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97화 (197/220)

197화

“아니야.”

라드는 조금 쓰게 웃으며 나를 보았다.

“언제든 도울 수 있다는 말은 진심입니다. 말레드레드.”

그가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조용히 웃으며 고맙다는 의미에서 무릎을 굽혔다. 비키는 숙부가 먼저 나가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며 잠깐 고개를 돌렸다가 나를 보았다.

“숙부가 귀찮게 한 건 아니죠? 말레드레드에게 마음이 있어서 괜히 애원했다거나.”

“그런 거 아니에요.”

비키의 표현이 재미있어 웃었다. 비키는 내 웃음을 보자 조금 안도했다는 표정이었다.

“다행이에요. 갑자기 다른 곳에 있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비키는 나를 꼭 안아 주었다. 그녀의 이런 갑작스러운 접촉도 이제는 놀랍지 않다. 나는 가만히 그녀를 마주 껴안아 주었다. 체온이 주는 편안함에 잠깐 기대었을 때 비키가 몸을 떼어 쿠키 주머니를 내밀었다.

“먹어요. 말레드레드 몸에 좋은 거니까.”

“고마워요.”

“누구 주지 말고 꼭 혼자 먹어야 해요.”

비키는 강조하면서 한쪽 눈을 찡긋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쿠키 주머니를 꽉 쥐었을 때, 비키는 손을 흔들며 라드와 함께 문으로 걸어 나갔다. 벨은 문을 열어 주었다가 닫았다.

“화기애애한 분들이시네요.”

그렇죠. 나는 동의한다는 의미로 눈을 깜박였다. 벨은 창문으로 그들이 마차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고는 말했다.

“일레그레 가문은 수도에서 평판이 좋죠. 견실하고 충실하게 귀족의 의무를 수행해 오고 있어요. 대대로 성직에 봉사해 왔던 것은 눈여겨볼 만하고요. 누가 봐도 좋은 혼처 자리라고 생각되는 가문이죠.”

결혼을 할 만한 상대라는 걸까. 나는 그녀를 무의미한 눈으로 보았다. 벨은 잠깐 미소 짓고는 고개를 돌렸다.

“나중에라도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세요. 저분은 말레드레드에게 푹 빠져 있는 것 같으니까.”

“제가 마왕과 관계를 했다는 걸 알고서도 절 반길까요?”

내 질문에 벨이 멈칫했다. 나는 특별한 의미는 없다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생각해 보면 제가 사제이기 때문에 절 좋아하는 거지, 제가 이런 일을 한다고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요.”

“그런 건 밝힐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진심인가? 나는 그녀를 보았다. 벨은 어두운 눈으로, 그러나 확고하게 말했다.

“치부를 일부러 드러낼 필요는 없어요.”

“치부라. 폐하께서 시키신 일이라도 말이죠?”

“말레드레드도 순진하지 않잖아요. 모든 임무가 같은 평가를 받을 순 없습니다. 때에 따라서 어떤 임무는 사람들에게 숨기는 게 더 이롭기도 해요.”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내가 뭐라 하든 어차피 눈앞 기사의 태도는 한결같았으니까. 그들에게 나는 임무를 위한 도구였다. 그녀는 조금 더 설득력 있는 말을 곁들였다.

“이번 일은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거예요. 폐하의 명으로요. 그렇기에 폐하께선 말레드레드의 공을 높게 보고 있으셔요.”

“일레그레 가문과의 혼처를 주선하실 정도로 말이죠?”

“평소라면 관심도 갖지 않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죠. 말레드레드가 이 일을 잘 끝낸다면 일레그레 가문이 아니라 더 명망 있는 가문과 결혼도 가능할 겁니다.”

왜 그들은 내가 원하는 게 신분 상승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한 번도 그것을 바란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런 기미도 내비친 적도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내가 그것을 바라는 게 당연할 것처럼 말한다. 내가 마땅히 그걸 바랄 것이라 가정하여 말한다. 마치 지금의 나는 하찮으며 좋은 남자, 훌륭한 혼처를 얻어야 전부인 것처럼.

나는 그에 짜증이 인 사람처럼 대꾸했다.

“전 이미 원하는 걸 말했어요.”

“압니다. 아론나이드 경을 원한다고 하셨죠. 그래서 그분은 이 위에 갇혀 계시고요. 하지만 말레드레드. 언제까지 저 위에 머무를 순 없어요. 말레드레드도 알겠지만 저런 상태로 있으면 성기사로서의 그의 능력은 저하될 것입니다. 체력도 신성력도 소모될 거예요. 한창때의 성기사에겐 결코 좋은 일이 아니죠.”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고 말았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짚어 주지 않아도. 하지만 그걸 아는데도 이러고 있는 것은 그를 두고 떠나고 싶지 않아서였다. 미련이 남아서였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아요. 마왕을 만나야죠…….”

“마음먹었다니 다행이네요. 폐하께서 다음 만남이 언제일지 무척 궁금해하시거든요. 말레드레드만 좋다면 마왕을 며칠 내로 다시 소환해서 마계에 대한 정보를 캐물었으면 합니다.”

숨이 턱 막힌다. 결과적으로 임무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왔다. 나는 몸을 돌리려다가 문득 그녀에게 묻고 말았다.

“제가 하는 일, 그러니까 마왕을 유혹해서 정보를 얻어낸다는 사실을 안다면, 누구든 좋아할 리 없겠죠? 절, 연인으로 생각하지 못하겠죠?”

