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토끼 마족은 보란 듯이 그녀의 상체에 팔을 휘둘렀다. 번쩍이며 갈퀴 같은 손톱이 움직였을 때, 황제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곧 그녀의 몸에서 투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들은 값비싼 장신구였다. 고대 시대부터 존재했을 마족 대항 도구가, 화려한 보석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다.
“죽일까요?”
토끼 마족은 아주 자연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황제는 그 말에 반응한 것처럼 몸을 꿈틀거렸다. 마왕은 관심 없다는 듯이 말했다.
“좋을 대로 해.”
그의 핏빛 눈은 내게만 꽂혀 있었다.
“어차피 인간들은 살려 둘 생각이 없었으니까.”
나는 그 말에 단검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칼끝을 살짝 목에 박아넣자 흐르는 피가 많아진다. 머리가 어질했고, 가슴이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생명이 그 틈새로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분을 어찌 태연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육체는 그를 알고 있는 듯이 거세게 저항했다. 가늘게 떨리며 단검을 놓치라 한다. 당장 이 무모한 행동을 그만두라는 듯이. 나는 손목까지 이제 심하게 떨려오기 시작해서, 다른 손으로 손잡이를 보조하듯이 잡으면서 그를 응시해야 했다.
마왕은 그런 나를 냉랭히 쏘아볼 뿐이었다. 나는 흔들리는 정신을 붙잡으며 말했다.
“돌아가요, 지금 당장. 당신의 수족을 모두 데리고.”
“…….”
“제가 아직 쓸모가 있다면 말이죠.”
마왕은 음험하게 나를 노려보더니 마침내 팔을 올렸다. 토끼 마족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왕이시여, 그건……!”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왕의 머리 위에 떠 있던 거대한 소환 영역이 바람의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내뱉기 시작한 게 아니라 무언가를 빨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물을 비롯해서 마족을 잡아들이는 것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근처에 있던 토끼 마족도 그 차원의 문으로 사라졌고,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던 마족들도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와, 왕이시여, 대체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왜……!”
허무하게 외친 그들은 그러나 답을 들을 수 없었다. 마왕은 내가 봐도 쉽지 않은 일을 하고 있었다. 차원의 문의 흐름을 역으로 바꾸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기가 대폭 줄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마왕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눈빛에서 흘러나오는 한 줄기 잔인한 빛. 나는 그제야 그가 수족만을 끌어들이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사제들, 간신히 저항하고 있던 성기사와 소환사도 소환 영역에 이끌려 공중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비명을 지르며 차원의 문으로 사라지는 것에 나는 절망하며 마왕을 바라보았다.
“일일이 구분해서 데려가기 귀찮군.”
마왕은 차갑게 비웃었다.
“끌려가서 살아 돌아올 수 있냐는 것은 물론 다른 이야기겠지만.”
나는 재빨리 소환의 영역을 바라보았다. 마왕이 만든 차원의 문. 그것은 모든 이를 빨아들이는 수식이다. 토끼 마족도 사라졌고, 사제들도 사라졌다. 내 제안에 심술이 나서 그가 일부러 저리 만들었다는 확신이 들었으나 일단은 수습이 먼저였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목에 흐르는 피가 나를 방해하지 않도록, 가슴에 엉기는 힘에만 집중했다. 수식을 방해하는 건 커다란 힘을 요구하지 않는다. 물론 마왕이 만든 문을 내가 여닫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적어도 사람들만은 저 문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고 싶을 뿐.
“아, 아…….”
그러나 내게 남아 있는 신성력이라곤 없었다. 집중하자 비실거리는 흰 빛만이 아주 잠깐 손바닥에 올라왔을 뿐이다. 겨우 그게 뭐라고. 어지럼증이 심하다. 몸을 비틀거렸을 때 내 몸을 관통하는 하얀 빛이 있었다. 마왕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 빛의 주인을 노려보았다.
“……아론……?”
설마 그가 했을 리가 없다. 이미 한참 전에 쓰러졌어도 무방한 그가…….
“…….”
나는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아.”
아론이다. 무릎을 꿇은 채, 부서진 대검으로 제 몸을 간신히 지탱한 그는, 자신의 손에 맺힌 신성력을 내게로 쏘아 보내고 있었다. 무너질 것처럼 불안정한 자세였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날 따르겠다는 의지가 형형했다.
마왕이 혀를 찼다.
“쉬면서 힘을 일부 회복했군.”
성가시다는 듯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마기가 그의 가슴을 강타했다. 아론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가고 말았다. 나는 달려가려고 했지만, 발이 움직이질 않았다. 누군가 붙들고 있었다.
“사, 살려 다오……!”
“!”
황제였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내 두 다리를 꽉 붙든 채로 애원하고 있었다.
“제, 제발 살려 줘……!”
“이, 이거 놔요! 아론이, 저기서……!”
“나를 구해 다오! 저, 저, 저 끔찍한 존재에게서 나부터……!”
황제는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던 그녀가 지옥의 군주라는 마왕과 마주하자 정신을 완전히 놓은 것만 같다. 수많은 사람들과 기사들이 죽는 걸 목격했기 때문일까. 황제는 내게 매달려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마왕이 나를 죽이지 않은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사람처럼 내 다리를 꼭 붙들고, 자신을 구해 달라 애원하며.
