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고블린의 선의 (3)
김유린과의 예상치 못한 만남, 그 일주일 뒤.
세진은 그녀가 선물해준 검치로 일단 4개의 포션을 제조했다. 신체를 강맹하게 만들어주는 포션 하나와, 치유와 재생의 효능이 있는 포션 세개. 전자는 사냥용으로 남겨두고, 후자는 판매하기로 했다.
이제 동굴에서 사는 것도 어느정도 질려가는 참이었고, 기력이 8까지 늘어 하루 80분정도의 인간형이 가능했기에, 강원도 근처의 집을 구매하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강원도는 '몬스터 산업의 메카'라 불리는 만큼 땅값이 수도 서울 다음으로 비싸, 지금부터 뼈빠지게 일해도 오래 걸리겠지만.
어찌되었든, 그래서 세진은 약재의 쓴 내음과 화학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리로 가득한 이 곳 '연금술의 집'으로 왔다.
연금술사들이 제조한 포션의 심사와 등급판정, 유통을 전담하는 이 '연금술의 집'은 각 시도마다 최대 세 개 정도만 존재하는 희귀한 기관이다. 그러나 이 연금술사의 집, 일명 ‘알케미하우스’는 몬스터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에, 강원도에서 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세진은 어렵지 않게 찾아올 수 있었다.
"흠.."
연금술사들이 즐겨 입는다는 로브를 사 입고 후드까지 깊게 눌러 쓴 세진의 겉모습은 그럴 듯 했으나, 주위를 두리번두리번거리는 행동은 영락없는 초심자였다.
“혹시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있으신가요?”
그리고 그런 그에게, 직원이 다가와서 물었다.
“···제조한 물약을 판매하고자 하는데. 경험이나 전력이 없습니다. 그래도 가능한가요?”
“아, 네. 물론입니다. 따라오시겠어요?”
어느 나라의 어느 지역이건, 마법사보다도 개체수가 적은 연금술사는 귀한 인재취급을 받는다. 그리고 초보처럼 보이긴 해도 세진의 모양새나 하는 말은 누가봐도 연금술사였기에, 남직원은 예의를 다하며 세진을 이끌었다.
근처 사무의자에 착석한 세진은 줄어드는 시간에 초조해하며 직원을 기다렸고, 곧 직원은 종이 하나를 들고서 그의 앞에 앉았다.
“자, 여기 신청서인데요. 포션의 효능과 이름을 적어 주시면 심사가 가능하십니다. 심사결과 부작용이 없고 효능이 확실하다고 판정되면 그 효능에 따라 포션의 등급이 정해지구요, 그때부터 판매가 시작됩니다.”
연금술사들이 손수 제조하는 포션은 공급에 비해 수요가 극히 많다. 몬스터 상점에서 흔히 파는 싸구려 ‘응급물약’같은, 10등분 된 마나석을 이용하여 대량생산하는 조악한 물약과는 근본적인 성능에서부터 격이 다른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난 연금술사가 제조한 포션은, 매물이 나오기 아주 오래전부터 예약해야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특이하게도 여기서 ‘이름’이란 연금술사의 이름이 아니라 ‘포션의 이름’을 일컫는다. 익명을 좋아하고,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걸 미덕으로 여기는 연금술사들이 자신의 능력을 뽐낼 수 있는 매개체는 ‘포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연금술사들은 포션의 이름을 고심하여 짓고, 그 포션을 발전시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역랑과 일생을 쏟아 붓는다.
물론 어느정도 경지에 오른 일명 ‘네임드 연금술사’들은 암암리에 그 이름이 알려져, 기업총수나 기사단장같은 거물급들과 직접 거래를 한다고 하지만.
"익명을 원하시면 거기 익명에 체크해주시면 됩니다."
세진은 천천히 신청서에 글자를 써내려갔다. 효능은··· 치유와 재생.
헌데 별안간, 옆에서 그를 곁눈질하던 종업원이 흠칫 몸을 떨었다.
세진이 의아해하며 바라보자, 그는 무안한 듯 뒷목을 긁적이며 변명했다.
“아··· 죄송합니다. 재생은 그리 흔치 않아서.. 회복재생 말하시는거죠? 일단 그 ‘재생’이 맞으면 효력이 아주 조금이라도 대개 중하급 이상 판정은 받거든요. 거기다가 치유까지 있으니··· 하하하. 부작용만 없으면 상등급은 확정이겠는데요? 요즘 상등급 매물이 없어서 기사단이랑 병원에서 많이 걱정했었는데······다, 다행이네요.”
