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고블린의 선의 (2)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볍고 모나지 않았던 빗방울들은 곧 그 세를 험악하게 불려나가, 어느새 산속의 개울물이 넘쳐흐르고 웅덩이에 빗물이 고이게 만들었다.
'조금 오래 걸릴 것 같네'
그리고 그 빗줄기를 바라보던 세진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고민이 많았다. 뒤에서 자고 있는 여자에게 무슨 설명을 해야할지. 또 어떻게 변명해야 살해당하지 않을 지. 고위기사를 목전에 둔 상급기사면 고블린같은 하급 몬스터따위는 정권 한방에 소멸시킬 수 있을테니.
“···끄응···.”
그러나 고민과 번뇌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치유를 끝낸 지 고작 한시간도 채 안되었는데, 김유린이 의식을 되찾아가는 듯한 앓는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가엾은 고블린은 그 가벼운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 부랴부랴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괜찮······”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행동을 멈춘다.
‘고블린은 인간의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평범한 고블린’이었다면 인간을 살려주지도 않는다. 언제나 식량이 부족한 고블린은 음식을 가릴 여력따윈 없으니.
“······으..?”
고통에 허덕이며 몸을 뒤척이던 김유린이 드디어 눈을 떴다. 게슴츠레 열려진 눈꺼풀의 틈새로 돌천장이 보였다. 잠시 그 천장을 바라보며 고요히 생각하던 그녀는 곧 몸을 번쩍 일으켰다.
“읏!”
그러나 그 탓에 아직 회복되지 않은 온 몸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녀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30분전까지만 해도 찢겨져 있던 복부를 어루만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검치대호의 손톱이 자신의 복강을 사정없이 파헤쳤는데. 그 끔찍한 고통이 아직도 선연한데. 지금 만져지는 복부는 아무런 이상도 없이 멀쩡했다.
“괜찮아?”
헌데 갑자기, 어디선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리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텔레포트 스크롤들이 모두 먹통이어서 혹시 몰라 챙겨온 긴급용을 사용했음에도, 그것마저도 좌표가 잘못 잡혀 이대로 꼼짝없이 죽는구나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근처를 지나가던······
“아 나는······”
고블린이 있었다.
게다가 인간의 언어, 그것도 한국어로 말을 한다.
몸을 일으켜 감사인사를 하려했던 김유린은 이 이해못할 상황에 머릿속이 하얗게 명멸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앞에 있는 고블린이 계속해서 뭐라 입을 움직이고 하고 있기는 한데, 들리지가 않는다. 아니, 뇌가 거부한다.
“······뭐···뭐지?”
유린은 후유증으로 헛것을 보는건가 싶어 눈을 꾹 감고 다시 떴다. 그래도 여전히 그대로길래, 눈을 비비고 다시 떴다.
“어······”
그러나 역시 그대로다.
“···나 뭐야? 미친거야?”
그러더니 맹한 소리를 내뱉는다.
"아니. 나 진짜야."
그리고 세진도 답답했다. 아닌 게 아니라, 고블린의 언어구사능력이 굉장히 후졌기 때문이다. 쓸모없는 것 까지 닮아오는구나 진짜.
"와 진짜 말하네. 나 이미 죽은건가?"
유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 이후로 그녀가 이 상황을 모두 받아들이기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
세진은 불신의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김유린에게 사력을 다해 변명했다. 잘못하면 한줌의 재가 될 것 같았기에.
세진의 변명은 간단했지만 스토리가 있었다.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고블린과 달리 영특했고, 언제나 간사하기만 한 고블린의 삶에 회의를 가지고 뛰쳐나와, 한 사냥꾼과 만나 불완전하게나마 인간의 언어를 배웠고, 습성을 익혔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그 사냥꾼은 불행한 사고로 말미암아 죽었고.
구체하고 세세한 설정과 플롯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다행히도 김아린은 그의 말을 그렇게 깊게 의심하지는 않았다.
일단 무엇보다도 고블린이긴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고, 몬스터들의 생리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것이 가득한 미지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형체로 변장하는 몬스터도 있는데, 어찌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몬스터가 없으랴.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어쨌든, 구해줘서 고마워.”
