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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 앤 다크-207화 (207/220)

207화

그녀의 뒤로 기사들이 철컥하며 검을 빼 들었다. 아론의 대검에 오롯이 신성력이 입혀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어째야 하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벨에게 전혀 이야기가 먹히지 않다니. 그녀는 철저하게 결심을 한 것처럼 보였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내 손을 잡아 왔다.

“어, 언니.”

소녀였다. 소녀는 겁먹은 눈으로 황궁 기사들을 보고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아요?”

“넌 들어가 있어.”

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신전에 숨어 있으라고 했지만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제 일인걸요.”

“뭐?”

다시 물었을 때 대답은 다른 이들에게서 들려왔다.

“우리의 일이에요.”

생존자와 괴생명체들.

“살아남고 싶고.”

“죽고 싶지 않은.”

그들은 모두 두려운 얼굴이었다.

“우리의 일.”

그러나 한편으로 죽음을 각오한 것처럼 비장하다. 그들은 신전에서 모두 걸어 나와 내 옆에 섰다. 그리고 벨을 향해, 기사들을 보며 외쳤다.

“우리는 살고 싶어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인간답게 먹고 누리고 싶어요!”

그들의 외침에 벨은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수발을 드는 고지식한 기사답게 그녀는 곧 매몰차게 외쳤다.

“그건 제 알 바 아닙니다! 그대들의 운명은 이미 결정됐어요! 당신들은 영원히 세상과 격리되어야 해요! 폐하께서 결정하셨으니까!”

단호하게 외친 그녀는 기사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려 했다.

“그렇습니까? 이미 운명이 결정되었다니. 늘 미래를 꿈꾸라는 엘크리찬께서 슬퍼하실 말이군요.”

파루였다. 벨은 그의 복장을 알아보고 움찔했다. 곧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도 이들과 함께하실 겁니까?”

파루는 연륜 있는 미소를 지었다.

“저는 늘 신과 함께 할 겁니다. 신께서 이 목숨 거둬 가신다면 망설임 없이 따라갈 테지요. 신이 존중하는 생명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면 기꺼이 그럴 테고요. 그 전에 사제로서, 다른 신전에 물론 도움을 요청하겠지만요.”

파루는 끌끌 웃었다.

“도움?”

벨이 의아하다는 듯이 눈을 치켜떴을 때, 파루의 손에서 둥근 빛이 뿜어져 나왔다.

“네,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아군의 도움이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환한 빛, 태양 빛조차 먹어 버리는 거대한 흰 빛에 벨과 기사, 나와 아론, 생존자들을 모두 고개를 돌리며 눈을 찌푸려야 했다.

“다 됐군요.”

1분 정도 빛났을까. 어느새 빛은 사라지고 파루가 숨이 가쁜지 호흡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뿜어냈던 거대한 에너지가 하늘에 떠 있는 것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근처의 신전이 모두 알게 될 겁니다. 제 친구와 사제들이 오겠죠.”

“큭. 그건 마족이나 마물이 나타났을 때 도움을 요청하는 긴급 신호입니다!”

벨이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마족이나 마물은 사람들의 생명을 해치지요. 지금 기사님께서 그리하시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파루의 반론에 벨은 대꾸하지 못하고 화가 나서 검을 휘둘렀다. 그녀는 전략적으로 강한 아론부터 제압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론은 당황하지 않고 벨을 상대해 나갔다. 금세 기사들 반이 아론에게 달라붙었다. 나머지들은 생존자들에게 달려왔다. 나는 신성력을 뿜어냈다.

캉-!

검이 신성력으로 만든 방어막에 부딪쳐 튕겨 나갔다. 그 충격이 거셌기 때문에 나도 뒤로 물러나야 했다. 기사는 내가 상대하기 곤란하다 느껴졌는지 그 옆의 소녀에게 검을 이어 그었다. 가슴으로 향하는 검날을 보며 나는 재빨리 소녀의 몸을 감쌌다.

“?”

찢어질 듯한 고통을 예상했지만 어떤 충격도 와닿지 않는다. 눈을 뜨자 우리를 공격하던 기사가 어느새 저만치 날아가 땅에 처박혀 있는 게 보인다. 나는 그 기사를 공격한 자를 보았다. 아론이었다. 멀리서 검기를 날린 것으로 추정되는 아론은 다른 기사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우리 쪽으로 연달아 검기를 날려 보내고 있었다.

“크헉!”

기사들이 하나둘 나동그라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다른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신성력으로 검을 상대하기는 불편한 감이 있었지만 그들은 일반 기사였기 때문에 신성력의 자유로운 공격에 반응이 둔한 편이었다.

“제 뒤로 숨으세요!”

내가 열심히 대항하자 기사들이 내 쪽으로 달려든다. 파루가 그 모습을 보고 외쳤다. 얼른 그의 뒤로 들어가자 파루의 손에서 긴 신성력이 뿜어져 나와 넓은 원을 만든다. 방패와 같았다.

“웬만한 공격을 막을 겁니다…….”

간신히 말한 파루의 안색을 창백했고 두 손은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걱정되었으나 곧 들어오는 기사의 공격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캉, 캉-!

파루의 말처럼 강력한 신성력 방패는 검날을 튕겨냈고 기사를 나동그라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연이어 이어진 사나운 공격에 파루는 오래 버티지 못했고, 곧 입가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파루!”

