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인자하게 말한 대사제는 천천히 소녀에게 다가왔다. 소녀는 움찔했으나 곧 대사제의 손짓을 따라 그에게 꽃목걸이를 건넸다. 대사제의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
“저도 어렸을 때 많이 만들었지요. 맘에 드는 아이한테 선물하곤 했습니다. 그때의 설렘이 아직도 생생하군요. 늙었어도 좋은 걸, 행복한 걸 추억하는 버릇은 잊지 않는 모양입니다. 여기 가 소녀도 그런 거 같군요.”
대사제는 일반 사제와는 좀 달랐다. 이런 작은 도시에 대사제가 있는 것도 신기한데, 괴생명체를 온유하게 바라보며 쓰다듬는 사제라니. 나는 고마우면서도 경계심이 일었다. 그는 아론과 나의 경계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들어서 우리의 수를 세어 보았다.
“인원이 꽤 되는군요. 신전엔 방이 몇 개 없으니 여러 명이 방을 나눠 써야 할 겁니다.”
“저희가 신전에 머물러도 괜찮다는 말씀이십니까?”
“물론이죠, 기사님.”
대사제는 아론을 보며 미소 지었다. 아론은 멈칫했다.
“님이라니, 당치도 않은 호칭입니다.”
“옛날 버릇입니다. 젊은 시절엔 성기사들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지요. 그들이 전장에서 돌아오기라도 하면 길목에서 연인을 기다리던 아가씨처럼 마냥 흥분해 바라보곤 했죠. 특히 이겼다는 의미로 검을 높게 치켜들 때면 목이 아프게 함성을 질렀고요. 아직도 그 버릇이 남아 있는지 기사들만 보면 절로 존칭이 나오네요.”
대사제는 입술을 끌어 올렸다.
“늙은이가 추억을 주절거렸군요. 피곤하실 텐데 이만 가실까요?”
대사제는 차분한 몸짓으로 우리와 사람들을 신전 안으로 안내했다. 영주는 그가 우리를 데리고 신전으로 들어가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이걸로 마냥 끝난 게 아닙니다!”
그는 경고하듯이 외치고는 말머리를 돌려 사라졌다. 나는 들어가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기사단은 대부분 남아 있었다. 우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듯이 살벌한 눈빛으로. 나는 그들을 어두운 눈으로 쳐다본 뒤 일행을 뒤따랐다.
대사제는 걸어가며 신전을 소개했다.
“아주 오래된 신전입니다. 신성 제국이 생길 때쯤 함께 지어졌죠. 저처럼 나이를 먹어서 성한 데가 없지만 비바람을 피하기에는 아직도 쓸 만한 장소입니다. 화장실도 최근에는 새롭게 단장했고요.”
나와 아론은 눈을 마주쳤다. 이 사람 좋은 대사제에게 미리 경고를 해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입을 열었다.
“대사제님.”
“대사제로 불리지 않은 지는 좀 되었습니다. 이제는 파루가 더 익숙한 이름이지요.”
대사제에서 물러난 연로한 사제. 나는 기억 속에서 대사제는 보통 대사제로 생을 마감하지만 그들 중엔 드물게 자격이 박탈되어 평사제로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는 이야기를 떠올려 보았다.
‘황제에게 반감을 샀을 경우라고 했던가?’
왠지 가슴이 따끔하게 찔려 오는데, 파루는 나와 아론을 다른 복도로 이끌었다.
“사연이 많아 보입니다. 그럴 땐 얼른 마음을 풀어야죠. 제가 맛 좋은 차도 한잔 내오겠습니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그를 따라서 들어갔다. 이곳은 대체로 어둡고 낡았으나, 관리가 잘 되고 있는지 깨끗하면서도 좋은 향기가 가득했다. 그는 나와 아론이 이야기할 것이 있는 걸 눈치채고서 대화하기 좋은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는 가면서 사제들에게 말해 우리의 일행들이 쉴 수 있도록 방을 나눠주고 음식을 전달하라 했다.
자리에 앉자, 파루가 곧 따뜻한 차를 내왔다. 쓴맛이 느껴졌지만 뒤에는 은근한 단맛도 돌아 먹기가 좋았다. 내가 한 모금 더 마시는 동안, 아론은 마시지 않고 기다렸고, 이윽고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따뜻한 환대 감사합니다. 하지만 위험하실 수 있다는 이야기를 안 드릴 수가 없군요. 저희는 쫓기고 있으니까요.”
나는 오늘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파루는 찻잔을 든 채로 이야기를 들었고 간혹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군요. 이 도시로 오는 데에는 그런 사정이 있었다니 고생 많으셨겠습니다. 하지만 저나 이 신전은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먹을 대로 먹은 둘입니다. 이제는 마음대로 운영하고 쓰다가 갈 일만 남았지요. 당연한 일을 위해서인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신전도 저도, 이제는 겁이 날 게 없습니다.”
하고 털털하게 반응하는 노인이었다. 나는 줄곧 냉대를 받다가 갑자기 받는 환대에 익숙지 않아 당황하고 말았다. 노인은 나의 그런 당혹스러움까지 이해하는 모양인지 떨리는 손안의 잔에 따뜻한 차를 더 부어 주었다.
“저야 그래도 나이를 먹어 이런 일에 휘말려도 큰 문제가 없지만, 어째서 두 분은 이런 위험한 일에 용기를 내셨습니까. 너무 긴 인생이 남아 있는데.”
노인은 대답 없는 우리를 향해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이럴 수밖에 없었습니까? 마치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처럼?”