한층 태도가 부드러워진 유린이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상냥한 손길에 세진의 몸이 바싹 굳었다. 그리고 유린은 그것이 웃겼는지,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핫! 신기하구나, 너···읏.”
그러나 아직 유린의 몸상태는 마냥 웃어도 될 정도는 아니었고, 그녀는 찌르는 듯한 통증에 배를 움켜쥐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세진이 미리 만들어뒀던 진통과 회복효과가 있는 물약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먹으라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린은 방긋 웃으며 그 물약을 들이켰다.
“···와?”
그 즉시 유린이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신기하게도, 정말 거짓말처럼 고통이 싹 가셨다.
“너 능력이 되게 좋구나!”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앞에 있는 고블린의 머리를 다시금 쓰다듬어주었다. 왠지 좋아하는 것 같길래.
“고마워. 진짜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몬스터와 부대끼며 살았던 기사들에게, 고블린이란 오직 안좋은 기억의 덩어리였다. 저주와 독, 그것은 어떠한 저항력도 없는 인간기사에게 가장 까다로운 두가지 요소였으니까. 물론 고블린들의 흉측한 외모도 한몫했다.
그러나 지금, 김유린에게 자신의 앞에 있는 생명체가 고블린이라는 사실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지성이 있는 이 고블린은 너무 착하고, 또 귀여웠으니.
“···아?”
그렇게 고블린을 쓰다듬던 중. 유린의 팔에 매워져있던 팔찌가 별안간 진동했다.
슬쩍 보니 기사단이다. 임무시간이 끝났음에도 복귀가 없어 기사단이 연락을 보내온 듯 했다.
"맞다 임무.."
임무는··· 아쉽게도 실패했다. 그것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할 정도로 처참하게.
하지만 천재일우의 기회로 이 고블린을 만나 구사일생을 하였으니, 이제 오히려 그것이 기회가 되었다.
‘텔레포트 스크롤을 건드린 사람은 증거가 있으니 나중에 조사하면 찾아낼 수 있을거고, 나를 사지에 밀어넣고 도망간 기사는 유종연과 김사랑··· 아니 2팀 전체라고 보면 되겠네.’
2년 뒤면 기사단장의 임기가 끝나고, 김유린의 아버지 김현석은 기사단장의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한다.
그리고 그 다음, 2년후의 차기 단장의 유력한 후보는 현재 부기사단장 ‘오종혁’이 아닌 ‘김유린’이었다. 요즈음은 그걸 불만스럽게 여긴 부기사단장 라인과 김유린 라인간의 알력싸움이 음지에서 계속해서 벌어지는 상황이고, 이 사태는 그 알력싸움이 극에 달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아무리 고위기사 승급식이 당장 다음달이라서 마음이 급했다 하더라도, 이런 금수같은 짓을 해야만 했을까. 유린은 이를 으득 깨물었다.
고위기사도 혼자서는 버겁다는, 4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살아온 검치대호굴에 진입하는 척 해놓고 뒤로 내뺀 여섯 년놈들. 그리고 7개의 텔레포트 스크롤과 마나갑옷, 심지어 무기까지 모조리 작동되지 않게 만들어 놓은 불특정 다수.
“고마워. 덕분에 일망타진이 가능하겠어.”
그러나 끓어오르는 화는 훗날을 위해 삭혀두자.
김유린은 미소를 지으며 고블린의 머리를 다시 한번 쓰다듬고서, 팔찌에 음성을 흘려보냈다.
“상급기사 김유린. 곧 복귀······”
그러나 유린은 말을 잠깐 멈추고 고블린을 힐끗 바라보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말을 바꿨다.
“아니, 한 세시간 정도 후에 복귀합니다. 비가 너무 많이오네요. 그래서 산사태가 나서 동굴에 갇혀버렸어요.”
*
세진과 유린은 그 세시간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나누었다기 보다는 역할이 명확했다.
고블린폼으로는 언어를 이어가는 것 조차 버거웠던 세진은 자연스레 듣는 쪽, 유린은 말하는 쪽.
"하아··· 어떻게 27살 먹을 때 까지 연애를 한번도 못해볼 수가 있지··· 아, 근데 이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야."
