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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 앤 다크-211화 (211/220)

211화

머리가 어질거린다. 나는 아직도 잠을 자는 중이 아닐까. 이건 악몽일 것이다. 너무나 지치고 힘들어서 꾸는 악몽.

나는 고개를 도리질 치고 말았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동료들의 비명을 들으면서 나는 이게 진짜일 리 없다고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내가 보고 있는 풍경이 현실이며 제국 전체로 퍼질 리 없다고.

‘이건 분명 꿈일 거야…….’

멍하니 중얼거리는 내 시야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축 늘어진 금발 머리. 마기에 휩싸인 채로 움직이지 않는 그를 보자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아직.”

마왕은 의외란 듯이 말했다.

“그도 죽지 않았다. 무척 끈질긴 인간의 표본이지.”

마왕은 그렇게 말하며 그를 붙잡고 있는 마기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마기가 더욱 그를 조이며 쥐어짠다. 나는 악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이 생에 대한 끈질긴 집착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그, 그만…….”

마왕은 나를 보며 비웃듯이 말했다.

“자신에서 비롯됐을까, 아니면 다른 이를 위해서 비롯됐을까.”

나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거의 울 것처럼 완전히 구겨진 내 얼굴을 보며 마왕은 의외로 그를 풀어 주었다. 나는 아론이 툭 하며 바닥에 쓰러지자 기다시피 해서 그에게 다가갔다.

“아, 아론…….”

서둘러 그를 살핀 나는 가슴이 내려앉고 말았다. 성한 데가 없었다. 갑옷은 부서져 살갗을 파고들었고, 상처는 까맣게 변했다. 강한 마기에 오래 침식되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목과 가슴에는 검붉은 핏줄이 가득했다. 나는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그의 뺨을 천천히 훑자, 차가운 죽음의 기운이 가득했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안 돼.”

죽으면 안 된다고, 네 생명은 그리 쉽게 꺼질 수 없다고 나는 끝없이 중얼거리며 내가 가진 힘을 끌어모았다. 내 생명까지, 내 숨결까지 모두 끌어 써도 좋다. 그를 살릴 수만 있다면……!

파앗-!

그런 생각으로 집중하자 손바닥이 환하게 빛났다. 잠깐 잠든 사이에 기력이 나아진 건지 힘이 다행히도 뿜어져 나온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시야가 흐려질 때까지 그에게 내 생명력 같은 신성력을 모두 부어 넣었다. 그러면서 아론의 이름을 불렀다.

“눈을 떠. 아론. 너는 여기서 죽으면 안 돼.”

너는……. 더 큰 존재가 될 것이다. 더 자유롭고 행복한 존재가.

“아주 오래오래 살 테니, 그러니 어서 눈을 떠. 아론.”

이런 감정, 누군가를 애타게 원하는 마음이 내게 남아 있는 줄은 몰랐다. 어린 시절, 아론이 사라지고 나는 이별이란 사람 관계에 필수라 생각했다. 누군가는 언젠가 반드시 떠나갈 거라고. 그러니 미련을 갖지 말자 했지만, 오히려 떠남에 가장 미련을 갖고 있던 건 나였다. 그가 다시 찾아왔을 때, 그가 떠날 날을 걱정하며 전전긍긍했던 것은 나였음을, 이렇게 그를 진정 잃게 될 시간이 되자 진정 깨닫고 마니까.

나는 울음에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발, 나를 바라봐 줘.”

그 다정하고 애정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네가 그립다.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다. 그런 나를 알고 있을까. 나는 몸을 조여 오는 괴로움에 고개를 떨구고야 말았다.

“……드레드.”

내 간절함이 닿았던 걸까. 슬그머니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황금빛이 아련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눈동자가 너무 친숙하고 반가워 나는 그만 미소 짓고 말았다.

“……들렸어요…….”

아론이 작고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냥한 목소리가.”

그의 시선. 늘 한결같이 강하고 올곧은 그의 눈빛이 나를 위로한다.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아 준다. 내가 그에게 절대적인 사람이라 말해 주며.

“……말레드레드일 줄 알았어요.”

미소 짓는 그를 보자 철렁했던 가슴이 울음으로 가득 찬다. 그 넘치는 감동은 사람 관계를 냉랭한 이별 철학 속에 두었던 내 고집을 끌어안을 만큼 상냥했다. 다정함이 넘쳤다. 그의 이런 지고지순한 마음을 왜 모를까. 나는 그가 늘 이랬음을 깨달으며 온화한 감정 속에 휩싸여 속삭였다.

“너는 죽지 않을 거야.”

분명히 다짐하는 말을.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나라는 여자를 특별하게 만들어 준 그에게만큼은 알려 주고 싶다.

“너는, 아주 행복하게 살 거야.”

그의 생명이 내게도 특별하다는 것을. 그래서 반드시 살 것이라는 확신을 전하고 싶었다.

“흥미롭군.”

마왕의 목소리가 분위기를 깨며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그의 목소리에 아론의 허리춤을 살폈다. 비상용 단검을 빼내어 손에 들자 아론이 긴장한 것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괜찮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그대가 소위 말하는 소중한 마음과 정신은 그의 것인가? 난 그대의 육체를 가진 거고? 그를 어떻게 하나 궁금해 살려 두었더니, 제 숨을 넘겨줄 것처럼 아주 애절하게 구는군.”

마왕은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에게 진정 반한 건가? 제 영혼을 넘겨줄 만큼?”

“그는 제 영혼을 바라지 않아요.”