그는 이것이 소명 의식인지를 묻고 있었다. 나는 아론을 한 번 쳐다보고 솔직하게 말했다.
“거창한 의도는 아니었어요. 책임감이 뛰어나서도 아니었고요. 그냥……. 지켜볼 수가 없었어요.”
남을 위하는 정신, 희생하는 삶. 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사람들을 구하는 그런 성인이 아니다. 나는 나를 알고 있다. 너무 뼈저리게 알고 있어, 가끔은 스스로에게 너무 냉정한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냥 두고 볼 수가 없더라고요. 절 구해 줬던 이가 고통받는 모습이라든가, 처참하게 죽어 가는 모습이라든가 하는 것들이요……. 마치 속에서 부아가 치민 것처럼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움직였다.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던 순간들을 위해. 소녀의 호의라든가, 고통 속에서도 웃는 미소라든가, 하는 그런 인상 깊은 것들을 위해.
나는 아론을 보며 말했다. 그의 진하고 아름다운 황금빛 눈동자를 응시하며.
“구할 수밖에 없었어요.”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아론은 잠시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파루가 그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참으로 애석합니다. 차라리 냉정하게 마음먹고 모른 척했으면 이리 쫓기지도 않으셨을 텐데. 앞날도 창창하신 분들이 결국 폐하를 적으로 돌리게 되고 말다니. 제가 뭐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파루는 직설적으로 말했다. 예리하게 찔러 오는 그의 말이었음에도 이상하게 나는 기분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더욱 믿음직하다고 느껴졌다. 파루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누군가를 위하는 건, 어쩌면 날 파멸로 몰아갈지 모르는 이들을 돕는 건 굉장한 용기입니다. 대담함과 용맹함을 지니신 두 분께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거라곤 작은 방을 내어 드리는 것뿐이군요. 그곳에서 쉴 수 있을 겁니다. 침대는 딱딱하지만 깨끗할 테니, 두 분이 하루를 머물기에는 나쁘지 않을 겁니다.”
“하, 함께요?”
나는 멈칫했다. 자연스럽게 말한 것 같지만 보통 남녀 사제가 한방에 머무르는 법이 없다 보니 당황한 것도 사실이었다. 파루는 뭐가 문제가 있냐는 듯이 한쪽 눈썹을 치떴다. 아론이 답했다.
“알겠습니다.”
“…….”
거부 없이 대답하는 그 때문에 나는 얼굴을 조금 붉히고 말았다. 아론은 그런 나를 사랑스럽게 보며 미소 지었다. 파루는 우리 기류를 눈치채고 조금 웃음소리를 냈다.
“제 말은 어디까지나 한 분은 침대에서, 한 분은 바닥에서 자란 의미였습니다만, 뭐가 됐든 두 분이 원하는 방식이면 될 겁니다. 제 알 바는 아니니까요. 저는 방을 내어 드렸을 뿐이지 그 안에서 뭐가 벌어지든 상관 안 합니다. 웃음이 나든 울음이 나든, 애가 태어나든.”
네? 뭐라고요……? 잘못 들었나 싶을 때, 사제 하나가 들어왔다.
“저, 저, 괴생명체, 아니 그러니까 외양이 이상한 분 하나가 괴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얼른 가 볼까요?”
파루는 사제가 말한 곳으로 향했다. 다른 방에 가자 과연 괴생명체 하나가 머리를 붙잡고 좌우로 거세게 흔들고 있었다. 그때마다 귀에서 진물 같은 것이 떨어졌고, 피부에서 녹색 피가 흘렀다. 아론은 가만히 보며 말했다.
“변이가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저런.”
파루는 인상을 썼다. 나는 안쓰럽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갇혀서 실험도 당했다고 했었어요. 아마 몸이 성한 데가 없을 거예요.”
“일단 진정시켜야겠네요.”
파루는 손에서 신성력을 뿜어냈다. 나이 먹은 사제가 손에서 뿜어내는 신성력의 풍부함과 세기에 나는 가히 놀라고 말았다. 파루는 거대한 신성력을 방 안에 가득 차게 해 눈을 뜰 수 없게 하더니, 이윽고 느긋한 어조로 노래를 불렀다.
“편안함- 그것은 배부르고 따스한- 그 어느 날의 기억- 꿈꾸는 그 아름다운 날로- 나는 돌아가리라-”
별거 아닌 단순하고 단조로운 가사였는데, 왜 그런지 그 가사가 가슴에 편안하게 와 박히는 걸 느꼈다. 괴로워하던 괴생명체는 신성력을 흡수한 것처럼 진정되었고 곧 쓰러져 잠에 빠졌다. 파루는 누구에게 시키지 않고 깨끗한 천으로 피 흐르는 피부를 직접 닦았다. 그러곤 사제를 시켜 그를 침대로 옮기게 했다.
“병자들은 늘 있었어요. 신전은 그런 이들을 기꺼이 보호하고 위로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파루의 입에서 나온 차분한 말은 사제인 나까지도 신전의 진정한 역할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숙연함이 있었다. 파루는 다시 식당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차를 마셨다. 그는 우리를 보며 말했다.
“차를 다 마시면 서둘러 쉬세요. 휴식 시간이 길지 않을 겁니다.”
파루는 경고했다.
“영주는 성에 가자마자 분명 황성에 연락을 넣었을 겁니다. 빠르면 오늘 밤에, 늦으면 내일 아침에 황성에서 기사들이 올 거예요. 그들은 저와 같지 않을 겁니다. 두 분이 젊고 용감하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쳐들 거예요. 원한다면, 제가 신전 앞의 기사단을 막을 테니 다른 지역으로 가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