나는 놀라서 그를 부축했다.

“괘, 괜찮습……니다. 어, 어서…… 다른 이들과 신전으로 후퇴해서…… 지원병이 올 때까지 숨는 게…….”

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에게 간신히 대항하는 이들을 불렀다. 그들은 신전 안으로 숨으라는 내 외침에 반응했으나 선뜻 달려가진 못했다. 잠깐 방심했다간 기사들의 무서운 검이 몸을 가를 판이었다.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나는 신성력 공을 만들었을 때였다.

“악-!”

갑자기 소녀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확 젖혀졌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기사였다. 험악한 손길은 소녀의 뒷머리를 뜯을 것처럼 난폭했다.

“으, 아아…….”

소녀는 입술을 뻐끔거리며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낼 수 있는 신성력을 모두 뿜어냈다. 그리곤 기사에게 정면으로 던졌다.

그러나 기사는 한 번 나에게 당했던 것을 기억했는지 몸을 수그려 신성력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내 배를 위로 강하게 쳐올렸다.

“아…….”

말이 나오지 않는다. 주먹이 쳐올린 배가 불이 나서 터진 느낌이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을 때 기사가 비웃듯이 투구 아래로 입가를 올렸다. 곧 그의 주먹이 다시 한번 날아왔다.

빡.

소리는 둔탁했다. 내 눈앞은 하얗다 못해 붉게 변했다. 눈앞에서 붉은 피가 비처럼 내리는 기분……. 귓속에서는 먼 데에서 들려오는 이명이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그의 주먹이 뒤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이대로 죽는 건가?’

다가올 충격과 고통은 무서울 것이다. 살을 뭉개고 뼈를 부술 만큼 끔찍할 것이다. 나는 절로 눈을 감고야 말았다. 소녀가 이 모습을 보지 말아야 할 텐데, 생각했을 때, 찬바람이 불었다.

기풍이 먼저 불어온 건 아론이 당황했기 때문이다. 신성력이 아니라 검의 바람이 먼저 불어닥친 것은 검을 급하게 휘둘러서인데, 그 뒤를 따라서 신성력도 달려오고 있었다. 기사는 당황했다. 설마 동료들에게 둘러싸인 아론이 나까지 챙길 줄 몰랐다는 반응 같았다.

‘내가 죽으면.’

그는 어떻게 될까.

우습게도 그런 생각이 먼저 들고 만다. 저쪽에서 검과 검에 휩싸여 이를 악문 기사를 보며, 나는 그의 안위를 생각하고 말았다. 저렇게 힘겹게 움직이는데도 그는 여전히 아름답다. 찬란하게 빛난다. 그게 그의 본질이라는 듯이.

‘아.’

짧은 순간. 아론과 눈이 마주쳤다. 어찌 알고 나를 보았을까. 운명 같다. 서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기구한 운명의 남녀. 나는 웃고 말았다. 왜인지 웃음이 나와 미소 지었으나 아론의 표정은 더욱 심각해졌다. 기사가 자신을 공격한 빛을 견디면서 내게 검을 휘두르려 한 것이다.

파앙-.

그리고 이어지는 아론의 폭발. 아론의 몸에서 거대한 기둥 같은 빛이 내게로 날아오자 기사들은 경악에 휩싸였다. 그의 힘을 대부분 쏟았을 그 강력한 공격은 웬만한 기사를 날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어?”

저게 뭐지. 강한 신성력에 반응이라도 한 것처럼 내 앞에 검은 점이 생겼다. 까맣고 어두운 점은 점점 넓게 확장되었다. 마치 무언가의 자리를 만들듯이 암흑의 소용돌이로 변한 그것은 곧 한 남자의 모습을 출렁거리며 만들어냈다.

“!”

내가 얼마나 놀랐냐면, 머리를 흔들었을 만큼이다. 어지러웠는데도 지금 상황을 믿을 수가 없어서 머리를 흔들어야만 했는데 마왕은 역시나 존재하고 있다. 고고한 자태로 내 눈앞에.

그는 곧 자신에게 달려드는 아론의 신성력을 보며 손을 휘둘렀다.

파앗!

그의 몸에서 번져 나온 암흑의 마기가 신성력과 충돌한다. 검은 뱀과 흰 뱀이 어우러진 것처럼 한차례 소란스럽게 으르렁거리더니, 암흑이 흰빛을 모두 잡아먹고 말았다. 마왕은 얼이 빠진 나를 보며 입가를 올렸다.

“사제로서의 자존심 때문인가? 죽어 가는 순간에도 나를 부르지 않은 건?”

사제가 어찌 마지막 순간에 마왕의 이름을 부르짖을 수 있을까. 나는 아연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피를 흘리는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같은 편에게 당하고 있군. 그대의 생명력이 요동치기에 이상하다 싶었는데. 같은 인간들에게 죽을 뻔하다니. 정말 꼴사나워, 그대.”

마왕은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나는 진이 빠져 제대로 대꾸조차 할 수 없음을 느끼며 그를 바라보았다. 마왕은 조롱을 멈추지 않았다.

“정말 그대의 종족이 자애와 자비로 가득하다고 생각하는가? 사제인 그대가 그렇게 엉망이 되었는데도? 아쉽게도 그대의 종족은 우리 마족과 다를 바가 없어. 내가 증명해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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