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그리고 마왕의 모습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제 세계로 물러나는 그를 보고 있는데 마왕의 눈길이 잠시 문으로 향했다.
“누군가 서 있군. 곤란해지는 건 아니겠지?”
마왕은 즐거운 투로 말했다. 곤란해지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이내 그는 사라졌다. 나는 등골이 오싹해져서 문을 바라보았다. 누가 서 있는 거지? 설마 아론이 왔을까? 하지만 그는 묶여 있는데…….
“말레드레드. 안에 있나요?”
다행히 들려오는 목소리는 벨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한 파동이 느껴져서요. 괜찮은 거예요?”
“괜찮……, 아, 요…….”
나는 간신히 말했다. 책장을 짚고 일어서자 다리로 체액이 흘러내린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가 들어가도 될까요?”
“아, 아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문이 반쯤 열렸다. 벨은 내 모습을 보고는 흠칫 했다가 이내 차분한 얼굴로 수건을 가져오겠다고 했다. 그녀는 바로 돌아왔다. 커다란 수건은 내 몸을 감싸기에 충분했다. 벨은 침착하게 말했다.
“뒤는 제가 시종을 시켜 치울게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얼굴로 피가 통하지 않는 기분이었다. 입술을 달싹거리자 벨이 선수를 치며 말해 왔다.
“마왕이 온 거죠?”
“…….”
“파동은 마기였어요. 강한 기운은 아니었지만 무겁고 짙더군요. 그래서 말레드레드가 그와 있다는 걸 알았죠.”
벨은 내가 가늘게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수치심으로 굳어진 얼굴이 어때 보였는지 몰라도 오히려 벨은 상냥하게 나를 부축하며 말했다.
“수고했어요.”
“!”
“힘들겠지만 이것으로 마왕이 당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건 확실해지는군요.”
칭찬을 받는다? 그것도 마왕과 함께 있다 이런 몰골로 나타났는데? 나는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걸 느꼈다. 부끄러움이 일었다. 그것은 이내 황당함으로 변했고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바뀌었다. 나라는 개인은 역시 도구일 뿐인가. 이런 모습이 오히려 임무를 성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척도가 되다니. 한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기분이다. 그러나 내 난감하고 불쾌한 기분과는 상관없이 벨은 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말해 줄 수 있어요?”
“…….”
“아무거나 좋아요. 마왕이 한 이야기라면 뭐든지 이용 가치가 있을 겁니다.”
벨은 조용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나를 꾀었으나 이야기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왕과의 관계가 기분 나빠서도 아니었고, 엉망인 몸 때문도 아니었다. 이런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게 참담해서였고 이 이야기가 황제의 귀까지 들어간다는 게 비참해서였다.
나는 최대한 기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입을 열었다.
“……일단 씻고서요.”
“어머, 물론 그래야죠. 목욕물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벨은 지나가던 시종에게 고갯짓을 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서야 그녀가 준 수건을 던졌다. 머리가 어지럽고 전신이 나른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마음의 무거움이, 꺼림칙함이 더욱 날 괴롭히고 있었다.
어떻게 목욕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간신히 물 밖으로 나왔을 때 내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너무 목욕탕에 있었던 걸까. 나는 비척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벨이 새 옷을 들고 서 있었다.
“괜찮아요?”
그 목소리가 가식적으로 들린다. 나는 고개를 짤막하게 끄덕이고는 그녀의 손에 들린 옷을 입었다. 하얀 원피스. 얼룩이 생기면 금세 티가 나는 그 순백색이 왠지 사람을 질식시킨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벨은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마왕과 버젓이 바르지 않은 곳에서 정사를 한 것을 아는데도 이 신망이 가득한 눈동자는 무엇일까. 그녀는 내가 굉장한 비밀을 말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가 입을 열었다.
“저번에 그가 목을 자른 마족.”
“아, 고위 마족이요? 여성 개체였던.”
벨은 재빨리 대꾸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그녀의 역할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호응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아직 살아 있대요.”
“네? 정말이요?”
벨은 무척 놀란 몸짓을 보였다. 벨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분명 마왕이 목을 떨어뜨렸는데……. 믿을 수가 없군요.”
“완전히 살아난 것은 아니에요. 그의 말에 의하면 회복하기까지는 수백 년이 걸릴 거라고.”
“아아, 그렇군요. 그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겠어요.”
벨이 중얼거렸다.
“그리고요?”
나는 벨을 보며 그것 외에는 없다고 말했다.
“당신에게 뭘 바라던가요? 아니면 우리 세계에 뭘 바라던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밖에 이야기한 게 없어요. 그가 자른 마족의 몸이 재생된다는 거……. 그녀가 언젠가 마왕이 될 거란 정보하고요.”
“유용한 정보네요.”
벨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차기 마왕이 어떤 성향인지에 대한 건 아주 쓸모 있는 정보에요. 대비를 할 수 있으니까요. 폐하께 이 이야기를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건 오늘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한다는 거겠지? 마왕과 관계하는 사제, 불결하고 음탕한 사제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속이 불쾌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고개를 돌렸다.
