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218화 (218/220)

에필로그 2

“…….”

사람들이 정말 모를 거 같냐고 묻고 싶다. 말레드레드는 그를 난감하게 쳐다보았다. 지금 나가면 다들 고개를 확 돌리며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전부 알고 있다고 행동으로 말할 것이다. 말레드레드는 자신이 세상의 시선에 제법 무덤덤한 여자라고 생각하지만 이 일을 태연하게 받아들일 만큼 무심한 성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에 비해서, 평소에 진중하고 고지식한 아론은 이게 당연한 일인 양 아무렇지 않게 굴었다. 그는 말레드레드와 어떤 사이임을 드러내는 것을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마치 그게 세상에 공포해야 하는 일인 양.

‘설마 일부러……?’

말레드레드는 흔들리는 눈으로 아론을 바라보았다. 시종이 가지고 온 망토를 손수 입혀 주는 아론은 여전히 자신에게 다정했고 상냥했다. 보고 있노라면 눈이 멀 것처럼 화사해서 아는 얼굴인데도 가슴이 떨려 올 정도였는데, 요즘은 황태자라는 지위까지 더해져 그의 매력이 날로 높아졌다.

고위 귀족들이 괜히 아론만 보면 안달 난 게 아니다. 손수 자제들의 손을 끌고 찾아와 인사시키려 애쓰는 이들 중에는 혼사의 꿈을 꾸고 있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아론은 아름다운 공녀, 미모의 아가씨, 대부호의 고명딸, 누구에게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그저 정치적으로 대했을 뿐이다.

정치를 해 본 적 없는 성기사인데도 핏줄은 역시 무시 못 한다는 듯이 그는 귀족들을 빠르게 자신의 진영으로 포섭시켰다. 그의 피에 녹아 있는 군주와 협상가로서의 자질을 알아본 것인지, 귀족들은 그와 친분을 쌓으면 그에게 폭 빠져 충성을 노래하는 것이다.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물론 황제의 상태도 아론의 그런 정치적 행보를 돕는 데 도움이 되었다. 마왕의 마기에 당한 그녀는 여전히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누워서 가신들의 보고를 듣고 정사를 돌보고 있었다. 제국을 대표하는 건 그녀였지만 외국 사신이나 가신들을 만나서 상대하는 건 아론이 도맡을 정도로, 그녀의 상태는 차도가 없었다. 오히려 악화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황태자로서 아론의 역할은 더욱 커졌고 귀족들이 아론에게 거는 기대도 높아져만 갔다. 아론은 티를 내지 않았지만 그가 곧 황제의 자리에 오를 거라는 소문이 이미 황성 전체에 자자했다.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어서 들어가시죠.”

황제의 가신이 허리를 숙이며 대기실을 빠져나온 아론에게 말했다. 그의 몸에서 은은한 정사의 향이 풍겨 나왔지만 모른 척할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가신은 그의 곁에 선 말레드레드를 쳐다보지 않은 채로 공손하게 그의 대꾸를 기다렸다. 아론은 이윽고 말레드레드에게 먼저 말했다.

“대신관을 만나기로 했죠? 그는 황성 중앙 정원에 있을 거예요. 폐하와의 대면이 끝나면 저도 거기로 갈게요.”

“……알겠습니다. 근데 전하, 말을 놓으세요, 다들 쳐다봅니다.”

“황제가 되면 놓겠습니다. 아무튼 이따가 봐요.”

“네.”

말레드레드는 쳐다보고 있는 눈들을 의식하며 순종적으로 무릎을 굽혔다. 망토를 썼는데도 그녀의 동작은 우아하기만 했다. 저 방에서의 방금 있었던 난잡한 정사가 거짓말인 마냥.

아론은 그게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론 불만이었다. 다른 남자가 그녀에게 반하기라도 한다면, 저 아름답고 고운 품행을 지닌 그녀에게 빠지기라도 한다면…….

아론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어두운 제 속마음을 감추며 입가를 올렸다.

“참. 저 말고 다른 남자에게 눈길을 주면 안 돼요.”

“…….”

