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99화 (199/220)

199화

아론은 앞을 내다보며 말했다. 소소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뛰어다니는 아이들, 분주하게 걸어가는 여자들 사이로 기사들은 없어 보였다. 아론은 그들이 공공연하게 다니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 산을 이용해 걷자고 했다.

“하아, 하아…….”

한동안 신전과 저택에만 머물렀기 때문일까. 체력이 떨어진 게 느껴진다. 아론은 숨을 몰아쉬는 나를 보며 한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너도 몸이 안 좋잖아. 나는 그런 의미로 아론의 도움을 거절했다. 아론은 강요하지 않고 걷는 속도를 조금 느리게 했다. 나를 위해서인지 일부러 발이 빠지지 않는 딱딱한 지형으로 움직인 그는 산꼭대기에 달해서는 말했다.

“여기를 넘어가면 옛날 지하 감옥으로 쓰던 입구가 나타나요.”

나는 그가 잡으라고 하는 나무를 붙잡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며 안개가 낀 계곡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이 사납게 불 때면 안개가 걷혀 산 아래 구조가 분명해졌다. 거대한 공이 푹 꺼진 듯한 구조로 되어 있는 지형은 황량하게 자라난 나무 외에는 볼거리가 없었다.

“사람들을 가두었다면 이쪽 입구는 폐쇄했을 거예요.”

아론은 신전으로 통하는 길목만 살려 두었을 거라 추측했다. 관리를 위해서 그렇게 했을 거란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안개 때문인지 내려가는 길은 미끈거리고 축축했다. 아론의 손을 붙잡고 내려가야만 했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집중해서 걷고 있는데 아론이 무슨 일인지 입가에 미소를 달고 있는 게 보인다.

“왜?”

“아니에요.”

“뭔데?”

재차 묻자 아론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하고 만다.

“입을 오므리고 눈을 바짝 뜬 게 귀여워서요. 긴장한 동물 같다고 할까.”

“이런 순간에 농담하는 거야?”

“진짜예요. 물론 말레드레드는 그 어떤 동물보다 형언할 수 없게 예쁘지만.”

애정이 넘실거리는 눈으로 그윽하게 웃어 오는 미남자에게 가슴이 콩닥거리지 않는다면 심장에 이상이 있는 여자일 것이다. 역시 나는 정상이구나, 생각하며 살짝 더워진 얼굴을 저편으로 옮겼다. 그저 내 붉어진 얼굴이 드러날까 한 행동이었는데, 나는 그곳에 서 있는 기사들을 발견했다.

“아론, 저기…….”

“자세를 낮춰요.”

아론은 얼른 내 팔을 당겼다. 나는 그의 옆에 앉으면서 아론이 그들의 움직임을 살피는 걸 바라보았다. 잠시 그들을 지켜본 아론은 말했다.

“경비병인 거 같아요. 성기사 갑옷을 입지 않았지만 무기를 보면 성기사가 맞고요.”

아론은 그들 주변과 입구, 그리고 지형까지 세세하게 지켜보더니 말했다.

“저곳 근처에 폐쇄된 입구가 있는 거 같아요.”

아론은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며 자세를 낮춰 앞장섰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을 뒤척였다. 그러나 내 허리에는 지팡이가 없었다. 소환사 지팡이를 압수당했다는 것을 떠올리며 불안하게 앞을 보는데 아론이 여기에 있으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잠시. 아론은 그들의 뒤로 가까이 다가가더니 순식간에 그들의 목을 주먹으로 쳤다.

“엇……!”

그들이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에 아론이 몸을 회전시키며 그들의 허리와 복부를 가격했다. 빠른 속도로 정확한 부위를 찍으며 이어진 공격에 그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론은 그들을 덤불이 있는 곳에 보이지 않도록 옮겨 놓은 뒤에 나에게 오란 듯이 손짓했다.

“이쪽 입구로 들어가면 될 거 같아요.”

아론이 가리킨 곳은 그냥 보기에 돌바닥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론이 손으로 두드리자 텅 빈 듯한 소리가 울려 왔다. 아론은 손가락으로 돌바닥 여기저기를 누르더니 마침내 반쯤 열리는 장치를 발견하고 문을 열었다.

“가죠.”

아론이 손을 내밀었다. 깜깜한 어둠 속. 앞도 보이지 않는 그 괴물의 아가리 같은 길을 보며 두렵지 않다면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저 안에 생존자들이 있다. 소녀와 사람들이. 그리고.

‘아론.’

내 옆엔 그가 있다. 이런 곳에서도 함께 하겠다며 손을 내미는 그가. 나는 그 손을 보았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아론은 그 손을 꽉 잡아 왔다.

“길이 다행히 하나로 이어지는군요.”

아론은 손에서 뿜어지는 흰 빛에 모습을 드러낸 복도를 바라보았다. 횃불 하나 없는 이곳은 관리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듯 길이 좋지 않았다. 울퉁불퉁한 바닥과 암초처럼 튀어나온 벽, 거기에 시시때때로 마주치는 거미줄이 긴장할 수밖에 없게 한다. 나는 그 와중에도 앞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아론은 빛의 세기를 줄이면서 말했다.

“인기척이 느껴져요.”