“……네.”

벨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어떤 남자도 결코.”

확고한 그 어조에는 의심이란 추호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멀겋게 바라보다가 계단을 올라갔다.

2층에서 멈춘 나는 다시 발걸음을 계단 위로 옮겼다. 아론이 있는 방문을 열자. 아침 햇살 아래 빛나는 육체가 보인다. 아론은 잠을 자는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꿈을 꾸는 거야?”

나는 가만히 물으며 그를 깨우려 했다. 그러나 아론의 상태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고, 몸은 축축했다. 나는 얼른 그의 이마를 짚어 보고 안색을 살펴본 뒤 다급하게 벨을 불렀다.

“무슨 일이죠?”

벨은 내 외침에 침대로 달려왔다. 그녀는 놀란 나를 보고는 아론에게 시선을 돌렸다. 잠시 아론을 살핀 그녀는 냉담할 정도로 차갑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그저 기력이 약해져 정신을 잃은 것뿐입니다.”

“그저요? 그는 성기사라고요! 그것도 촉망받는 강한 기사요!”

“하지만 이 밧줄에 벌써 이틀이 넘게 묶여 있었어요. 이 밧줄은 신성력을 억제할 뿐만 아니라 몸을 약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어요. 부작용으로요!”

“그럼 당장 이 밧줄을 풀어요!”

나는 손에 신성력을 모아 아론의 상태를 나아지게 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밧줄 때문인지 내 신성력은 손끝에 맺혔다가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벨은 고개를 저었다.

“잊었어요? 아론나이드 경은 말레드레드가 임무를 마치고서야 풀려날 겁니다. 그전에는 계속 말레드레드의 일을 방해하려고 할 테니까요.”

“그, 그럼 다른 곳으로라도 보내요! 절 방해할 수 없는 곳으로요!”

“그것도 불가합니다.”

벨은 낮고 차갑게 말했다.

“폐하께선 분명히 명하셨어요. 아론나이드 경을 이쪽으로 옮기는 대신, 풀어 주거나 다시 옮기지 말라고요. 말레드레드가 일을 끝마치기 전까지요.”

“아론이 죽을지도 모르잖아요!”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외쳤다. 햇빛이 주는 금빛만 아니라면 아론의 창백함은 쉬이 드러나고 말 것이다. 이미 그의 몸은 축 늘어져 있었으니까. 나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으나 벨은 침착하고 태연하기만 했다.

“아론나이드 경이라면 최악의 경우에 자신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면서도 말레드레드 곁에 온다니 끌려온 거죠.”

“이, 이런 게…….”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어느새 나는 두 손을 꽉 쥐고 있었다.

“이해가 가요? 기사로서 정당하다고 생각해요?”

“정당하냐 아니냐는 제가 판단할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폐하만이 할 수 있는 권한이지요. 저는 오로지 따를 뿐입니다. 폐하께서 이것이 합당하다고 느끼셨으면 저도 그대로 판단할 뿐입니다.”

“개인의 안위나 욕구와는 관계 없이요?”

“말레드레드…….”

내 분노한 표정을 보았는지 벨은 곤란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 아론을 훑어본 그녀는 말했다.

“치료사를 부르겠습니다. 신성력은 통하지 않을 테니까요.”

벨은 위로하듯이 덧붙였다.

“아론나이드 경은 강한 사람이에요. 쉽게 죽을 사람은 아니니 너무 큰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

“며칠은 더 버틸 수 있으니까요.”

참 잔인하다. 한 사람이 얼마만큼 견딜 수 있을지 그 한계치를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해 버리다니. 그리고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내게, 눈을 바라보며 똑바로 말한다니.

그녀는 독한 사람이었고 충실한 황제의 개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더는 그녀를 마주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를 지나쳐 2층으로 뛰어 내려왔다. 방으로 들어오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아론이 힘없이 쓰러져 있는 모습이 떠오르자 분노와 짜증은 곧 형언할 수 없는 슬픔으로 바뀌었다.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그를 위해서. 나는 눈을 감았다. 문득 내 손에 들린 주머니의 감촉이 느껴졌다.

혼자 있을 때 먹으라 강조하던 쿠키. 주머니를 열자 고소하면서도 달콤한 향내가 풍긴다. 나는 주머니 안쪽에 돌돌 말린 하얀 조각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비키가 급하게 써 내려간 듯한 편지가 있었다. 아마도 화장실에 들렀을 때 적은 모양이었다.

[저번에 부탁했던 정보! 헤르간 생존자들은 수도 외곽 어딘가에 갇혀 있다고 해요! 펄시에 부근이라고 들었어요! 안타깝게도 그들은 다시 밖으로 나올 수 없대요! 영영 갇혀 있을 거라고……. 미안해요, 말레드레드. 안 좋은 소식이라서.]

편지는 거기에서 끝이었다. 나는 편지를 쥔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영영 갇혀 있을 거라니. 그 말은 그들이 거기서 살아나올 수는 없다는 건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시 벨을 만나러 간 나는 아론 옆에 치료사가 있는 걸 보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 중으로 그를 소환하겠어요.”

“정말인가요?”

벨은 치료사가 들을까 목소리를 낮추며 재차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만과 분노로 꽉 차 있었지만 평정을 유지하며 말하는 게 필요했다. 나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대신 한 가지 알고 싶어요. 헤르간의 생존자들. 그들은 어디 머물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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