“하, 하. 전하께서는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어서 들어가시죠!”

측근이 얼른 끼어들며 재촉했다. 말레드레드는 살짝 인상을 썼다. 농담 같지 않다. 특히 저 어둡고 욕망 가득한 눈을 보고 있노라면.

‘……괜찮겠지?’

마왕이 나타나지 않은 지 벌써 100일. 아론과 함께 황성에서 살다 보니 시간을 세는 것도 잊어버린 그녀였다. 이런 평화의 시대가 이어진다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론 불안감이 들었다.

그녀는 소녀와 함께 생존자들의 안식처를 확보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아론이 황태자로서의 국정을 돌보는 데 바쁘다면 그녀는 괴생명체의 인식을 바꾸어 사람들 사이에 정착시키는 데 바빴다. 그녀가 그 일로 너무 밖으로 돌아다니자, 아론은 그녀가 황성에도 업무를 볼 수 있도록 괴생명체 전담 행정 부서를 신설할 정도였다. 그 때문인지 괴생명체에 대한 인식도 제국에서 빠르게 바뀌고 있는 상태였다.

‘이대로 마계와 계속 연관이 없어야 할 텐데.’

바쁜 와중에서도 불쑥 올라오는 불안감이 있었다. 마왕이 생각보다 힘을 빨리 회복하게 되면 어찌 되는 걸까. 그런 걱정에 초조해졌다가, 아론이 나타나기만 하면 그런 걱정은 희미해져 사라지고 만다.

아론은 그만큼 그녀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단순히 정사 때문만이 아니었다. 황태자의 신분으로 그가 벌이는 일은 엄청났다. 제국의 행정권을 갖자마자 그는 영주들을 동원해 고대 물건을 파내기 시작했다. 전국 규모로 황궁 앞에 설치된 석조 입구의 재료 같은 것을 찾았다. 그리고 찾은 재료들은 가공해 곧바로 돌기둥으로 만들었다. 마기를 방지하는 강력한 보호막인 그것을 제국 전체에 설치하면서.

그렇게 마기가 침입할 수 없는 영역을 넓힌 그는, 법을 새롭게 제정해 마계와 관련된 서적을 모두 불태웠다. 마족 소환 금지법도 강화했다. 호기심에라도 소환을 하게 되면 가문 전체가 몰살이라고 봐야 할 정도로 강력하게 말이다.

그리고 통수권을 마지막으로 갖게 되자, 그는 기사와 성기사를 하나로 합쳤다. 군사력이 일원화된 체제를 자신의 아래 두고서 그는 곧 제국 전체를 돌보기 시작했다. 작은 마을에도 항시 성기사가 머무를 수 있는 제도를 신설하고 마기나 마물 출현 시 직통으로 신고하는 체계도 확보했다.

아론은 의도한 대로, 아니, 의도한 것보다 어쩌면 더욱 철저하게 제국을 변화시켰다. 제국은 누가 보아도 강력한 신성력 보유국이었으며, 마기에 대항하는 제국이었다. 마왕이 사라지고 나서 더욱 강력해진 제국의 모습에 외국은 모두 앞다투어 감탄하고 있었다. 황태자가 즉위하고 나서, 제국은 더욱 위대해졌다고 칭하면서.

‘참으로 철저하단 말이야.’

아론이 재위하는 동안 마족을 보게 될 날이 있을까? 말레드레드는 풍부한 녹색으로 찬 정원을 보며 한가로운 기분에 젖었다. 고된 정사로 조금 피로한가, 어쩐지 조금 몸이 찌뿌둥하다고 생각됐을 때 파루가 저를 반겼다.

“오셨군요.”

그는 따스하게 웃으며 말레드레드를 맞이했다. 황태자의 도움으로 대신관의 자격을 다시 얻은 그는 정복이 조금 불편한지 목 부근을 느슨하게 늘린 상태였다. 그는 말레드레드에게 친근하게 농담을 던졌다.

“조금 더 늦게 오셔도 좋을 뻔했습니다. 여긴 아름다운 나무와 꽃을 구경하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거든요.”

“죄송해요. 전하를 잠시 뵙고 오느라고…….”