“말레드레드.”
대화를 그만하고 싶은 나와 달리 벨은 강조하고 싶은 게 있는지 굳이 내 손을 잡아 왔다. 나는 그녀의 손길에도 차갑게 그녀를 응시했다. 벨은 다정하게 말했다.
“이게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알아요. 하지만 견뎌야 해요.”
“…….”
“말레드레드는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일을 하는 거예요. 이건 폐하를 영광스럽게 하는 일이자, 제국을 훌륭하게 빛낼 성과가 될 겁니다.”
그러니까 자부심을 가지라고, 그렇게 침울한 얼굴을 하지 말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다음에도 마왕이 오면, 물론 저도 알겠지만 말레드레드도 말해 주세요.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무엇을 묻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싶어요.”
벨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놓았다. 그녀가 나가고 나는 그녀의 온기가 남아 있는 손을 쳐다보았다. 이것은 다정함이 아니다. 그저 도구를 달래는 손길이지. 그런 생각이 치솟자 더욱 울적해진다. 어쩌면 마왕의 말대로, 나는 망설일 게 없는지 모른다. 이곳에서의 역할은 이제 이런 것밖에 없다는 걸 느껴야 할지 모른다.
나는 어둠의 존재로서, 욕망을 탐하는 마족으로 존재해야 할지 모른다. 그 생각이 쿡쿡 머리를 쑤시며 가슴까지 어둡게 점령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나는 어둡고 침울한 마기가 가득한 방 안에서 일어나 계단을 올라갔다. 왜 아론을 보고 싶었는지, 어째서 아론의 얼굴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논리적으로 합당한 설명은 없다.
그저 그의 얼굴을 봐야만 내 마음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따라서 나는 3층으로 올라갔고, 희미한 달빛 아래에 누워 있는 그를 응시해야만 했다.
“……말레, 드레드?”
아론은 멈칫하며 내 이름을 불렀다. 몸이 편치 않은 자세로도 내 기척을 금방 알아차리는 그가 대단할 뿐이다. 나는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창밖 묽은 어둠 사이로 드러난 달빛이 내 얼굴을 온전히 비치지 않기를 왜인지 바라면서.
“무슨 일 있었어요?”
“왜?”
“표정이 어딘가 어두워서요.”
아론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나는 그의 섬세한 시선을 피해 고개를 내렸다. 밧줄은 여전히 그를 단단히 구속하는 매개체였고 그의 힘을 차단하는 속박구였다. 나는 그에게 몸은 어떠냐고 물었다. 아론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움직이질 못하니까 불편해요. 훈련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걱정되고요.”
“너는 기사니까.”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맞장구를 쳤다. 아론은 그런 나를 빤히 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괜찮아요. 그래도 말레드레드와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
“이런 상태인데도?”
나는 믿을 수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아론은 희미하게 웃었다.
“견디면 되죠. 이보다 더한 밤도 보낸 걸요. 그때는 지독하게 어두웠고 추웠고…….”
아론의 목소리는 과거로 스며든 것처럼 스산했다.
“외로웠어요. 말레드레드를 생각하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었어요.”
“난 너처럼 못해.”
나는 아이처럼 말하고 말았다.
“너처럼 누군가를 떠올리며 고통을 견딜 수 없을 거야.”
차라리 고통을 외면하며 현실과 타협할 것이다. 실제로도 그랬다. 아론이 사라지고 나서 그를 잊으려고 했으니까. 누군가와 헤어지면 돌아보지 않으려고 했으니까. 그게 훨씬 마음이 편했고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말에 아론은 도리어 웃었다. 나는 왠지 기분이 나빠지고 말았다. 왜 저리 귀엽다는 듯이 웃는 거람.
아론은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말레드레드는 제가 아니니까요. 저처럼 할 필요가 없죠. 말레드레드는 말레드레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요.”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론은 나를 보았다. 나는 거듭 묻고 말았다.
“내가 더 선하고 착해야 한다고? 사제에 걸맞게 말이야…….”
나는 나도 모르게 내 몸을 껴안고 말았다. 알 수 없는 한기, 내가 곧 마족이 될 거라는 그런 불안감이 몸을 잠식한다. 나는 두려웠다. 이제 인간이 아니라니. 아무리 바라도 결국 마족이 되고 말 거라니. 아론은 멈칫했다.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는데…….”
아론은 잠깐 나를 보더니 곧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창밖 풍경에 간신히 닿은 듯했다.
“말레드레드는 늘 말레드레드답다고 생각했어요. 아침이면 아침 햇살에 걸맞고, 밤이면 저녁 달빛에 걸맞다고. 그저 따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죠.”
나는 홀린 듯이 그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내다보고 말았다. 어둡고 깊은 밤. 밤하늘에는 밝은 달이 떠 있다. 이것은 완전히 어둡다고 하기에도, 그렇다고 밝다고 하기에도 마땅치 않다. 아론은 조용히 말했다.
“저 하늘처럼. 그저 존재할 뿐이죠. 늘 동경하고 그리워할 수밖에 없이.”