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천천히 그의 팔이 옆으로 뻗어졌다.
“컥!”
팔 끝에는 검은 기류가 꿈틀거리며 휘몰아치고 있었다. 방금 나를 공격하다가 뻗어 버린 기사의 옆머리를 꿰뚫은 채로. 마왕은 그 상태로 팔을 살짝 움직였다. 그러자 머리에서 목까지, 기류가 그의 몸을 갈랐다.
“우리와 똑같은 생명이야. 힘에 복종하고 힘에 절망하는.”
마왕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기류를 움직여 다른 기사들의 목도 차례대로 꿰었다. 기류를 따라서 마치 생선의 머리처럼 기사들이 꿰어졌고, 반항 한 번 못하고 죽어 갔다. 뒤늦게야 아론을 공격하던 벨도 상황을 알아차리고, 피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마, 마왕…….”
그녀는 벌벌 떨고 있었다.
“도망쳐! 후퇴해!”
그녀는 안색이 파랗게 변해 고함치고 있었다. 기사들은 마왕의 등장에 하나둘 뒤로 물러나며 곧 반대편으로 죽어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나도 다를 바 없지.”
마왕의 중얼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달려가던 기사 하나가 목을 뚫렸다. 가차 없이.
“으악-!”
비명과 피가 뿜어진다. 마기는 수십 갈래로 나뉘어 기사를 각개 공격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대항했지만 누군가는 시체가 되어 축 늘어졌다.
“우, 우린 죽을 거야…….”
기사 하나가 외쳤다. 막강한 힘에 아예 싸울 의욕을 잃은 것 같았다.
“오 신이시여…….”
누군가 그렇게 외쳤을 때, 나는 마기가 땅으로 세상으로 뻗어 가는 걸 보았다. 마왕의 주변으로 암적색의 기운이 번지더니 순식간에 넓은 부위가 까맣게 변했다. 그 땅에서 올라오는 생명은 우리 세계에 없는 것이었다. 바로 마계의 것. 마왕은 우리의 땅에서 마물을 길러낸 것이다. 그렇게 군주의 힘으로 나타난 마물은 기사들이 아닌 시민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집을 부수고 사람들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사, 살려 줘-!”
비명이 절망스럽게 터져 나온다. 정신이 아찔해졌을 때, ‘이 사악한 것아 죽어라!’ 하고 외치며 마물을 공격하는 벨을 발견했다. 마물들은 벨이 강력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곧 모여들었고, 그녀를 붙잡았다.
“크억!”
그녀의 몸을 양팔, 양발로 각각 붙잡은 채, 그대로 찢어 버리려는 모습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죽어 가는 시민들, 어둡게 변한 이곳이 지옥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마왕에게 외쳤다.
“그만해요! 당장 멈춰요!”
마왕은 나를 돌아봤다.
“걱정 마. 그대가 아끼는 사람들. 저쪽 신전 인간들은 살려 둘 테니.”
이미 내 상황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그가 말했다.
“물론 저 성기사는 예외야.”
마왕의 팔에서 다시 새롭게 뻗어 나온 기류, 그것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곧장 그것이 아론에게 향했다. 시민들을 해치는 마물을 공격하던 아론은 자신의 목을 꿰뚫으려는 마기를 발견하고 서둘러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다른 기사들과 달리 달려드는 기류의 수가 너무 많았다. 아론은 그것들을 일일이 검으로 쳐내다가 하나에 발목이 꿰뚫려 그대로 공중에 들려지고 말았다.
“큭!”
아론의 입가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는 탄성을 질렀다. 꼭 내가 다친 것처럼 고통스럽다. 탄식하며 입을 벌렸을 때 마왕이 짓궂게 물었다.
“그를 죽이면 나를 원망할 텐가?”
그는 내 대답을 원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나를 놀리려는 것일 뿐이다. 이윽고 거꾸로 매달린 아론은 신성력으로 그 힘을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마왕은 팔에서 더 강한 마기를 뿜어 아론의 몸을 칭칭 감았다. 그리고 일부러 고통을 주려는 듯 꽉 그를 조였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과 동시에 입가로 피가 터져 나왔다.
나는 겁에 질려 그 모습을 보다가 마왕에게 달려들었다.
팍.
그러나 두 주먹으로 그를 막아야겠다는 나의 공격은 허무하게 막혔다. 그는 아무렇지 내 한 손으로 내 두 손을 움켜쥔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파랗게 질렸을 입술로 애원했다.
“제발 그만둬요…….”
“어째서?”
마왕은 비아냥거렸다.
“그대의 몸에서 저 성기사의 냄새가 진하게 나기 때문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마왕은 웃듯이 말했다.
“왜 놀란 얼굴이지? 그런 몸을 했는데,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이런 곳에서 기사와 여유롭게 정사나 즐기고 있는 그대의 무신경함과 대범함이 오히려 더 놀라운데 말이야.”