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아론의 태도는 항상 같았다. 그는 내게 어찌 살라 바라지 않았고 무얼 하라 강요하지도 않았다. 애절하게 사랑을 갈구했지만 그건 내 난잡함에 대한 반응이었을 뿐이다. 결국 나를 따르겠다고, 결심하듯이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마왕에게 말했다.

“아론은 제 마음과 정신도 바라지 않았죠. 그저……. 제가 하고픈 대로 살길 바랐어요. 어떻게든 자신이 그에 맞출 거라며, 따라갈 거라고 하면서요.”

“맞춘다, 라.”

마왕은 미소 지었다.

“그대에게 맞추는 건 쉽진 않은 일인데.”

“쉬운 정도가 아니라 아주 까다로운 일이죠.”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 주듯이 우아하면서도 위태롭게.

“저처럼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 여자는 드물잖아요? 쾌락과 욕망에 젖은 사제. 누가 절 쉬이 따라오려고 하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곤, 그가 당신을 진정 감동하게 만들었다는 어조인데?”

“말을 하는 건 쉬운 일이에요. 어려운 건 행동하는 거죠.”

나는 살짝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그 어린 시절의 기억이 눈앞의 일처럼 생생하게 펼쳐진다. 울고 있는 아론과 그에게 손을 내미는 나. 우리의 추억은 늘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사소하고 작은 행동에서부터.

“그는 늘 행동으로 보여 줬어요. 말이 아닌 행동으로 절 쫓아가겠다는 걸.”

나는 단검을 들었다. 마왕은 그 모습을 흥미롭게 보았다. 단검을 내 목 앞으로 바짝 끌어당기자 마왕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설마 하는 표정을 보면서 나는 천천히 물었다.

“당신은 어떻죠? 여전히 제 육체에 관심이 있나요?”

“무슨 말이지?”

그의 심기가 조금 불편해진 것처럼 눈빛이 매서워졌다. 나는 차분하게 덧붙였다.

“알고 싶을 뿐이에요. 제 육체가 당신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지. 유희로서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왜 그런 걸 묻지?”

“왜냐하면 제 몸을 담보로 공격을 멈추라고 할 예정이거든요.”

마왕은 멈칫했다. 나는 단호하듯 말했다.

“당신을 따라갈게요. 순순히 따라갈 테니 총공격을 멈추고 마족을 이끌고 돌아가요.”

“그대의 가치가 그리 클 거라 보는 건가? 우리 종족의 승리를 미룰 만큼?”

마왕의 몸에서 사나운 마기가 뿜어져 사방으로 뻗쳐 나간다. 금방이라도 나를 꿰뚫을 것처럼 사납게 출렁거리는 마기를 보며 나는 말했다.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묻는 거예요. 당신에게.”

“그대를 죽이는 게 훨씬 간단한 일이야!”

위협적으로 외치는 마왕을 향해 나는 대답했다.

“그럼 죽여요. 처음부터 그럴 수 있었으니까.”

당신의 당연한 권리란 듯이 말하자 마왕의 표정은 더욱 사나워졌다. 그의 화를 돋우고 있다는 것을 안다. 아는데도 이 방법밖에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가장 맘에 들어 했고 그래서 가지려는 이 몸을 저울질하는 수밖에는

나는 예전에 보았던 계약에 관한 책을 떠올렸다. 계약을 하려는 마족의 심리에 대해서. 그 책에서는 계약을 통해 얻는 만족이 크다고 설명했다. 자발적으로 따라오려는 상대에 대해서, 마족은 크게 만족을 얻는다고. 따라서 나는 적극적으로 그를 따라갈 것을 피력했다. 그가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하지만 당신이 조금이라도 내 육체에 흥미가 남아 있다면, 그렇다면 수하를 이끌고 돌아가요. 우리 세상을 더는 파괴하지 말아요. 그럼 나도 당신을 따라 기꺼이 가겠어요. 그 세계에 적응하겠어요.”

“만약 그러지 못하겠다면?”

“그럼 늘 이런 짜증 나고 성가신 저를 마주할 거예요.”

나는 단검을 목 가까이에 찔렀다. 피가 흐르자 마왕은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졌다. 마왕은 냉랭한 어조로 물었다.

“사제가 자신의 몸을 해쳐도 되나? 자살은 굉장한 교리 위반일 텐데.”

그의 말에 나는 쓰리게 웃었다.

“잊었어요? 제가 타락한 사제란 걸. 무섭지만 해야 한다면 망설이지 않겠어요.”

내 몸을 해할 정도로 내 의지가 단단하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마왕은 그런 내 의지를 읽은 것인지, 점점 무미건조하게 굳어져 갔다. 그때였다.

우리 사이에 작은 바람이 불더니 바람결을 타고 누군가 나타났다. 사라졌던 토끼 마족이었다. 토끼 마족의 옷에는 인간의 피라고 생각되는 것이 대량으로 묻어 있었는데, 나는 그의 손에 붙들린 것을 보고 더욱 기겁하고 말았다.

인간 여자였다. 그것도 내가 아주 잘 아는 여자…….

“인간들의 수장을 잡았습니다.”

설마 황제를 잡아 올 줄이야. 나는 굳어져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살아 있는지 온몸을 꿈틀거리며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토끼 마족은 신음을 흘리는 황제를 감흥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며 설명했다.

“상황이 불리한 걸 느꼈는지 몰래 도망치려 하고 있더군요. 신성력을 뿜지 않은 채 조용히 진영을 빠져나가는 마차가 있어 이상하게 생각해 따라가 보니 그녀가 있었습니다. 온몸에 마기를 물리치는 도구를 가지고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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