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213화 (213/220)

213화

“그대는 가야 해.”

마왕은 흔들리지 말라는 듯이 말했다. 나는 눈물에 젖은 눈으로 마계의 군주를 바라보았다. 그의 몸에서 올라오는 마기가 더는 정상적이지 않았다. 나를 할퀼 정도로 난폭했다. 나는 그의 위쪽에 있는 차원의 문도 폭발할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왕은 어서 이곳에서 벗어나자는 듯이 재촉했다.

“어서 손을 잡아. 내게 순종해.”

“…….”

“계약을 이행해.”

그는 내가 적극적으로 잡아 오길 바라고 있다. 자신이 강제해서가 아니라 내 의지로 그런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는 듯이.

나는 아론을 바라보았다.

“잠시만요…….”

마왕의 표정이 불편해졌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아론에게 달려갔다. 아론은 꿈틀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상체를 세우지도 못했다. 나는 울상으로 웃었다. 이상한 모습이란 걸 안다. 하지만 마음이 한없이 심란했고 기뻤기 때문이다. 그를 떠난다는 것이 전자의 감정을, 그가 한결같다는 것이 후자의 감정을 불러일으켰으리라. 이렇게 슬픔과 행복의 감정을 동시에 안겨 주는 것이리라.

나는 그를 애틋한 눈으로 응시했다.

“아론. 난 정말 괜찮아. 그저 마왕을 따라가는 거야, 죽는 게 아니라 다른 존재가 되는 거야…….”

“…….”

“그러니 내 걱정 말고…….”

너도 잘 지내. 나는 작별의 인사를 온전히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말 대신 눈물이 솟구쳤다. 주체 없이 흐르는 눈물은 곧 뺨을 넘쳐흘러 턱으로 떨어졌다. 아론은 그런 나를 빤히 응시했다. 나는 흐느끼면서 말했다.

“잘 지내야 돼…. 아프지 말고…, 다치지도 말고…….”

건강하게. 나는 물기 젖은 눈으로 마저 말을 끝냈다. 간신히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들자, 그가 천천히 손을 뻗는다. 피와 상처로 가득한 손은 뜻밖에 내 목에 닿았다.

반짝.

그의 작은 빛. 환한 온기가 상처 난 목을 감싼다. 상처를 메우고 아픔을 희석한다. 저를 위해 아껴 두어도 모자랄 판에, 어찌하여 나를 위해서 이토록 힘을 발휘할까.

“……하고 싶은 대로.”

아론이 입술을 달싹였다.

“하면서 살아요.”

“……!”

“말레드레드…….”

그의 눈빛은 확고했다. 죽음과 위기를 앞에 두고서도. 제 신념을 잃지 않았다.

“전 그저 쫓아갈 테니……!”

나는 말을 잃었다. 몸과 정신이 모두 그에게 관통되어서 아연해지고 말았다. 나는 멍해진 채로, 뒤로 돌아보았다. 마왕은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분명히 깨달았다. 어둠에 휩싸인 그와 어둠과 빛을 모두 가진 내가 절대 같아질 수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나는 인간이며,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사제로서, 욕망에 가득한 여인으로서 살아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살아가기를 원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나는 눈물을 닦으며 그를 보았다.

“어떡하죠……? 계약을 이행할 수 없다면.”

“무슨 말이지?”

“가고 싶지 않아요…….”

나는 흐려진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하지만 마계로 못 가겠어요……. 마족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 당신에게 종속되어 마계에서 살아가고 싶지 않으니까…….”

“갑자기 말을 바꾸다니! 공포에 미쳐 버린 건가, 아니면 겁을 상실한 건가!”

으르렁거리는 마왕에게 나는 울상을 짓고 말았다. 그의 분노를, 기가 막힌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둘 다 아니에요. 그냥…… 제가 뼛속까지 어떤 존재인지 깨달았을 뿐이죠…….”

“그래서 이대로 죽더라도 계약을 그르치겠다고?”

“네…….”

그가 나를 저주하며 죽이더라도, 나는 나답게 살겠다. 더는 고민하지도 번민하지도 않겠다. 나는 머릿속이 맑아진 기분으로 그를 응시했다. 두려움이 솟구쳤지만 그보다 더한 확신과 용기가 나를 휘감고 있었다. 아론이 준 깨달음이, 오래전부터 느껴 온 나라는 존재를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다.

“당신을 따라가지 않겠어요.”

“인간들이.”

마왕의 목소리가 불안했다. 그의 주변으론 광포한 마기가 마치 꿈틀거리는 뱀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제멋대로에 변덕스럽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움찔. 나는 두려움에 물러나고 말았다.

“그대는 그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형태군!”

마왕은 낮고 음험한 목소리로 외쳤다.

“계약 불이행은 죽음뿐이라는 걸 모르는가?”

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마왕은 순순히 그에 응하겠다는 나를 보면서 더욱 분노했다.