“아…….”
“핑계를 대 봐. 내게로 오는 것이 늦어지는 게 저 기사 때문이 아니라고.”
마왕은 어둡게 나를 응시했다.
“변명해 봐.”
“그, 그게…….”
“정곡을 찔렀나? 말을 못 하는군.”
마왕은 떨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시선 끝에는 자신의 마기에 파괴되어 고통스러워하는 세상과 생명이 있었다.
“때때로 절대자인 나도 견딜 수 없는 것들이 있어. 내가 가볍게 손에 쥘 거라 생각했던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는 것 같은 거. 그런 경우는 아주 기분이 불쾌해져.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인간 세계에 대한 정복욕이 다시 돌아올 만큼.”
“가, 가, 가려고 했어요. 단지…….”
나는 절망으로 하얘진 머리를 재빨리 굴리며 더듬거렸다.
“시, 시간이 필요했을 뿐…….”
“시간이라. 시간에 자유로운 나지만, 나는 알다시피 죽어 가고 있어. 그런 나에게 그동안의 기다림이란 그대를 향한 호의라는 걸 정녕 모르는가?”
“…….”
“이미 그대는 저자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버렸다. 이번엔 그를 살리기 위해 뭘 버릴 셈이지? 그대에겐 남은 건 없어. 영혼은 이미 저당 잡혔고, 그 몸뚱이는 계약을 하겠다고 한 순간 내 것이라 예정된 거니까.”
나는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떠밀려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절망하며 얼어붙은 나를 마왕은 애써 위로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마음이 약해지려고 하니까. 그대의 장점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태한 듯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나. 나는 그대의 흥분된 얼굴을 원해. 싫은 듯 결국 상황에 순응하며 욕망을 드러내길 바라.”
마왕의 손길이 은근하다. 손목을 놓아주며 내려온 그의 손은 어느새 내 허리를 건드리고 있었다. 나는 그 손이 내 다리 사이로 미끄러지는 걸 노골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 기분이 좋아지게 해 줄 건가? 지금 당장이라도 내 요구에 응한다면 저들을 살려 주지.”
마왕의 손이 저릿하게 내 가운데를 자극한다. 굳어 있는 몸은 그 손길에 기겁한 것처럼 바르르 떨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마왕은 시종일관 태연하고 오만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모든 건 그대의 결정에 달렸다.”
“……지금.”
내가 맞게 들은 것인지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당신에게 안기라고요……?”
“어려울 거 없잖아. 어차피 그대는 곧 인간을 저버릴 몸이니까. 사제의 태를 벗는 연습이라고 생각해. 내 아래에서 뜨겁게 신음하며 몸을 비틀면 그대를 억압하고 있던 제약들이 모두 날아갈 테니까.”
“……사제의 태를 벗는다…….”
나는 그의 말을 멍하니 반복했다. 마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그대는 사제가 아니야. 나와 같은 마족이지.”
마족. 어둠의 종족이 된다. 나는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아 중얼거렸다. 내가 인간이 아니게 됨을, 마왕에게 듣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가 아론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강력한 마기 안에서 죽어 가고 있었다. 이미 소진된 체력에 느닷없는 마기 공격이 이어졌으니 아무리 그라도 살아남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그를 다시 한번 구하자면 마왕에게 몸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제가 아니게 된다…….”
그 말이 저주처럼 머릿속에 울린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내 어깨의 옷자락을 잡았다. 천천히 벗기 시작하자 마왕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이제야 인정하는군.”
인정? 이것은 인정해서가 아니다. 막막해서다. 막막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서. 나는 옷을 벗는 것을 택하고 있었다.
‘친절하고 상냥했던 면모는 그대로예요.’
나라는 존재.
‘제멋대로인데…….’
‘그런 면까지 합쳐서 말레드레드라고 생각해요.’
‘고민하는 부분까지 모두 합쳐서.’
욕망에 약하고 선악에 둔해도 괜찮다. 사제이면서 욕망에 솔직한 여자이면 어떠한가. 나는 그러한 존재로 태어났고, 그런 삶을 추구했다. 누가 보면 눈살을 찌푸릴 만큼 양면성이 있는 삶이었다고 하나 그렇다고 하여 내가 악마라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죽이고도 태연한 사람이란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나는 인간이었고,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 측은지심을 느끼는 존재였다. 신실한 사제는 아니었어도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 하는, 신성력을 지닌 사제였다.
“……싫어요.”
따라서 옷을 벗던 것을 멈추고 그에게 말했다. 마왕은 놀란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뭐?”
“싫다고 했어요. 당신과 여기에서 관계하고 싶지 않아요. 사람들이 죽어 가는 곳에서, 제 세상이 망가지는 폐허 가운데에서.”
나는 분명하게 말했다.
“당신과 관계하기 싫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