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천부적인 사냥꾼 (3)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는 알림창에 세진의 눈알이 데굴데굴 굴렀다. 언뜻 살펴보니 모두 만족스런 문장들 뿐. 그러나 뜻밖의 진화에 환호의 탄성이라도 지르기에는 너무 곤혹스러운 타이밍이었다.
‘..스킬이 괜찮네.’
일단 오크전사로 진화했다는 알림보다는 ‘역전의 전사’라는 스킬에 먼저 눈길이 갔다. 인간형일때도 사용이 가능하니 상당히 좋은 스킬이다. 과연 이름 답게 변수를 만들기에 좋은 스킬이다. 그러니까.. 지금같은 상황을 비틀 수 있는 변수.
‘쟤를 어떻게 해야 되냐, 진짜.’
그가 복잡한 시선으로 유세정을 바라보았다. 호기롭게 트롤과 마주했지만, 그녀도 사실 명백한 만용임을 알고있을 터였다. 비뚤어진 입가에서 침이 줄줄 흘러내리는 저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식탐의 트롤이었으니.
게다가 몸의 크기와 전해지는 압박감의 강도를 따졌을 때, 저건 최소 중하급 이상이다. 하급기사는 하급 몬스터를 혼자서 처치할 수 있는 기사다. 언뜻 보기에도 어린 나이에 하급기사가 된 건 정말 드높이 자랑해 마땅할 재능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중하급은 대단한 무리다.
“···하아.”
세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뛰쳐나간 남자의 속도로는 아마, 1분 내외면 기사단에 도달할 수 있겠지. 그러나 군부대의 상주기사가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콰아아아앙-
깊은 생각은 사치였다. 어느새 세정의 검과 트롤의 주먹이 맞부딪쳤고, 폭음과 함께 유별난 충격파가 발생해 대지를 진동했다. 그녀는 일 합에 나가떨어지는 것만큼은 겨우겨우 면했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이었다.
부우우웅-
여유롭고 도도했던 불과 5분전과는 전혀 다른, 파리하게 질린 안색. 그러나 트롤에게 자비따윈 없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트롤의 거대한 주먹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쏟아져 내렸다.
세진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러나 휘발적인 감정으로 저 놈에게 달려들기에는, 너무 두려웠다. 타오르는 화마속으로 전진 해야하는 소방관의 심정이 이러할까.
투쾅─!
그가 고민을 하는 사이에도 세정의 몸이 트롤의 주먹에 의해 야구공마냥 튕겨져나갔다. 그녀가 쥐고있던 명검은 파편의 형태로 분해되었고, 입고있던 외투형 갑옷은 흉측하게 어그러져 그 효력을 상실했다.
쿵, 쿵-
트롤은 거대한 진동을 울리며 전진했다. 그렇게 쓰러진 세정의 지척에 닿자, 놈은 거대한 손을 치켜세웠다.
'···뭐야?'
그 광경을 오롯이 바라보며, 세정은 차마 눈을 감을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다. 그저 현실성이 없었다. 지금의 이 모든 상황이, 차마 신음도 내지르지 못할 정도로 극악무도한 이 고통이, 모두 꿈결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지독한 악몽. 어서 빨리 잠에서 깨어나야 하건만······
트롤의 손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시간이 늘려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머릿속이 하나도 남김없이 하얗게 명멸하던, 바로 그때.
쾅!
온 사위에 질풍을 휘몰아치며 등장한 한 남자가 그 트롤을 막아 세웠다. 오직 맨 몸, 두 팔과 두 다리로. 기이하게도 ‘마나’의 기운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이 남자는, 오직 '신체'의 힘만으로 트롤을 멈춘 것이었다.
트롤의 중압에 의해 입고있던 옷이 찢겨나가고, 딛고있는 노면이 깊게 패여감에도,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굳건히 서서 트롤과 대항하고 있었다.
세정은 멍하니 그 말도 안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상식의 궤를 달리하는 너무나도 비현실인 광경이었다. 꿈보다 더 꿈같았고, 그래서 그녀는 지금 현재가 현실임을 가까스로 인지할 수 있었다.
“···가!”
멍하니 있는 세정에게 남자가 다급히 소리쳤다. 그러나 아까의 충격때문인지 귀에 이명이 끼어 잘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통을 몇 번 흔들고 나서야, 가까스로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도망가라고 이 병신아!”
세진은 죽을 맛이었다. 이 빌어먹을 트롤이 선사하는 무게감은 차원이 달랐다. 뼈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흉악한 고통. 그러나 견뎌낼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애써서 시간을 벌어주고 있는데도, 아직까지도 멍하니 이쪽을 구경만 하고있는 여자 때문에.
“···!”
욕설을 섞으니, 그제서야 알아먹었는지 다리를 절뚝이며 부랴부랴 도망친다. 세진은 그녀가 완전히 피신하고 나서야, 몸을 굴렀다.
퍼어어엉!
굉음이 울리고, 방금까지 그가 서있던 대지에 놈의 손바닥만한 흉터가 커다랗게 새겨졌다.