“그대의 죽음만으로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거야! 수십 년이 걸려서 힘이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좋아! 나는 완전해져서 인간계를 불태울 거야. 피와 죽음으로 덮어 버릴 거야. 인간들의 피가 대지에 고여 강이 되도록 만들어 주지! 그대가 아꼈던, 혹은 밟았던 곳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거야!”

나는 그의 살기에 손을 꽉 쥐었다. 참담할 정도로 잔인한 선전포고였다. 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그는 경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바이다. 마왕이 지금 물러나도 언젠가 맹공격을 다시 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게 언제가 되는지가 문제였을 뿐.

나는 울먹이는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지금도 우리 세상을 파괴하려 했잖아요! 인간을 모두 없애려고 했잖아요! 내 몸을 원한다고 외치면서도, 왕으로서의 임무도 다해야 한다고 말했죠! 정녕 모르겠어요……? 우린 우리 자신을 버릴 수가 없어요.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제가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당신도 버릴 수 없는 거라고요!”

“지금 마계의 왕인 나와 하찮은 인간인 자신을 비교하는 건가? 초월자를 상대로 설교를 하려는 건가?! 우리가 비슷한 사고를 한다고? 그대는 나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잠깐 유희의 상대로 택한 운 좋은 인간일 뿐이지!”

마왕의 힐난을 들으며 나는 가슴이 따끔거리는 걸 느꼈다.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그리고 기가 막힌지 피부로 느껴진다. 그의 마기로 전해진다. 그의 마기가 내 머리를 흔들자 코가 따끔하며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피…….’

나는 손으로 만져 보며 휘청거려야 했다.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다. 아마도 마기가 침투되고 있기 때문일까. 나는 간신히 입술을 움직였다.

“맞아요……, 운이 좋았을 인간일 뿐이죠……. 당신의 마음을 일부라도 얻었으니…….”

“…….”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전 결정했어요. 인간으로 죽겠다고…….”

마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무척이나 긴 시간처럼 느껴졌고, 견딜 수 없는 고통처럼 전해졌다. 나는 휘청거리다 못해 결국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고 말았다. 눈앞이 어른거린다. 바닥의 돌마저 제대로 인지할 수 없다니. 나는 지금 서서히 정신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마왕이 그때 내게로 걸어왔다. 그의 난폭한 마기가 갑자기 태풍의 눈에 들어온 것처럼 사라져있었다.

“그 때문인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은?”

“…….”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왕의 눈빛은 슬픈 듯 잔혹해져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느릿하면서도 차갑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재밌을 거라 생각했다. 성기사와 마왕을 오가는 사제라니. 그대를 가지면, 그 기사마저 능욕하고 비참하게 만들 거라 판단했는데. 내 오판이었군. 능욕당하고 비참해진 건 나뿐이니까.”

가슴이 쓰리다. 왜 가슴이 아려 오는지 모르겠다. 그가 비록 사악하고 무정한 마왕이었다고 하지만 내게는 온정을 베풀었고 애정을 주었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나는 미안함에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애를 써도 나오지 않고 가슴만 아파서 인상을 찡그려야만 했다. 마왕은 그런 내가 애처로운지 빤히 보다가 한 손을 들어, 내 뺨을 어루만졌다. 잠깐이지만 그의 손에 마기가 거두어지는지 가슴이 편해졌다.

“그대의 마음과 정신을 내가 너무 가소롭게 평가한 거 같군.”

“……?”

“그에 반면, 그는 그것을 높이 샀고.”

마왕은 고개를 들었다. 나는 말하지 않아도 그가 누굴 가리키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머리가 심하게 어지러울 때, 마왕은 내 뺨에서 손을 거두었다. 그러자 다시 목과 가슴이 불편해졌다.

“뒤늦게라도 오만했던 과거를 만회해야겠군.”

“무, 무슨…….”

나는 이상함을 느끼고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왕은 그런 나를 무정할 정도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살려 두면 더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던 오만함 말이야.”

“!”

나는 화들짝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흐려진 시야에는 붉은색과 검은색이 물에 풀어진 것처럼 보일 뿐이다. 마왕이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리듯. 나는 허우적거리며 팔을 뻗었다.

“아, 안 돼…….”

“그리고 그대는.”

마왕은 슬픈 듯,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이걸 기억하지 못할 거야. 자신이 무엇을 원했는지, 심지어 어떤 인간이었는지조차도. 룬으로 머리가 휘저어질 테니까.”

나는 그제야 그걸 나를 어떻게 하려는 건지 깨달았다. 나를 죽이려는 게 아니다. 자신의 애완동물을 이용해서 내 머리를 휘젓고 기억을 없애려는 것이다. 이런 완고한 나를 곁에 두기 위해서.

“아……!”

나는 그에게 저항하듯 손을 휘둘렀다.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그는 나를 떠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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