세진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부작용은 아마 없을 것이다. 약재와 검치가루를 거의 나노그람단위로 세심, 정확하게 배합한 엘리트고블린의 손재주는, 실로 완벽이란 단어조차도 부족할 정도였으니까.
“다 됐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혹시 포션의 샘플은 있으십니까?”
세진이 신청서를 건네주자, 종업원이 물어왔다.
“샘플이라기보단, 완제품이 있습니다.”
그는 로브의 품에서 포션이 담긴 유리통을 꺼내보였다. 유리통에서 비쳐나오는, 포션의 찬연한 푸른빛무리가 넓지않은 범위에 아른거렸다.
“······”
그리고 그 순간 종업원은 말을 잃었다. 영롱한 자태를 바라보며 한참동안 생각을 잃은 끝에, 그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반응은 침을 꼴깍 삼키는 것이었다.
치유와 재생, 이 두가지 효능이 결합된 물약은 초보연금술사는 결코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나 이 찬란한 빛을 발하는 푸르고 투명한 액체는 확실하다. 굳이 심사를 하지 않아도, 판정을 하지 않아도, 이건 ‘치유와 재생 그 자체의 포션’이다.
“···저···잠시만요.”
그리고 이런 물건은 자신의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치유효능이 있는 포션은 다른 포션보다 훨씬 가치가 높다. 당연하게도, 기사나 사냥꾼같이 몬스터와 부대끼며 살아가는 직종은 물론 평범한 일에 종사하는 민간인들도 필요로 하는 포션이기 때문이다.
“아뇨, 전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에, 세진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종업원이 안절부절한 표정이 되어, 그의 어깨를 붙잡아 의자에 다시금 착석하게 만들었다.
“자,자자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잠깐만요!! 지금 곧 책임자님이······”
직원은 간절했다. 알케미하우스의 실상은 치열한 경쟁과 철저한 성과로 얼룩진 스트레스집단이다.
전국에 있는 스무 여개 알케미하우스는 보조금을 위해 서로 간에 피를 튀기며 성과경쟁을 하는 관계, 그리고 그 성과는 어떤 포션이 어느 지역의 하우스에서 나왔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만약 좋은 포션이 매물로 나왔을 경우, 기사단은 물론 포션을 필요로 하는 다른 여러 단체들과의 기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으니.
그래서 직원은 세진을 놓치지 않으려 필사적이었으나, 세진은 단호했다.
“심사를 위해서는 몇 방울 정도면 괜찮을 테니, 한 세 방울 정도만 흘려 놓고 가겠습니다. 나중에 심사가 완료되면 다시 찾아오면 되잖습니까.”
“아, 맞는 말이시긴 한데······ 저, 그러면 지장은, 지장은 찍으셨나요?”
익명을 신청한 연금술사는 ‘지장’으로 따로 관리된다. 그래서 연금술의 집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연금술사의 이름이나 신상은 몰라도, 그 사람이 어떤 포션을 제조했는지는 알 수 있다.
“네. 찍었습니다. 30437이라는 번호가 푸르게 퍼지더군요.”
이 알케미하우스에서만 30437번째 신청서라는 뜻이다. 시중에 풀려있는 포션의 종류는 채 1000개도 안되니, 이 등급심사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연금술사들이 좌절을 겪었는지는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었다.
“···네. 그럼··· 나중에 꼭 찾아와주십시오! 꼭 저희에게로요!”
종업원은 허리를 숙이며 크게 소리쳤다. 내부가 울릴 정도였기에 주변사람들이 그쪽을 힐끗 쳐다봤지만, 이미 이 바닥의 생리가 익숙한 그들에겐 그저 가벼운 일례행사 수준일 뿐이었다.
“아, 예. 혹시 샘플을 담을 시약병이 있으신가요?”
그의 말에 종업원이 부랴부랴 움직여 시약병을 가지고왔고, 세진은 그 자그마한 병에 고작 세 방울 분량의 포션을 흘려넣고서 연금술의 집을 나섰다.