-그으으으으···!
갑작스런 방해물의 출현에 제대로 화가 났는지, 놈은 콧김을 씩씩 뱉어대며 이쪽을 노려보았다.
그와 동시에 온 몸의 힘이 쭉 빠졌다. 아, 일분은 참 짧은 시간이구나.
그러나 지속시간이 지났음에도 고통은 없었다.
아무래도, 이미 두 팔의 뼈는 물론 신경까지 손상되어 버린 듯 했다. 두 팔이 싹둑 잘린 것처럼 감각이 아예 없으니.
-아가씨!
-저 개새끼가! 야!! 멈춰!!
하지만 정말 천만다행으로, 저 멀리서 몹시 호쾌하고 묵직한 음성이 울렸다. 그 기백넘치는 사자후에 트롤이 당황한 듯한 기색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노옴!!!”
수풀을 헤치고, 마치 탄환처럼 튀어나온 대머리는 푸른 검광이 번뜩이는 보검으로 허공을 베었다. 그러자 대기마저 찢어발길 반월의 검격이 트롤을 향해 쏘아졌다. 피할 여지조차 존재치 않을 초음속의 검격은 그대로 트롤의 몸을 관통했고, 놈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이등분이 되어 허무히 쓰러졌다.
“세정아 괜찮냐!”
세진이 그간 겪었던 고초가 무색해질만큼 쉽게 트롤을 처치한 기사는, 다리는 물론 온 몸이 분질러진 채 바닥에 나자빠져있는 유세정에게로 달려갔다.
“세정아! 아이고! 이 이쁜 얼굴이 어쩌다가···.”
남자가 안달하며 세정의 몸을 껴안았다.
'..몸이 안움직여.'
그러자 별안간 세정이 쿨럭이며 피를 토해냈다.
"흐어억! 이게 뭐야! 세정아!! 세정아~!!!"
남자가 붉으락 푸르락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안달했지만, 그러나 세정의 관심은 온통 다른 곳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그저 귀찮기만 했다.
어느새 잔뜩 부은 얼굴로는 눈을 뜨는 것 조차 힘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기어코 눈꺼풀을 들어올려,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옷은 모두 넝마가 되어 찢겨졌고, 그 틈새로 탄탄하고 다부진 근육이 조각처럼 새겨져 있다. 축 늘어진 두 팔은 보랏빛을 넘어 흑색으로 물들고, 다리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후들후들 떨린다.
자신을 구해준, 그러나 이름은 모르는 남자. 분명 알려줬던 것 같은데··· 그새 까먹었다. 괜히 이런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기억좀 해 둘걸.
그때, 갑자기 남자가 이쪽을 힐끗 한번 바라보고서 어딘가로 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위태한 걸음에, 세정은 손을 건네고 싶었다. 그러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 안의 감각이 모두 마비가 된 듯 했다.
“···.”
그래서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서서히 감기는 눈꺼풀의 틈으로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기억에 새기는 일 뿐이었다.
*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지만 참아내고서 몸을 움직이고 움직였다. 피투성이가 되어 질척한 몸이 거슬려, 인적이 드물어진 그 즉시 늑대폼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육체의 부상과 정신의 몽롱함은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멀쩡한 두 발로 필사적인 뜀박질을 계속했다. ‘몬스터 필드’에서 기절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에.
경황도 없이 달려서 기어코 안식처에 도착했다. 인간폼으로 변해 제조해 두었던 포션을 마셨다. 팔이 움직이지 않아 입으로 뚜껑을 따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다행히 부상은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그러나 의식은 여전히 몽롱하고 또 나른했다. 아무래도 스킬의 부작용인듯 싶었다. 그렇게 세진은 그대로 바닥에 누워 깊은 잠에 빠졌다.
* * * *
한국 최고의 기사단은 명실상부 칠흑기사단이지만, 기사단을 국립과 사립의 두 분류로 나누자면 그 이야기는 미세하게 달라진다. 물론 기사단의 정점이 칠흑기사단인 것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사립'기사단만을 따질 경우에는 조금 복잡하다. 2강 9중 12약이라고 할까, 수 많은 기사단이 서로간에 경쟁을 한다.
그리고 그 2강중 하나인 '새벽기사단'은 세계 굴지의 대기업 ‘새벽달’이 오너로 있는 기사단이다. 처음에는 후발주자로 시작해 그저 돈만 많은 졸부 기사단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뤘지만, 그 압도적인 재력으로써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현재의 평판은 반전을 넘어 개벽의 수준이었다. 요즈음 최고의 명문 기사단이 어느 곳이냐, 하면 칠흑과 고려, 그리고 새벽기사단이 함께 꼽힐 정도로. 게다가 그중 금전적 대우만큼은 새벽이 단연 압도적이다.
“현오 삼촌 탓 아니니까, 그만 미안해 해. 다 내가 잘못한건데..”
