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98화 (198/220)

198화

“왜 갑자기 그들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 거죠?”

“마왕과 인연이 시작된 곳이 헤르간이니까요. 그 도시 사람들이 가장 피해도 많이 입었고 고통스러워했으니까. 사제로서 그들의 안부가 무사한지 알고 싶어지네요.”

벨은 기계적으로 웃었다.

“그들은 모두 잘 지내요. 걱정하지 않아도 되어요.”

“어디 있는 거죠? 예전에 따로 관리를 받으며 지낸다고 들은 거 같은데.”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거짓말. 나는 벨의 뻔뻔한 표정에서 진실을 읽었다. 나는 간청했다.

“부탁이에요. 그들의 소식을 꼭 알고 싶어요.”

“무사히 잘 지낸다고 알고 있으면 됩니다. 그 외에는 말레드레드가 신경 쓸 게 없어요. 말레드레드의 임무가 아니니까.”

나는 냉담하게 웃는 그녀를 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내가 아무리 설득하려 해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치료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치료사는 약초 가루를 물에 타 아론에게 먹이고 있었다. 그의 허리에 투명한 통들이 주르르 매달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중에 보라색 가루가 들어 있는 통을 바라보았다.

“혹시 그건, 헤움의 가루 아닌가요?”

“오, 잘 아시는군요. 맞습니다. 누구든지 잠이 오게 하는, 아주 강력한 수면 가루이지요.”

치료사는 내 질문에 잠깐 반갑게 아는 척을 해 왔다. 나는 그의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상태는 어떻나요?”

“그게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참…….”

흘깃. 치료사는 내 뒤쪽에 선 벨의 눈치를 살폈다. 내 신분이 높은 거 같으나, 벨과 나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아 주의하는 것이다. 나는 상냥하게, 그가 겁먹지 않을 만한 얼굴로 물었다.

“소중한 사람인데 많이 아파서요. 너무 걱정되어요.”

“그렇습니까? 일단 기력을 일시적으로 회복하는 약을 먹였습니다. 기사분이라고 하니 금세 의식을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치료사는 그렇게 말하고 경고했다.

“물론 그렇다고 이걸로 좋아진다는 건 아닙니다. 애초에 구속 상태가 기력을 쇠약하게 한 거라, 한시라도 빨리 밧줄을 풀어야…….”

“그만하면 됐습니다.”

벨이 말을 잘랐다. 치료사는 머뭇거리며 입을 다물었고, 나는 돌아서는 그의 허리춤을 바라보았다. 이대로라면 아론도 구하지 못하고, 생존자들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마왕을 부르게 되면 그것이 마지막이 될 것임을 알고 있던 나는 모험을 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단순히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헤움의 가루가 눈앞에 있다는 것은 내가 마지막으로 내 의지대로 행동할 기회가 왔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기하네요. 이 가루. 가까이서 봐도 되나요? 말로만 들었던 터라.”

내가 약병에 관심을 가지자 치료사는 선뜻 약병을 넘겨주었다. 나는 병을 흔들며 그 안에서 춤추는 보랏빛의 향연을 지켜보았다.

“예뻐요, 아주.”

눈을 홀릴 만한 색이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음 순간 그 약병의 뚜껑을 열어 벨의 얼굴에 확 뿌렸다.

“윽!”

벨이 서둘러 팔을 들었으나 이미 공기 중에 가루가 퍼진 상태였다. 벨은 얼른 허리춤의 칼을 집으려 했으나 그녀의 눈빛은 흐려졌고 몸은 흔들렸다. 이윽고 그녀가 무릎을 꿇는 것을 보면서 나는 놀란 채 서 있는 치료사에게도 가루를 던졌다.

“억-.”

벨보다 근성이 약한 치료사는 금세 바닥에 무너졌다. 나는 서둘러 아론의 밧줄을 풀었다. 그러나 꽁꽁 묶인 밧줄은 잘 풀리지 않았다. 나는 벨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허리춤에 있는 검. 그게 눈에 보이자 서둘러 그녀에게 팔을 뻗었다.

팟!

“읏!”

그때였다. 의식을 잃어 간다고 생각한 벨이 갑자기 자신의 검 손잡이를 잡는 내 팔을 붙잡아온 것이다.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에는 이미 반쯤 빛을 잃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녀는 입술을 꽉 물며 나를 향해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발악하는 것처럼, 그녀는 검을 다시 빼앗으려 했고 나는 그런 그녀에게 밀쳐져 침대로 쿵 넘어지고 말았다.

“소환사 따위가……!”

그녀의 말속에 들어 있는 가시가 매섭다. 그녀의 눈빛에는 살기가 형형했다. 나는 온 힘을 다해서 그녀가 내 쪽으로 검을 휘두르려는 것을 막고 있었으나 애초에 근력이 차이나는지라 점점 검은 내 목을 향해서 가까워지고 있었다.

“으흣-!”

손에 힘이 달린다. 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럼에도 안 된다고 느꼈을 때, 갑자기 검의 움직임이 멈췄다.

“!”

아론, 그의 팔이 검을 붙잡은 것이다.

“이잇!”

