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오크의 대장간 (3)
[단조가 완료되었습니다.]
[강도 단계: D]
[성질부여에 성공했습니다 : ‘C등급 날카로움’, ‘D등급 경량화’]
[완제품의 완성도가 탁월해 숙련등급이 F에서 D-로 상승합니다.]
“좋군.”
고블린, 김세진은 단검을 만지작거리며 만족을 말했다. 짧지만 예리하게 뻗은 검신에는 고블린의 손재주가 십분 발휘된 섬세한 문양이 새겨져 있고, 암석으로 이뤄진 칼자루는 깔끔하고 가볍다.
사실 가능하면 ‘검’이나 ‘도’같이 좀더 길고 파괴적인 무기를 만들고 싶었는데, 현재의 숙련등급과 마나량을 고려하면 이 단검이 한계였다. 아무리 마나를 많이 쏟아 부어도 ‘단조’의 지속시간은 10분에 불과했고, 고작 10분동안 고블린의 작디 작은 손으로는 단검 이상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아쉬움과는 별개로 이 단검은 퍽 마음에 들었다. 오크의 단조와 고블린의 손재주가 합쳐진 무기이자 공예품. 물론 자신이 만들었다는 생각에 조금 많이 미화된 감도 없지않아 있지만, 객관적으로도 ‘탁월한’이라는 단어는 이게 처음이었다.
'그나마 이게 최선이네.'
가능하다면 숙련등급을 더 올리고서 공모대회에 출품하고 싶었지만, 당장 신청마감이 내일이라 어쩔 수 없다. 일단 예선을 뚫고 1차심사까지 가면 새로운 장비를 만들 기회가 주어지니, 그때를 위해 열심히 숙련등급을 올려놓자.
김세진은 인간폼으로 변해 몸을 일으켰다 .
*
“저기요, 무기류는 어떻게 배송해야 하나요?”
단검을 주머니에 숨긴 채, 범죄자처럼 우체국 안을 서성이던 세진은 결국 카운터의 직원에게 물었다.
“예? 무기류요?”
“네. 제가 대장장이 공모대회에 참가해야 하거든요.”
세진은 의자에 앉아있는 직원을 굽어보다시피 하며 말했다. 그는 지금 야수의 인간화, 189cm의 김세진이 되어있었다.
“아하. 그러시면··· 그게 따로 있을 거에요 아마. 잠시만요.”
직원은 서랍을 뒤적이더니 종이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공모대회 신청서였다.
“다 적으시구 제출하시면 돼요. 근데 늦게 오셨네요? 대부분은 신청기간 첫날에 왔다가셨는데.”
“아. 저는 좀.. 만드는 데 오래걸렸어요. 그분들처럼 미리 만들어 놓지를 않아서.”
세진은 신청서를 들고 근처 의자에 앉았다. 신청서에는 이름, 연락처, 주소. 오직 이 세가지만 있었다. 그는 일단 이름을 제외한 공란에는 모두 제대로 적었으나, 가장 중요한 ‘이름’란에는 김세진이라는 본명을 적기에 조금 부담스러워 어제 생각해둔 별호를 적었다.
“여기요. 얼맙니까?”
“배송은 대장장이협회에서 부담하는거래요.”
“아···.”
세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감사하다고 말하며 우체국을 나섰다.
우체국은 강원도의 시내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어,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많은 인파들이 보였다. 그는 동굴로 돌아가지 않고, 일부러 사람들의 틈에 섞여서 길을 걸었다.
좌절과 절망속을 헤엄치다가 마침내 얻은 일정부분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힐끗
눈동자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부단한 고생 끝에 얻은 자유는 생각보다 더 달콤했다. 멀리서도 눈에 확 띌 정도로 다부진 체격과 수컷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날카로운 얼굴. 지금의 김세진은 과거와는 전혀 달랐다. 이성의 관심을 포기했었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그저 길을 걷기만 해도 이성이 눈길을 보냈다. 괜히 그를 의식하며 헛기침을 하며 머리를 넘기는 여성도 있었다.
참,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
헌데 어느 순간. 그의 콧속으로 의외의 향이 흘러왔다. 놋쇠의 냄새가 희미하게 아른거리는, 인간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기묘한 혈향(血香). 세진은 그 아릿한 향내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발견할 수 있었다. 겉보기에는 너무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는 두 명의 남녀. 그러나 피비린내의 근원지는 바로 저 두 명이었다.
세진은 서서히 발걸음을 움직였다. 인파속에 숨어, 저 둘을 미행한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단지, 이래야 할 것 같았다. 어쩌면 본능이었다.
그렇게 그들을 뒤따라가던 와중에, 갑자기 시야가 넓어졌다. 본능에 감응한 ‘늑대의 동공’이 자연적으로 시전된 듯 했다.
모든 색감이 한층 더 진해진 세상 속에서, 세진은 볼 수 있었다. 저 두 명의 남녀, 정확히는 남자 쪽이 풍기는 불길한 피의 기운을.
‘뱀파이어.’