'..뭐 이렇게 발랄해? TV에서는 목소리도 낮고 엄청 차갑던데.'
세진은 예상과는 다른 그녀의 털털하고 수다스러운 모습에 굉장히 의아해했다. TV에서 확인했던 그녀는 분명 말이 많다기보다는 차갑고 이지적인 쪽에 가까웠는데···
“나는 솔직히 인형같은 평범하고 귀여운 선물이 좋거든? 근데 남정네들은 다 나를 ‘기사’라는 단편적인 면만 보고서는 검, 도, 마법장비같은 이상한 물건만 선물해주니 내가 연애를 할 수 있나. 게다가 지들이 잘못해 놓고, 까이면 내 눈이 높다고 소문내서 나만 이상하게 만들고······”
그래도 세진은 만족했다. 어느 누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기사님의 사적인 푸념을 들을 수 있겠는가.
그는 적당히 장단을 쳐주고, 어려운 단어가 나오면 적당히 모르는척 하며 그녀의 얘기를 세시간동안 끝끝내 들어주었다.
아니, 사실은 그녀의 얼굴을 관찰했다. 어떠한 찬사마저도 진부하게 만들 그녀의 아름다움은 세시간동안 계속 바라봐도 질리지가 않았으니.
그리고 마침내 약속했던 세시간과 함께 비가 그치고, 하늘은 태양빛과 함께 맑아졌다.
“나중에, 시간 나면 또 올게. 좀 늦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진짜 제대로 된 물건을 선물할테니까.”
짧은 만남의 끝을 목전에 두고, 유린이 연신 뒤돌아보며 머뭇거렸다.
아마 그녀는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보답한 물건이 시원찮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의 감정이 더욱 큰 듯 했다.
그러나 세진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고마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유린은 세진에게 선물로 검치대호의 이빨, 검치를 주었다. 그녀는 과연 검치대호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지 않았고, 기다란 검치 중 하나는 부러트리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세진이 고블린의 지식을 얻지 못했던 때라면, 이 검치는 조금 비싼 쓰레기 수준이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검치는 그 자체가 마나석이고, 동시에 약재다. 그래서 이 검치에 간단한 재료만 세심히 배합하면 다양한 효과의 포션을 10개도 더 만들 수 있다.
당장 생각한 활용방법만 해도, 신체의 위력을 강맹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는 포션을 만들어 사냥을 할 때 활용한다거나, 방금 김유린에게 먹인 포션을 만들어 시중에 판매하는 등 다양하고 또 다양하다.
게다가 포션을 제조하여 판매하는 경우는 주위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 더욱 좋다. 원칙적으로 개인이 제조한 포션은 성능이 확실하고 부작용이 없다고 판명되면 ‘익명’으로 판매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게 적어도 5억은 넘게 될거란 말이지.’
회복효과가 있는 포션은, 포션 취급도 안해주는 응급물약만 해도 개당 20만원을 호가한다. 게다가 뉴스에서 각각 인간, 다크엘프, 고블린이 만든 포션을 비교해봤더니, 동재료대비 성능은 고블린쪽이 가장 좋았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고블린이지. 위대한 고블린.’
이거면, 돈을 벌어서 장비도 사고, 강원도에 집도 살 수 있다.
“고마워. 잘 가.”
세진은 기쁨으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김유린에게 인사했다. 때마침 그 둘 사이로 투명한 햇볕이 밝게 가라앉았다. 이별하기 좋은 날씨다.
“···그, 그래! 너도 잘 있어! 너무 위험한 곳은 가지 말고!”
그렇게 말하는 유린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 떨리고있었다. 세시간동안 이상하리만치 많은 정을 주었기 때문일까, 저 해맑은 모습에 괜히 슬퍼졌다.
그러나 더 오래 있을 수는 없다.
유린은 표정을 굳힌 채 뒤돌아서서, 무거운 발을 애써 움직였다.
“어! 너도 조심해!”
등 뒤에서 들려오는 평범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성이 있고 온순한 몬스터와 교감한 특별한 오늘을 평생동안 잊지 못하리라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