속삭인 아론은 나에게 기다리라고 한 뒤 복도 끝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곧 그는 안쪽을 살피고는 괜찮다는 의미로 내게 손짓했다. 나는 그가 가리키는 틈을 바라보았다.

안쪽은 환했다. 횃불이 넘실거리며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나는 그 공간을 나누고 있는 철장을 보며 흠칫했다. 어스름히 비치는 인영들은 분명 사람들이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좁은 철장 속에 빽빽하게 들어 있었다. 아이가 울라치면 관리자로 보이는 사람의 매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해! 굶고 싶지 않다면!”

관리자는 징징거리거나 하소연하는 이가 있으면 어김없이 성질을 냈다. 찰싹거리는 소리가 채찍 소리 같아서 나는 더 자세히 안을 보려고 했다. 아론이 그런 나를 잠깐 뒤로 당겼다.

“사람들이 다가오는 거 같습니다.”

나는 그 말에 숨을 죽인 채 틈을 응시했다. 과연 그 말처럼 하얀 사제복을 입은 이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서류를 든 채로 철장 안의 사람들을 보며 기록하고 있었다. 때때로 괴생명체에 가까울 만큼 변이가 심한 이들이 그 사제복을 입은 자들을 향해 공격성을 드러내면, 그들을 따로 빼어서 다른 곳에 넣어 두기도 했다.

“변이가 심해지는 것 같진 않은데.”

“하지만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한 녀석들은 같은 괴생명체를 공격하거나 인간들을 물거나 합니다.”

“심각한 정도는 아니군. 아직은 지켜봐야겠어.”

사제복을 입은 사람들 사이로 그런 대화가 오갔다. 그때 누군가 멀쩡해 보이는 사람 하나가 외쳤다.

“제발!”

그는 절박하고 간절한 얼굴이었다.

“언제 나갈 수 있는지 알려 주세요! 가족이 밖에 있단 말입니다! 아직 어린 아이랑 아내가!”

“시끄러워!”

관리자가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자 철썩 소리가 나며 철장을 잡고 있던 그가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관리자는 사제들에게 허리를 굽실거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직도 포기를 못한 자들이 있다 보니.”

“빠져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요. 만약에 죽는 사람들이 있으면 다른 이들과 분류해 놓고.”

사제들은 그렇게 말하고는 철창 감옥을 나갔다. 관리자는 못마땅한 얼굴로 사람들을 향해 울지 말라고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조금 더 지켜보자 그들이 먹을 음식이 나왔다. 말라비틀어진 빵과 물이었다. 그것마저도 양이 적어서 사람들은 더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관리자의 험악한 소리가 이어지고, 사람들은 그제야 절망한 듯 제자리로 들어갔다.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군요.”

아론이 심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나는 심장이 엉망으로 뛰는 것을 느꼈다. 이런 곳에 사람들을 가두고 관리자를 둔다면, 그건 앞으로도 쉽게 풀어 주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소, 소녀는 어디 있지?”

“안으로 들어가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철장 안이 어두웠기 때문에 사람이 잘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아이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더 눈에 띄지 않아 심히 걱정이 된다. 나는 아론에게 말했다.

“직접 찾아볼래.”

앞으로 가려고 하자 아론이 나를 막아섰다.

“제가 직원을 처리하는 데 좀 더 유리할 겁니다.”

아론은 그렇게 말하고 관리자가 뒤로 돌았을 때를 노렸다. 순식간에 뛰쳐나간 그는 등 뒤로 다가가 관리자의 목을 한 팔로 조였다. 관리자는 놀라서 두 팔로 풀어내려 했지만 근력의 차이는 절대적이었다. 곧 그의 몸이 축 늘어지자, 아론은 그를 끌어다가 우리가 있던 통로에 데려다 놓았다.

“됐어요. 가죠.”

“잠깐.”

나는 그의 허리춤을 뒤졌다. 열쇠 꾸러미가 나왔다. 그것을 챙긴 뒤, 나는 그가 들고 있던 채찍까지 손에 쥐었다. 아론이 쳐다보자 나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나도 무기가 있음 좋을 거 같아서.”

“가죠.”

아론은 미소 지으며 앞장섰다. 우리가 들어서자 철장 안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우리가 생경한지 눈을 크게 뜬 채로 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성마른 얼굴과 퀭한 안색을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계속 갇혀 있었나 봐.”

“그런 거 같군요. 잘 먹지 못한 채로.”

조금 더 걸어가자 이번에 괴생명체로 가득한 철장이 보인다. 대부분의 괴생명체들이 부상을 당한 것처럼 신음하고 있었다. 아론은 그들 몸에 난 상처를 보며 말했다.

“신성력이군요. 효과가 있는지 실험을 한 거 같습니다.”

“……너무해. 실험을 하더라도 치료는 다시 해 놓아야지.”

저건 그냥 버리는 도구처럼 방치한 게 아닌가. 그들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살려 달라고, 제발 풀어 달라고 하는 눈빛이 아니다. 그저 죽여 달라고, 여기서 이 고통을 끝내 달라고 비는 눈빛.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여기는 보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아론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는 그가 보고 있는 곳을 보았다. 거기에는 시체가 있었다. 시체들은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금방이라도 고약한 악취가 날 것 같은 모양새에 아론은 인상을 썼다.

“빨리 치우지도 않다니. 관리가 형편없군요.”

“대체.”

나는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이들이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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