그 한 단어를 떠올린 순간. 그의 이성이 흐릿해졌다. 심장이 거칠게 박동하고, 숨이 가빠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뛰어들어 저 남자의 머리통을 깨부수고 싶다는 늑대야수의 살의가 의식을 잠식해갔다. 그러나 인간 김세진은 가까스로 참아냈다. 아직, 아직. 조금만 더 기다리자. 확실한 기회를 노려야한다······.
다행히도, 오래 기다리지는 않아도 되었다. 남자는 여성의 손을 잡고 허름한 주택단지로 향했다. 아마도 흡혈을 위해서겠지. 그는 급히 발걸음을 움직였다.
*
인간이 뱀파이어라는 종족의 일거수일투족에 촌각을 곤두세우면서, 흡혈행위는 상당히 조심스러워졌다. 귀찮더라도 현혹을 이용해 꾀어내고, '실내'에서 흡혈을 한다. 그것은 어느새 뱀파이어들의 불문율이 되었다.
남자 흡혈귀, 유상현은 만족한 표정으로 꾀어낸 여성을 제 집 안으로 끌어들였다. 현혹에 잠식된 이 아름다운 여성은 이제 자신만의 식량창고가 될 터였다. 1년, 주기적인 흡혈에 의해 몸이 급속도로 노화되기 전 까지.
“···누워.”
그가 그렇게 말하자, 여성은 아무런 반항 없이 침대에 누웠다. 긴 원피스 한장만을 걸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더없이 고혹적이었다.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가, 그 몸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발가락에서 정강이, 정강이에서 허벅지. 더 위로, 좀 더 위로······. 곤두선 촉각은 유상현에게 깊은 황홀감을 선사해주었다.
그런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쾌락에 그가 그녀의 몸을 찍어누르듯 덮쳤을 때.
-똑똑
노크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그 어느 누구보다 청각이 예민한 흡혈귀에게는 최악의 훼방이었다. 상현의 표정이 흉악하게 일그러져갔다.
“······시···발.”
충혈된 눈을 치켜세우며, 그는 욕설을 뇌까렸다.
-똑똑똑똑똑똑똑
그러나 저 문 너머의 누군가는 다시금 노크를 해왔다. 오히려 전보다 더욱 공격적이었다. 그 몰예의에 격노한 유상현이 으르렁거리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붉게 번들거리는 눈은 살해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똑똑···
노크가 두 번이 채 울리기도 전에, 상현은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그의 원래 계획은 이 앞에 있는 누군가의 목을 움켜쥐고, 이 안으로 끌고 들어와 사지를 찢어발기는 것이었다.
“이 개새······끅!”
그러나 그보다 먼저, 불쑥 튀어나온 야수의 손이 그의 목을 우그러뜨렸다.
갑작스런 악력에 당황한 상현은 연신 손톱으로 그 팔을 긁어 댔지만, 검은 털로 뒤덮인 야수의 팔은 흠집도 나지 않았다.
-끼이익
반쯤 닫혀있던 문이 서서히 열리고, 한 명의 남성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확실한 인간이었다.
한 쌍의 샛노란 눈동자가 발하는 섬뜩한 눈빛과, 짐승의 그것이 확실한 한쪽 팔을 제외한다면.
“끄으으······”
그리고 상현의 기억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우직-
무엇인가가 뒤틀리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그의 목뼈가 통째로 으스러졌다.
“······”
김세진은 흡혈귀의 사체를 쓰레기 버리듯 내던지고서, 문을 닫았다. 살해를 했다는 죄책감은 단 일말도 없었다. 그저 벌레 하나를 죽인 느낌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죽이지 않았으면 저 놈이 먼저 인간을 살해했을 테니, 한 명의 인간을 구원했다는 정의감마저 들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뱀파이어에게 현혹당했던 여성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사단은 벌어지지 않았는지, 침대위의 여성은 그저 옷만 반쯤 벗겨진 채 기절해 있을 뿐이었다.
이 곳에는 죽은 뱀파이어와 저 여자 이외의 다른 냄새는 없었기에, 세진은 한쪽 팔을 다시금 인간으로 변환했다. 특정 부위만을 야수의 그것으로 변화시키는, 그가 얼마 전에 알아낸 야수화/인간화의 활용법 중 하나였다.
김세진은 저벅저벅 걸으며 집안 내부를 잠시 살펴보았다. 유난히 허름한 탓인지, 집 외부에도 내부에도 CCTV는 없었다.
‘알아서 신고 하겠지.’
만족한 그는 침대에 누워있는 여자를 힐끗 바라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정확히 세 시간 후. 현혹에서 깨어난 여성은 비명을 지르며 경찰에게 신고했다.
* * * * *
서울시청 바로 옆에 위치한 ‘대장간협회’, 3층 높이의 평범한 이 건물 안에서는 공모대회 신청작품 분류작업이 한창이었다.
“이번에는 물건이 나올 수 있을까요? 저번 공모대회에서는 중품(中品)이 한계였잖습니까.”