그리고 유세정은 세계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대기업인 새벽달 총수의 손녀이자, 새벽기사단 단장의 딸이다. 매스컴에서도 유명한 상급기사 박현오를 이렇게 쩔쩔매게 만들 정도로, 태어날 때부터 반물질 수저를 물고 태어난 어마어마한 아이.
“..아, 아니다. 그래도 내가 더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야 했는데···.”
그 압도적인 배경은 물론 재능까지 완벽한 그녀는 고작 만 17세 45일의 나이로 국가로부터 하급기사 서한을 받았다. 이는 만 17세 6일의 나이로 하급기사 서한을 받은 김유린과 고작 한달 남짓한 차이이며, 그만큼 그녀는 또래 중에서는 비교할 자가 없는 압도적인 재능이었다.
“자책은 이제 됐고, 알아 달라고 해준 건 알아봤겠지?”
“···어? 아 그거?”
고작 이틀 전에 의식을 되찾은 세정은 깨어나자마자 그때 그 남자의 신원부터 물어왔다. 오직 세정에게만 모든 관심이 팔렸던 현오는 기억조차 못하는 남자, 그러나 세정은 그 남자가 자신을 구해주었다고 말했다.
“..설마 여태 손 놓고 있었던건 아니겠지.”
현오가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자, 세정의 눈빛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아, 아니야! 솔직히 처음에는 나도 의아했지. 네가 허상이라도 본건 줄 알고··· 고작 하급사냥꾼이 트롤을 멈추는 건 불가능하니까. 근데······”
잠시 말을 멈춘 그는 품속을 뒤적거리더니 구리색을 띄는 등록증을 하나 꺼냈다.
“진짜 있더라고. 나도 깜짝 놀랐다. 찢겨진 옷조각들 사이에서 발견한 거야.”
현재 반신불수로 몸의 거동이 불편한 세정을 위해, 현오는 등록증을 그녀의 눈 앞으로 들이밀었다.
“천부적인 사냥꾼, 김세진···. 잠깐, '천부적인'?”
“어. 그렇드라. ‘천부적인’은 나도 진짜 오랜만에 보는 칭호인데, 왠지 이거 보니까 그럴 만 하겠더라고. 왜 이 칭호 달고있는 사냥꾼놈들은 하나같이 다 정상이 아니었잖냐.”
“······찾을 수 있겠지?”
“고럼. 벌써부터 수색 들어갔어. 당장 내일이면 떡 하니 데려올 테니까··· 아 근데 너 혹시······”
별안간 현오가 눈을 가늘게 좁히고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세정이 나이에 맞지 않게 성숙하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엄연한 미성년자다. 낭랑 18세라는 말처럼 아직 쓸데없는 낭만과 환상이 가득할 터. 그러니 혹시 이런 긴박한 위험에 자기를 구해준 남자에게 호의 그 이상을 품는다거나 할 수도······
“풋. 그런거 절대 아냐. 나, 애 아니야. 그냥.. 할아버지께서도 맨날 말씀하셨잖아. ‘은혜는 가능한 한 빨리 갚고, 원한은 가능한 한 서서히 갚아라’. 나는 그 말씀을 깊게 새겨뒀을 뿐이야."
전혀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은 세정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을 이었다.
"근데 그건 그렇고, 나 치료는 가능한거야? 언뜻 들었는데 꽤 심각한 반신불수라면서.”
순간 현오가 몸을 흠칫 떨었다.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다 듣고 있었구나?”
"응. 엄청 심각하다면서."
고작 10여년전만 해도 반신불수는 대단히 고통스러운 난치질환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연금술의 개발과 발전으로 인하여, ‘포션’하나면 쉽게 나을 수 있으니.
그러나 지금 그녀의 상태는 반신불수 중에서도 꽤나 심각한 수준이었기에, 적어도 중상등급 이상의 꽤 좋은 포션을 필요로 할 것 같았다.
“근데 걱정은 안해도 될 것 같아. 강원도 쪽 알케미하우스에서 중상등급 이상 재생·회복 포션이 들어왔다는 소식이 있거든. 강원도쪽의 성능은 언제나 확실하고, 회장님께서 뒷돈 두둑이 얹어 주셨으니까 물건 들어오는 대로 바로 구할 수 있을거야.”
“···그래? 잘됐네.”
세정이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포션 이름은 뭔데? 동해쪽 공방에서 나온 물건인가? 근데 그쪽 분명 파업한다고 들었는데··· 파업 멈췄어?”
“아니. 여전히 현재 진행중. 새로운 거야. 낯설정도로 새로워. 아예 새로운 인물이, 매우 뜬금없이 튀어나와서, 엄청난 물품을 내놓고 갔대. 그쪽 직원이 아주 귀재납셨다고 난리 부르스를 떨더라.”
“그래, 그러니까 이름이 뭐냐고.”
"아, 이게··· 이름이 약간 신뢰가 안가는 이름이긴 한데······"
현오는 대답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머뭇거렸지만, 답답해하는 세정의 날이 선 눈빛에 결국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나도 몇번이나 되물었는데······‘고블린의 선의’. 이게··· 포션의 이름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