*
시내는 여러 소리들로 가득했다. 오고가는 많은 인파의 뒤엉킨 대화소리를 비롯한 도시의 각종 소음들. 어느새 산속의 고요에 익숙해진 세진은 그것들이 잘 적응이 되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 여러 소리들 가운데서도, 특히 그의 귓가에 특별히 다가오는 음성이 하나 있었다.
-김유린 기사님, 바로 2주 뒤가 고위기사 승급식인데··· 지금 심정이 어떠신가요?
전자기기 판매점에서 전시해둔 팔찌형 홀로그램 TV에서 흘러나오는, 한 리포터가 김유린을 인터뷰하고있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화면속의 그녀는 그때 세진을 바라보던 눈빛, 얼굴과는 전혀 다른 차가움이었다.
-나쁘진 않아요.
-···예? 아, 하핫, 아하하하하. 그렇겠죠? 당연히.. 하하하. 나쁠리는 없죠 하하하!
무안할 정도로 짧은 대답를 리포터가 웃음으로 겨우 무마했다.
세진은 그걸 보며 피식 웃었다. 그는 그녀가 왜 저러는 지, 이유를 알고 있었다. 카메라 울렁증이라나 뭐라나.
-그.. 그럼.. 다음질문으로 넘어가죠. 아, 이번 김유린 기사님께서는 남자들이 뽑은 아름다운 기사 1위로 선정되셨는데 기분은······
리포터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유린의 맑은 눈빛에 제대로 말려들어, 잠시 말문이 멎었다. 극히 평범한 눈길이었지만, 유린의 외모가 그것을 비범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나쁘진 않으시겠죠? 아 그게··· 그러니까··· 뭐였더라..
가까스로 입을 연 리포터는 잠시 횡설수설했지만, 그러나 프로정신을 발휘하여 금세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다른 질문을 건넸다.
-아, 맞다. 그러면 혹시 유린씨는 이상형이 어떻게 되시나요? 아닌 게 아니라, 요즘 유명한 남기사분들은 대부분 유린씨를 이상형으로 꼽으셨거든요.
-···이상형이요?
-네, 네.
유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화면을 넘어 이 회색빛 길거리 마저도 화사하게 물들이는 듯한, 짧지만 너무나도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에 리포터가 잠시 넋을 잃었고, 유린은 얼굴에 웃음기를 잃지 않은 채 대답했다.
-고블린같은 남자가 좋아요.
-···예? 그게 무슨···
-대신 지성이 있어야 하고, 선해야해요. 그러니까 말하고, 착하고, 능력도 좋은 고블린인거죠.
-아···
그녀의 비현실적인 말에, 리포터는 대충 ‘제 이상형은 없어요’ 비스무리한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그렇군요. 예. 다,답변 감사합니다. 역시 최연소 고위기사님답게 이상형도 특별하시군요.
그러나, 세진은 아니었다. 그는 얼굴에 만면한 미소를 띄며 화면속의 김유린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곧 발길을 돌려 상점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아, 예. 저 밖에 있는 팔찌형 TV, 얼마인가요? 아 그것보다, 산속 깊은 동굴에서도 터지나요?
* * * *
알케미하우스의 직원들은 대개 연금의 길을 걷다 포기한 반(半) 전문가들이지만, 책임자만큼은 제대로 된 연금술사여야만 한다. 적어도 세 개 이상의 포션을 베스트셀러로 등극시켜야 이 알케미하우스를 직접 차리거나, 스승의 후계로 눌러앉을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서른 하나의 꽤 이른 나이로 책임자의 지위에 오른 연금술사, 다크엘프 ‘하젤린’은 오늘의 방문자가 놓고 간 포션의 샘플을 유심히 관찰하며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야. 이건 볼 필요도 없잖아. 판정공정도 필요 없겠어. 최소 중상. 최대 상. 나도 이렇게 밝고 투명한 포션은 요 근래들어 이게 처음이네. 근데 이걸 심사가 필요하다고 그냥 보내버려?”
“죄송합니다···면목이 없습니다..”
“아니 뭐 일단 샘플까지 줬으면 우리랑 같이 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죄송할 것 까지는 없고. 그래서, 이름이 뭔데?”
“아 그게··· 조금 이상해요.”
직원은 세진이 작성한 신청서를 읽으며 살짝 머뭇거렸으나, 곧 더듬더듬 거기에 적혀진 글자를 읊었다.
“’고블린의 선의’, 이게 이 포션의 이름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