칠흑기사단의 고위기사, 김유린이 그 분류과정들을 훑어보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 옆에 있던 협회장이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믿어봐도 좋아. 당장 광주랑 부산쪽 공방에서도 단체로 참가했고, 김태백 선생의 직속제자도 참가한다고 물건을 보내왔단다. 명품은 무리더라도, 상품(上品)은 가능할지도 몰라.”
“오, 정말입니까?”
명인들은 제자에 관해서는 아주 까다롭다. 몇몇 명인은 아예 제자를 두지 않고, 다른 명인들도 고작 1~2명의 제자만을 둘 정도로. 국가에서는 그런 그들에게 제자를 양성하려는 노력을 아주 살짝이라도 보여주신다면 많은 지원을 해드리겠다고 애걸복걸했지만, 명인들의 고집은 굳건했다.
“그럼. 바로 1차를 통과했지. 내 나중에 한번 소개시켜 주겠다.”
“그 고집불통이시던 태백 선생님의 제자라··· 혹시 제가 생각하는 그것입니까?”
“그래. 네 생각이 맞다. 그 불통 영감탱이가 제 피붙이가 아니고서는 제자를 삼을 리가 없지 않느냐. 19살의 핏덩이다.”
협회장의 불만섞인 말에 김유린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첫째는 재능이 없다하여 내치지 않았습니까. 막둥이라 하던데, 재능이 뛰어났나 보군요.”
“그것도 맞긴 하지. 검을 하나 보내왔는데 꽤 예리하더구나.”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마지막 날의 심사가 점점 그 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게 마지막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직원 한명이 철제상자 하나를 들어보이며 외쳤다.
“저도 같이 한번 봐도 되겠습니까?”
“안될 건 없지. 근데 기대는 하지 않는게 좋을게다. 이미 내로라하는 공방 놈들은 오래전에 물건을 제출했으니, 별 볼일 없는 물건일게다.”
“예.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마지막이지 않습니까?”
“그래.”
협회장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야! 잠깐만 기다려라! 고위기사님도 함께 보고싶으시단다!”
“예, 예? 아, 예!”
직원은 상자를 뜯어내려던 손길을 퍼뜩 멈추고서 정좌세를 취했다.
그렇게 상자가 올려진 책상 위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물론 직원들의 관심사는 안 좋을 게 뻔한 무기가 아니라, 미치도록 아름다운 고위기사 김유린이었다.
“열까요?!”
“예. 부탁합니다.”
김유린이 그렇게 말하자, 직원은 조심스레 상자를 열었다.
상자가 살짝 열리는 그 순간. 전구의 빛이 날붙이에 반사되어 직원의 눈을 찔렀다.
“으!”
눈을 부여잡으며 물러선 직원을 뒤로하고, 김유린과 협회장은 그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
김유린의 입술 사이로 맹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그들이 이 물품을 보고자 했던 이유는, 그저 마지막이라는 상징적 의미 때문이었다. 그 말인즉슨,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헌데······ 이 상자 안에는 꽤나 좋은 물건이 들어있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장식용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로 섬세하게 조각된 단검일 뿐이지만, 그 단검에 내재된 마나의 예리함은 보통이 아니었다.
서늘한 회색빛 검신은 그저 살짝 닿기만 해도 베일 듯 하고, 검신에 새겨져 있는 아름다운 문양과 모난 데 없이 깔끔한 칼자루는 기사의 소장욕을 한껏 불러일으킨다.
“······”
유린은 멍하니 그 단검에 손을 뻗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전혀 불편하지 않고, 이 단검과 자신이 마치 한 몸 인양 자연스럽게 잡혀졌다. 그 편안함이 이 무기가 사용자를 배려하여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아무래도, 물건이 하나 더 생긴 것 같구만.”
협회장도 김유린처럼 넋을 잃고 그 단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이, 이 참가자 이름이 뭐지?”
그의 말에, 마찬가지로 멍하니 단검을 감상하던 직원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상자 안의 신청서를 집어들었다.
“······뭐지?"
“···뭐라고?”
"아 그··· 이름이 좀 이상한데요. 오크의 대장간, 줄여서 ‘오크’라고 불러달라네요.”
그 최악의 이름에 협회장이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익명이나 별명을 써놓아도 된다고 했지만 어찌 몬스터의 이름을······
“고블린 연금술사도 그렇고, 아무래도 요즘은 몬스터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유행인가 봅니다.”
그러나 김유린은 유쾌하다는 듯이 쾌활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오크도 워낙 무기를 잘만드니 조금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 협회장님?”
“음?”
“태백 선생님의 자제분 말고, 이 ‘오크’님과 만날 수 있게 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어감이 조금 이상하긴 한데······ 무기가 아주 마음에 드는군요. 인맥을 쌓아두면 나중에 아주 좋은 무기를 만들어 주실 것 같습니다.”
그녀의 말에, 협회장은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한다면야··· 내 한번 노력을 해보마. 근데 그 전에, 검수를 한번 해봐야겠어. 장인이나 명인이 일부러 제 수준을 낮춰 장난을 치는 경우일 수도 있으니.”
"예. 감사합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