑 대련하다가, 잠시 쉬려고.”
“..그래?”
유린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김수겸은 그런 그녀를 안타깝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따뜻한 커피를 하나 건넸다.
“음?”
“너무 그렇게 신경쓰지 마세요. 유린 기사님이 이렇게 될 줄 알고 계셨던 것도 아닌데···.”
“······그래, 고맙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주는 이 기특한 부하기사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그의 볼에 홍조가 발그레 떠올랐다.
“근데, 그 고블린 연금술사는 확실히 새벽쪽이랑 연이 닿은 게 맞을까?”
그녀가 커피를 홀짝이며 물었다. 김수겸의 집안은 꽤나 명문이다. 당장 그의 아버지가 지금 판사로 재직중이시고, 큰아버지는 마법사 협회의 부회장일 정도로. 그러니 '정보'의 측면에서는 아마 자신보다 빠삭할 터.
“자세히는 저도 잘 모르지만······. 거의 확실하죠? 포션이 계속 새벽 쪽으로 흘러가는 거 보면. 노골적으로 우대를 해주고 있잖아요.”
“···무슨 조건을 제시했는지는 알고있어?”
“예? 아, 들리는 소문으로는 새벽이 연금술사한테 개인 공방이랑 약재 무한공급을 약속했대요. 그래서 이런 포션 물량이 나오는거고.”
혜성처럼 등장한 연금술의 귀재, 고블린 연금술사. 그 이름은 조금 꺼림측하지만 능력과 재능만큼은 이른바 ‘로데스의 현신’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나다. 게다가 이 연금술사는 성실하기까지해서, 데뷔한지 5개월만에 무려 50여개의 포션을 제조하여 '공장장'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아. 그리고 제트기도. 제트기를 사줬다는 소문도 있어요.”
“뭣, 제트···. 하아. 답이 없네. 답이 없어. 걔낸 무슨 돈이 남아도나······.”
김유린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짓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요즘 한숨이 무척 잦아졌다. 대한민국 최고인 칠흑기사단이, 현재도 짱짱하고 미래는 더 창창할 연금술사와의 관계가 안 좋다는 건 대단히 치명적인 결점이다. 게다가 그게 오롯이 자신의 탓이라면······
‘···하젤린.’
그러다 문득 누군가의 낯짝이 떠올라, 김유린이 이를 아득 깨물었다. 끝까지, 정말 끝까지 질기도록 방해하는구나, 이 못된 년.
“······수겸아, 정보 좀 하나 찾아줄 수 있겠니?”
유린이 힘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수겸은 그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말씀만 하세요.”
“고블린 연금술사. 누군지 신상 좀 캐와줘.”
“···예?”
수겸이 놀라며 되물었다. 연금술사의 신상을 비밀로 하는 것은 해묵은 불문율이다. 적어도 연금술사들과 공생관계인 기사단에게는 그렇다.
“어쩔 수 없잖아.”
그러나 김유린도 그저 이렇게 마냥 당해만 줄 수만은 없었다. 포션경매가 시작하는 날도 실수인 척 잘못 알려줘서, 경매장에 참석도 하지 못한 게 부지기수다. 하젤린과 맞부딪치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는 무슨 수를 써야할 때가 되었다.
“그래도, 만약 만나셔도, 어떻게 하실건데요? 새벽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할 수는 없어요."
“그건···.”
유린은 관자놀이를 문질르며 고민하다가, 이내 유일하게 떠오르는 한 가지 방법을 툭 내뱉었다.
“그 고블린이 남자이길 바래야지 않겠니.”
“예?! 무, 무슨 소리에요 그게!!”
단지 농담일 뿐이었다. 그러나 김수겸의 반응이 가관이었다. 그는 얼굴을 악귀처럼 우그러트린 채 벌떡 일어났다. 꽉 쥔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그, 그···.”