말레드레드는 민망함에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파루는 껄껄 웃었다.

“여전하시군요. 그분은 정말 한결같습니다. 오로지 말레드레드 한 사람밖에 안 보이는 것이요.”

“…….”

“그런 분이 제국을 통솔하는 지배자가 된다니. 한편으론 걱정도 되었습니다. 노파심일지 모르겠지만 모든 게 한 사람을 위한 정책이 될까 봐요.”

말레드레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파루의 걱정이 괜하게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모든 것은 마왕을 막기 위한 것. 말레드레드를 뺏기지 않기 위한 것. 그녀마저도 그리 느낄 때가 있으니까 말이다. 어찌 됐든 파루는 자연스럽게 그 불안을 넘기는 말솜씨가 있었다.

“하지만 제 오판이더군요. 오히려 제국이 평안해졌습니다. 황태자께서 즉위하시고 제국이 더 살만해졌다는 이야기가 전국에서 들려옵니다. 강력한 황권은 난립하던 신권을 누르면서, 부정부패를 막는 효과가 있으니까요. 저는 그래서 다시 한번 전하를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분명하게요.”

“저어, 대신관님.”

“네, 제가 다른 이야기를 너무 했나요? 그러고 보니 부탁하신 게 있으셨죠. 괴생명체도 신관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생기길 바란다고요. 일단 대신관 사이에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아주 나쁜 분위기만은 아닙니다. 찬성하는 이도 있으니까요.”

말레드레드는 그것만 해도 어디냐는 듯이 안도했다.

“그 제안 자체가 상징적인 의미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파루 대신관께서 신관들께 말씀해 주셨다니 한결 부드럽게 전달되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파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역할을 해냈다면 기쁠 뿐입니다. 사실 괴생명체 중에서도 신관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아주 큰 변화라고 봅니다. 사람들이 괴생명체들이 살아가는 것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편견을 없앨 소지가 커지니까요.”

“제 의견에 기꺼이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을요. 제가 해야 할 일을 앞장서서 해 주셔서 제가 더 고마울 뿐이죠.”

파루는 짧게 목 인사를 했다. 말레드레드는 얼른 그에 반응해 더 허리를 숙였다. 파루는 소리 없이 웃었다.

“바쁜 와중에도 이 일까지 돌보느라 수고가 많습니다.”

“네?”

“이야기가 들리더군요. 조만간 황태자께서 제위에 오르실 거라고요.”

“……아직 확정은 아니에요.”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모쪼록 그날이 기대되는군요. 분명 말레드레드도 황후로서 미소 짓고 있을 테니까요.”

“그게 쉽게 될는지……. 전 평범한 사제인걸요.”

말레드레드가 멋쩍게 말하자 파루가 고개를 저었다.

“평범하다니요. 마왕과 대적한 사제죠. 괴생명체들도 품으려 하는 진정한 사제.”

파루는 작은 눈을 크게 뜨며 강조했다.

“그리고 전하라면 그 일이 가능하도록 만들 겁니다. 정치에 둔한 저라도 알겠어요. 그분이 얼마나 의지와 실천력이 강한 분인지.”

“……그래요?”

“네. 아주 무서울 정도입니다. 귀족들과 신관들을 포섭해 가는 속도와 철저함이요. 혀를 내두를 정도죠.”

“아…….”

“그분을 적으로 돌리면 무서울 거란 걸 모두가 암묵적으로 느낀 모양입니다. 다들 충성스럽게 따르는 걸 보면요. 황제가 되어서도 그분을 적으로 삼는 자는 없을 겁니다. 바보가 아니라면요.”

파루는 그렇게 말하고 빙그레 웃었다.

“그러니 몸 챙기면서 얼른 좋은 소식 들려주세요.”

“좋은 소식이요?”

“두 분 사이에 아이가 있다는 소식이요. 축복을 제 손으로 내려 주고 싶거든요.”

“아, 네…….”

말레드레드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태연하게 받아칠 수 없는 덕담이었다. 파루가 떠나자 말레드레드는 저도 모르게 황성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가 있을 장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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