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201화 (201/220)

201화

다시 입구로 나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사람들의 상태였다. 오랜 시간 먹지 못한 채로 갇혀 있던 탓인지 통로를 빠져나오는 것도 힘들어했다. 아론은 이들을 끌고 산을 올라서 도시까지 걸어가는 것은 무리라고 봤는지 가장 가까운 마을로 가자고 했다.

“주민이 몇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 있는 거로 압니다.”

“하지만 거기로 가면 기사들에게 금방 발각되지 않을까?”

“으음, 잠시 쉬었다가 다시 도시로 이동하면…….”

아론이 심각한 표정이 되었을 때 생존자 중 하나가 넌지시 물어 왔다.

“저희가 도시로 가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는 어딘가로 숨었으면 하는 얼굴이었다. 아론은 침착하게 말했다.

“도망치는 걸로 끝나지 않으니까요.”

“그, 그럼 어떻게 해야 끝이 날까요?”

나는 아론을 한 번 보고 대답했다.

“황제 폐하께서 생각을 바꾸셔야 끝이 납니다. 생존자와 괴생명체가 시민이란 것을 받아들이셔야 추적자를 보내지 않으시겠죠. 이대로 그냥 도망치면 추적자를 보내 한 명씩 잡아 오라 할 거예요.”

운이 나쁘면 그 과정에서 죽을 수도 있다. 사람들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몸을 움츠렸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더니 우리를 보며 애원했다.

“다, 다시 갇히고 싶지 않아요!”

“갇히면 죽고 말 거예요!”

“이런 곳에서 죽을 수 없어요!”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아론은 사람들의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우선 거동할 수 없는 이와 아닌 이를 나누는 게 좋겠어요. 전자의 분들은 마을에서 쉬는 게 나을 겁니다. 기사들이 찾으러 와도 환자들만 있다면 어떻게 해를 가하진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몸이 괜찮은 분들은 동의하에 도시로 가겠습니다.”

“도, 도시로요?”

괴생명체들로 변한 이들이 심히 두려워했다.

“가자마자 죽는 게 아닐까요? 창을 들고 쫓아왔어요. 어떤 사람들은 당장에 불태워야 한다고 기름을 끼얹었고요.”

“솔직히 말해서.”

아론은 그들을 보며 어두운 눈으로 말했다.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 작전이 마냥 통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 주지 않은 채, 죽고 말 겁니다. 당신들의 죽음에 대해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거고요. 앞으로, 어떤 괴생명체도 자비를 얻을 수 없을 겁니다.”

아론의 어조는 어두웠지만 진실이 가지는 울림이 있었다. 그것은 실제 죽음을 직면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더욱 진실하게 와닿을 수밖에 없었다. 보기 좋은 위로나 설득이 아니라서 그들은 충격을 받은 듯 보였지만, 말의 깊이를 더듬는 듯이 망설이는 태도를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다.

“……어려운 일이란 걸 알아요. 폐하의 분노를 살 거고요.”

“즉시 사형에 처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누군가 외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설픈 거짓으로 이들을 끌고 간다면 오히려 나쁜 결과만 낳을 것이다. 중간에 도망치거나 달아나면 더 큰 문제일 테니까. 나는 그들이 두려움에 맞설 용기를 가지는 게 가장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폐하를 설득해야 해요. 생존자나 괴생명체도 인간이라는 걸 알려드려야 해요. 그래야 다시 격리되더라도 인간답게 살 수 있습니다.”

나는 두려워하는 그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어떤 결정을 해도 좋아요. 따라오지 않아도 이해하고요, 두렵고 무서운 건 당연한 거예요. 누구든 내 처지를 완전히 공감할 수 없을 겁니다. 사제인 저도 이 상황이 그러하니까……. 하지만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든다면, 지금 이 상황이 정당하지 않다고 느꼈다면, 용기를 내세요. 남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내가 살아갈 세상을 위해서. 그 여정엔 저도 함께할 테니 부디 용기를 내세요.”

나의 외침. 나의 목소리가 어떻게 들렸는지 모른다. 아론은 나를 바라보았고, 사람들도 모두 나를 보았다.

“저, 정말 우리랑 함께 해 주신다고요?”

“그런 수고를 기꺼이 해 주신다는 겁니까?”

그들은 나는 물론 아론까지 보며 따지듯이 물었다. 그들은 아론과 나의 외양에서, 그리고 지하 감옥을 침입한 솜씨에서 일반 사제가 아니라고 생각한 듯싶었다.

뭐, 실상은 아닌 게 맞긴 하다. 나야 조금 특수한 상황에 놓인 일반 사제라 할지 모르겠지만 아론은, 황제의 조카인 아론은 분명히 입장이 남달랐다. 오히려 그가 황제에게 반하면 안 되는 입장이었다. 더 크게 황제의 분노를 살 가능성이 있는 아론이, 나는 내 입장보다 더 걱정되었지만 아론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엔 두려움이 없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그의 저돌적인 신념은 이런 곳에서도 빛을 발하는 것처럼 고고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함께할 겁니다. 폐하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제 힘을 보태겠습니다.”

담백하지만 그 말의 깊이는 남다르다. 여태 뛰어난 무용을 보여 준 기사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감탄에 가까운 탄성을 냈다.

“와, 그렇다면!”