벨은 놀란 듯 더 힘을 주었으나, 아론의 힘이 가세하자 우리를 당해 낼 수 없었다. 아론은 그를 놓치지 않았다. 팍 힘주어 벨을 밀어내자 그녀는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나는 재빨리 남은 헤움의 가루를 그녀의 얼굴에 뿌렸다.

털썩.

“하아, 하아.”

그녀가 완전히 기절한 것을 보고서야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얼마나 힘이 들어갔던지 온몸에 땀이 흥건하다. 숨을 돌리던 나는 신음이 들리자 서둘러 아론에게 달려갔다. 아론은 밧줄에 묶인 채 억지로 몸을 일으킨 탓인지, 온몸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바닥에 있는 벨의 검을 주워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밧줄을 풀어 주었다.

“……괜찮…아요?”

그걸 내게 물을 처지인가. 나부터 걱정해 오는 그를 보면서 약간 울상을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 얼굴을 보며 안도했다는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움직임은 편치 않았다. 거동이 불편해 보였고 머리가 어지러운지 눈까지 감았다. 한차례 쉰 그는 이윽고 눈을 떠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치료사와 벨을 확인했다.

“어딜 가려는 겁니까?”

“생존자들이 수도에 있다고 들었어. 찾아보고 싶어.”

“알겠어요.”

아론은 밧줄을 옆으로 치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척거리는 불편한 몸으로 검과 옷을 챙기는 그를 보면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 혼자 갈 거야.”

아론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이번 일은 내가 각오하고 저지른 거야. 폐하께서 격노하실 걸 알면서도 벌인 거지. 너는 이 일과 상관없어. 헤르간의 생존자들을 보고 싶은 것도 나고, 이번 임무를 잠깐 미루려는 것도 나니까.”

“알겠어요.”

아론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알겠으니까 어서 가죠.”

아론은 지체하면 좋지 않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얘가 지금 내 이야기를 잘 알아들은 게 맞을까? 금빛 눈은 평소처럼 이지적으로 빛났지만 어쩌면 그건 약의 일시적인 효과일 수도 있다.

“아론, 내 말은…….”

“말레드레드는 내가 자유롭길 바랐어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길 원했죠. 이게 제가 원한 거예요.”

아론은 검을 허리에 단단히 채우며 나를 보았다.

“그러니까 가요. 저는 이제 망설일 게 없어요.”

“…….”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눈동자. 저 확고한 뜻을 당장에 어떻게 꺾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의 태도에 난감하다는 얼굴빛을 했지만 더 막지는 못했다.

서둘러 저택을 빠져나왔다. 마주친 시종은 아론이 알아서 제압했다. 그들을 기절시켜 움직임까지 묶어 놓은 그는 가뿐하다는 얼굴이었다.

“몸을 쓰는 게 이렇게 좋은 일인지 몰랐어요.”

“기사니까, 그동안 묶여 있어 많이 답답했을 거야.”

나는 동의했다. 아론은 저택 옆 마구간에 세워진 마차의 밧줄을 풀면서 말했다.

“말레드레드 덕분이에요. 지금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 건, 말레드레드가 절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해 주었기 때문이죠.”

“내가?”

잘 모르겠다는 듯이 대꾸하자 아론이 나를 보았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제 몸의 일부를 쓰게 해 주었잖아요. 말레드레드의 뜨거운 몸 안에서.”

“…….”

그런 이야기일 줄이야. 나는 조금 황당했고 부끄러웠다. 아론은 살짝 노려보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마차를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타요.”

“어디로 가는지 알아?”

“예상은 가요.”

나는 뜻밖에 아론이 펄시에라는 정보를 알고 있자 놀라고 말았다. 아론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신전의 일을 하다 보니 이상한 소문을 접하게 되었어요. 펄시에 신전으로 대량의 물품들이 이동한다는 말이요. 펄시에 신전은 규모가 작은 데다 소수의 신관만 있는데 이상한 일이죠.”

“신전에 그럼 생존자들이 있을까?”

“펄시에 신전이 지어지기 전에 뒤쪽에 지하 감옥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신전 안에는 아닐지라도 신전과 이어진 곳에 사람들을 가둔 장소가 있을 겁니다.”

아론은 빠르게 마차를 몰았다. 나는 그의 옆에 탄 채로 머리를 휘날리게 하는 바람을 느끼며 생각했다.

내가 가서 무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생각으로 나는 머릿속이 바빠졌다.

마차로는 3시간이 넘게 걸린 것 같다. 아론은 기사들이 잘 다니지 않는 작은 길을 이용해 펄시에 마을에 도착했다. 수도의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이곳은 소란스러움이나 시끄러움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아론은 마차를 마을 입구로 바로 몰지 않고 외곽으로 향했다. 외곽에는 외부인들을 상대하는 주점과 여관이 있었다. 아론은 입고 있던 망토 자락을 뒤집어쓰며 말했다.

“마을로 들어가서 조사를 하려면 마차는 여기에 두고 가는 게 유리할 겁니다.”

저택에 있던 마차는 귀족들이 쓰는 고급 마차였다. 따라서 타고 가면 이목을 끈다고 생각했는지 아론은 나를 내려 주고, 마차를 여관에 맡기고 왔다. 그는 그저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여관 주인에게 소량의 돈을 주고 내가 입을 망토를 구한 그는, 나 역시 얼굴을 가리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펄시에 신전은 마을 동쪽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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