수겸이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자, 유린은 기가막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농담이야. 설마 그러겠니 내가? 그래도 칠흑기사단의 고위기사로서 그 연금술사 님과 말은 해봐야할 거 아니니. 이대로 있다간 죽도 밥도 안돼. 포션도 포션이지만, 대한민국 최고라는 명성과 자존심이 더 중요해.”
“그..그건 그렇죠, 네······”
그제서야 김수겸은 진정하며 자리에 앉았다.
“한번 알아봐줘. 이대로 새벽한테 다 뺏길 수는 없어. 안 그래도 요즘 '균열' 때문에 알력다툼이 잦은데.”
“······예. 근데 정말.. 그러시는 거 아니죠?”
김수겸이 토끼처럼 조심스레 되물었다. 유린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래. 넌 나를 뭘로 보는거니?”
“..네. 그럼, 제가 최대한 알아 볼게요.”
*
식곤증이 햇볕의 그늘처럼 덮쳐오는 오후. 소파에 늘어져라 누워 잠에 들락 말락 하고 있는 흑색늑대를, 핸드폰의 부르릉- 하는 알림이 깨웠다.
눈을 뜬 흑색 늑대가 핸드폰으로 다리를 뻗었다. 그저 짐승에 불과했던 그 발은 어느새 인간의 손으로 변해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이번 공모대전에 엄청 좋은 무기 들어왔어요. 한번 보실래요?」
유세정이 보낸 문자였다.
세정과 첫 사냥을 한 이후로, 한달 하고도 일주일, 횟수로는 8번 째. 그녀는 요즘 이런 문자를 자주 보내왔다. 사냥하는 일이 없더라도, 이틀에 한번씩은 꼭. 어쩌면 자신과 그녀의 관계가 어느정도는 친밀해졌다는 방증이겠지.
김세진은 그 문자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가락을 놀렸다.
「뭔데? 또 그 ORK인가 하는 대장장이가 만든 무기?」
핸드폰을 내려놓기 무섭게 답장이 왔다.
「네. 이번에는 ‘사브르’인데, 아주 대단해요. 무기에 특별한 효과까지 부가되어 있어요. 마나를 불어넣으면, 마나가 붉게 물들면서 고열을 띄는데, 이게 마나의 절삭력과 합쳐져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것 같아요. 안타깝게도 휘둘러보지는 못했지만.」
「그런거 알려줘도 되는 거야? 스포일러 아닌가?」
「뭐 어때요.」
간단한 답장, 그 이후에는 사브르의 사진이 좌르륵 올라왔다. 무슨 여자들이 음식사진 찍는 거 마냥 여러 각도로, 심지어 필터효과까지 넣었다.
「좋아 보이네. 이것도 네가 쓸거야?」
「그러고 싶은데, 안돼요. 아무래도 눈치가 보여서. 최종 심사 물건을 제가 가지려면 이번 건 양보해야해요. 이번 최종 심사에 어떤 물건이 나올 지 엄청 기대됨. (웃음) 」
좋은 물건이라고 말해주니 괜히 뿌듯했다.
촌철살인의 냉정한 심사평으로 유명한 유세정이 이렇게 말해주니, 이번에도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겠지.
「근데 이번주 금요일 시간 있어요?」
「없진 않지. 왜, 또 사냥?」
「네.」
세진이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여태까지의 문자는 사냥제안을 위한 포석이었나 보다.
「좋지 오후 두 시 어때?」
「네. 좋아요. (감사)」
「근데 뒤에 감정표현 이모티콘 안해도 되.」
「네. 근데 되가 아니라 ‘돼’에요. ‘안 돼’ 는 제대로 쓰시면서, 왜 다른 맞춤법은 못 맞추세요?」
“···큼.”
「미안 내가 교육을 많이 못 받아서. 새겨들을게」
「(웃음)(괜찮음)」
“······후우.”
이건 도대체가 놀리는 건지··· 세진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