사람들은 눈치를 보더니 하나씩 의견을 냈다.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저도 함께할게요!”

“이대로 비참하게 죽을 순 없어요! 죽더라도 내가 이리 멀쩡하다는 걸 보이고 죽을랍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각개의 의지를 갖고 있었고, 각각의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그 함성이 하나의 하모니처럼 느껴지자 나는 가슴이 뻐근해지고 말았다. 그때 내 손을 슬며시 잡아 오는 온기가 있었다.

“어, 언니.”

소녀였다. 그녀의 눈은 눈물로 반짝이고 있었다.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

“하지만…….”

나는 그녀의 상태를 보며 망설였다. 하지만 소녀는 물러나지 않았다.

“언니만 반대하지 않는다면, 저도 도시로 가고 싶어요. 제가 살고 싶은 세상을 직접 만들고 싶어요.”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내 말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이 어린 생명을 보면서 어찌 더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너는 안 된다고 여기서 쉬라고 할 수 있을까. 황제는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가리지 않았다. 모두 가두었고 실험 대상처럼 사용했다. 따라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이 여정에서 그녀가 다치거나 상처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나의 최선이라고. 나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정하게 말했다.

“좋아. 함께 가자.”

소녀는 감격한 듯 나를 마주 안아 왔다.

그렇게 마을로 가서 쉬는 무리와 아닌 무리가 나뉘었다. 아론은 기사들이 따라오는지 뒤를 몇 번이고 돌아보면서 힘겹게 걷는 이들을 독려했다. 마을에 먼저 도착하자 아론은 놀란 촌장에게 무릎을 꿇었다. 촌장은 아론의 갑옷을 보면서 기겁했고, 아론의 부탁을 들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기사들이 혹시라도 오면 제 이름을 대세요.”

아론은 만약의 상황을 대비했다.

“만약 함부로 생존자나 괴생명체를 해친다면 반드시 그 대가는 제 대검으로 받겠다고요.”

“시, 실례지만 존함이…….”

아론의 외양과 분위기에 범상치 않음을 눈치챈 촌장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아론은 간략하게 답했다.

“아론나이드 드올릭 펠더입니다.”

“페, 펠더요? 그렇다면 설마…….”

촌장의 얼굴이 허옇게 변했다. 연로한 그가 몸을 떨자 나는 졸도하는 건 아닌가 심히 걱정되었다. 아론이 그렇다고 하자, 촌장은 무릎 꿇은 아론의 두 손을 잡으면서 이러시면 제가 곤란합니다, 얼른 일어나세요! 를 연발했다. 그는 놀란 마을 사람들도 다독였다.

“걱정 말아요. 이분하고 함께 온 분들은 그저 휴식이 필요한 거니. 공간이 있다면 내어 주면 될 겁니다!”

10명 정도 되는 마을 사람들은 괴생명체로 변한 이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곡식 창고가 비어 있는 상태니 거기에서 머물면 어떨까요?”

“오, 그거 좋겠군요!”

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이 아픈 자들과 괴생명체를 그쪽으로 안내했다.

“이 마을은 괴생명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나 봐.”

아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괴생명체를 대하는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편견이 없기 때문일까요? 그저 신기하다는 눈빛이 대부분이군요.”

“우리가 적으로 규정하지 않았다면 다른 도시에서도 괴생명체를 그렇게 봤을까?”

아론은 생각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저희는 무조건 죽여야 하는 존재라고 먼저 생각했으니까요. 마물과 융화되었기 때문에 마물이라고 본 것도 있고요, 괴생명체가 굶주려 약탈을 했기 때문에 더욱 나쁘다고 본 것도 있습니다.”

“그래……. 검을 들어 상대할 줄만 알았어. 저들도 저렇게 같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잊고서.”

나는 가만히 촌장이 부축하는 괴생명체를 바라보았다. 굳어 있던 괴생명체 사람도 곧 촌장이 주는 배려에 몸을 기대며 마음을 놓는다. 얼굴이 조금씩 두려움이 걷히는 걸 보면서 나는 생각을 굳혔다.

“얼른 도시로 가자.”

“네. 어차피 좀 있으면 추적자들이 붙을 테니, 망설일 시간이 없을 겁니다.”

도시로 가는 인원은 20명이 채 안 되었다. 어린아이는 소녀 하나뿐이었고 대부분 성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노인도 한 명 있었는데, 그는 눈이 이마에 하나 더 난 상태였다. 멀리 내다볼 수 있다며 자신이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한 노인은, 이 상황에 모든 것을 해탈한 것처럼 편안한 표정이었다.

“그냥 허무하게 죽는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의미 있는 일을 하다 죽는다면 훨씬 보람차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은 왜인지 더 가슴을 깊게 울렸다.

우리가 그렇게 잠깐 쉬었다가 다시 길을 떠나려고 할 때였다. 촌장이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말을 끌고 왔다. 흰 말은 젊고 건강해 보였다. 촌장이 말했다.

“빠른 가축이 이거밖에 없지만, 그래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가져왔습니다.”

“괜찮습니다.”

아론은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생각이 들어 받겠다고 했다.

“말이 있으면 도시로 입성할 때 더 좋을 거 같아. 보통 성기사는 말을 타고 도시로 들어오니까.”

아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겠군요. 제가 선두에 선다면 나머지 사람들도 무리 없이 통과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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