나는 그녀를 보며 울상을 짓고 말았다.
파앙-.
그때 아론에게서 다시 한번 신성력이 피어올랐다. 내게로 날아온 신성력은 내 기운을 보충하며 온몸에 열이 돌게 했다. 나는 그가 쓰러진 채로도 나를 도와주려는 모습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지독하게 성가시군.”
마왕은 진절머리 난다는 듯이 손을 휘둘렀고 아론은 다시 마기를 맞고 뒤로 저만치 밀려나고 말았다.
“아…….”
나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머리 위쪽으로는 사람들의 비명이 더욱 절규에 가깝게 거세어지고 있었다. 아론의 힘을 헛되게 쓸 수 없다. 나는 손에 힘을 집중했다. 황제가 아래에서 살려 달라고 끝없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신성력에만 몰두하려 했다.
머릿속에 그려야 한다. 소환의 영역을 약간 비틀어 차원의 문을 방해할 방법을. 아론의 힘이 더해졌기 때문일까. 나의 노력은 곧 마왕이 만든 차원의 문에 반짝이는 빛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흠.”
마왕은 눈썹을 치켜떴다. 소환 영역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생각보다 신성력을 변형하는 능력이 대단하군.”
“…….”
“뭐. 내게 종속되면 더는 존재하지 않을 능력이 되고 말겠지만.”
나는 차원의 문에 사람들이 더는 끌려가지 않자 안도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론이 호흡을 거칠게 몰아쉬며 바닥에 쓰러진 채로 있었다. 다행이었다. 살아 있어서 정말로 다행…….
‘이제 움직이지 마.’
그대로 쉬기를 바라면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마왕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어쨌든 그대의 원대로 했다. 그러니 나를 순순히 따라오겠지?”
나는 멍하니 그를 보았다. 내게 선택이란 없어 보였다. 천천히 팔을 올리는데 내 발에 매달린 황제가 외쳤다.
“구해 줘! 날 구해 줘! 제발…… 악!”
마왕은 내 다리에 매달린 황제를 마기로 날려 버렸다. 황제는 마기를 가슴에 정통으로 맞았는지 가슴을 움켜쥔 채로 멀리 날아가 버렸다. 나는 그녀를 한 번 보고서 다시 마왕을 보았다. 마왕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기가 불안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이 정도의 마기 방출만으로 그런다는 것은 지금 그의 상태가 썩 좋지 않다는 걸 의미했다.
‘그에게도 소환이 부담이 되었던 거야.’
수백 명의 마족을 소환했다. 앞서서는 마물을 불러냈고. 전성기 때의 그가 아니니, 마기와 육체에 부담이 되는 게 분명하다.
‘마계에 가서 서둘러 회복을 해야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족과 마물이 사라진 세상. 그들이 남긴 것은 피와 죽음뿐이었다. 절망과 공포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안도했다. 더는 피해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소녀도 무사할 것이고, 파루도 무사할 것이고, 수도의 사람들도 안전할 것이다.
‘그리고 아론도…….’
망설일 이유가 없다. 나는 마왕의 손을 잡으려 했다.
콱.
“……!”
누가 나를 붙잡지 않았다면.
뒤를 돌아보자, 언제 기어 왔는지 입가에 피를 흘리는 아론이 나를 올려 보고 있었다.
나는 울컥했지만 애써 미소 지었다.
“이제 됐어.”
“…….”
“다 괜찮을 거야.”
나는 아론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니까 이제 누워서 쉬어도 돼.”
나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옷을 붙잡은 아론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는 울상을 짓고야 말았다. 그의 행동에 그의 마음이 담겨 있다. 그의 온 정신과 집념이 담겨 있다. 내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을 때, 마왕이 마기를 방출했다.
퍽-!
난폭한 마기로 아론은 다시 뒤로 저만치 밀려났다.
“일어나지 마, 아론.”
피가 뚝뚝 입가에서 떨어지는 그를 보며 나는 울먹이며 외치고야 말았다.
이제 쉬라고. 너는 할 만큼 했다고. 이제는 내가 할 일만이 남았다고 외치는데, 아론은 또다시 고개를 든다. 들어서 나를 따라온다. 멈추지 않고 끈질기게.
퍽, 퍽, 퍽-!
마왕은 그런 그를 공격했고, 또 마기를 쏘아 보냈지만 아론은 밀려나면서도 기어이 다시 고개를 들어, 내 쪽으로 기어 왔다. 손이 움직여지지 않으면 어깨와 팔을 이용해서 땅바닥을 기고 또 기었다. 무릎이 헐었는데도.
“아론, 일어나지 마. 제발…….”
“…….”
“부탁이야, 아론, 그대로 있어.”
그러나 그는 고개를 든다. 나를 뒤쫓는다. 그 외에는 할 줄 모르는 바보처럼.
“흑…….”
어딜 가든 따라가겠노라 하지 않았든가. 어떤 세상이든 어떤 시간대이든 쫓아가겠다고.
그는 그 말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나는 눈물이 솟구쳐 흐르는 걸 느꼈다. 울지 않으려 했지만 울 수밖에 없는 이유. 그건 바로 한결같은 그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